[황규관의 김수영-되기] (11) 육법전서와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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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법전서와 혁명

기성 육법전서를 기준으로 하고
혁명을 바라는 자는 바보다
혁명이란
방법부터가 혁명적이어야 할 터인데
이게 도대체 무슨 개수작이냐
불쌍한 백성들아
불쌍한 것은 그대들뿐이다
최소한도로
자유당이 감행한 정도의 불법을
혁명정부가 구육법전서를 떠나서
합법적으로 불법을 해도 될까 말까 한
혁명을―
불쌍한 것은 이래저래 그대들뿐이다
그놈들이 배불리 먹고 있을 때도
고생한 것은 그대들이고
그놈들이 망하고 난 후에도 진짜 곯고 있는 것은
그대들인데
불쌍한 그대들은 천국이 온다고 바라고 있다

그놈들은 털끝만치도 다치지 않고 있다
보라 항간에 금값이 오르고 있는 것을
그놈들은 털끝만치도 다치지 않으려고
버둥거리고 있다
보라 금값이 갑자기 8,900환이다
달걀값은 여전히 영하 28환인데

이래도
그대들은 유구한 공서양속(公序良俗) 정신으로
위정자가 다 잘해 줄 줄 알고만 있다
순진한 학생들
점잖은 학자님들
체면을 세우는 문인들
너무나 투쟁적인 신문들의 보좌를 받고

아아 새까맣게 손때 묻은 육법전서가
표준이 되는 한
나의 손등에 장을 지져라
4·26혁명은 혁명이 될 수 없다
차라리
혁명이란 말을 걷어치워라
하기야
혁명이란 단자는 학생들의 선언문하고
신문하고
열에 뜬 시인들이 속이 허해서
쓰는 말밖에는 아니 되지만
그보다도 창자가 더 메마른 저들은
더 이상 속이지 말아라
혁명의 육법전서는 <혁명>밖에는 없으니까

김수영은 이 시를 쓰기 며칠 전에 “시를 쓰는 마음으로/꽃을 꺾는 마음으로/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죽은 옛 연인을 찾는 마음으로/잃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우리는 우리가 찾은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로 끝나는 ‘4·19 순국학도 위령제에 부치는 노래’라는 부제가 붙은 「기도」라는 시를 쓴다. 전집에 의하면 「기도」의 탈고 날짜는 1960년 5월 18일이다.

그런데 바로 일주일 후인 5월 25일에 “혁명이란 말을 걷어치워라”라는 이 시를 썼다. 그리고 이후 김수영은 혁명에 대한 한탄을 계속 토해낸다. 도대체 일주일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혁명 후 민주당 정부가 무슨 정책을 발표, 시행했는지는 별도의 공부가 필요할 터인데, 이 시에 의하면 민주당 정부는 이승만 독재정권의 완료를 혁명의 수행으로 인식했던 듯하고 김수영은 그것을 넘은 혁명을 기대했던 듯하다.

▲1960년 10월 1일. 2공화국 수립 경축 기념식에 참석한 윤보선 대통령, 장면 총리. [사진=e영상역사관 홈페이지]

여기서 우리가 통상적으로 갖기 마련인 기다림과 기대를 김수영은 단호하게 걷어차 버리는데, 유감스럽게도 그의 직관은 들어맞고 말았다. 1960년 6월 17일 일기에는 그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혁명은 상대적 완전을, 그러나 시는 절대적 완전을 수행하는 게 아닌가.” 문학주의자들은 이 구절까지만 읽고는 하지만, 김수영이 생각한 혁명은 6월 21일에 쓴 일기에서 그 단초를 읽을 수 있다. “다음은 빈곤과 무지로부터의 해방.” 다시 6월 30일 일기에는 “제2공화국! 너는 나의 적이다”라고 쓴다.

1960년 여름의 일기를 따라 읽어 보면, 우리는 김수영이 상상하는 혁명의 이미지를 조금 더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저쪽을 무서워하는 마음이 없어져야 한다고 박xx의 말. 누가 아니라나. 커피와 양담배를 배격하는 학생들의 데모. 좋다. 이러다가는 머지않아 ㅇㅇㅇㅇ도 있을 것 같다는 아내의 예언. 앞으로 경제논문을 번역해 보고 싶다.” 연구자들의 논문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저쪽”은 ‘북한’이고, “ㅇㅇㅇㅇ”는 ‘사회주의’로 추측된다. 1954년에 쓴 「도취의 피안」이 사회주의에 대한 노스탤지어였다는 부인 김현경의 증언을 참조했을 때, 김수영이 바란 혁명은 최소한 “빈곤과 무지로부터의 해방”이었던 것을 증언해준다.

따라서 「육법전서와 혁명」에서 김수영이 민주당 정권에 대해서 퍼붓는 저주는 단순한 울분이 아니라 자신이 바랐던 혁명이 좌초될지도 모른다는 직감에 따른 것이었다. “금값”과 “달걀값”의 대비는 혁명의 좌절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낭만적인 관념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혁명의 좌절을 느꼈던 것이다. 이어서 그는, 그 당시의 혁명이란, “학생들의 선언문하고/신문하고/열에 뜬 시인들이 속이 허해서/쓰는 말밖에는 아니” 된다고 질타하면서 “그보다도 창자가 더 메마른 저들”을 호명한다. 다시 말하면, 지식인들이 생각한 혁명의 대열에 자신은 설 수 없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이 또한 김수영의 민중-되기의 증좌다.)

혁명이란 기존의 법을 깨는 ‘불법’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기에, 김수영이 봤을 때는 민주당 정권이나 “학생들의 선언문”이나 “신문”이나 “열에 뜬 시인들”의 합법적인 혁명은 혁명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서 김수영의 역할을 과대설정해서 김수영의 소시민성을 지적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것은 시인에게 혁명가의 역할까지 짐 지우려는 훗날의 사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시인’ 김수영의 역할은 다른 데에 있었다. 일기를 다시 참조해 보자면, “절대적 완전을 수행”하기 위한 시의 길이 그것이다.

물론 그 성과는 한참 뒤에 드러나는데, 1960년 여름부터 1961년 5·16 쿠데타 사이에는 “고독”이 그에게 다시 찾아온다. 물론 이때의 고독은 1950년대의 고독과는 다르다. 이다음에 쓴 시 「푸른 하늘을」에서 혁명은 “고독해야 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물론 혁명은 고독하지 않다. 도리어 혁명은 실존적인 고독을 해방시키는 순간적인 폭발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니까 김수영이 말하는 “고독”은 자신이 바란 혁명이 좌절된 데서 오는 “고독”인 것이다. 그 “고독”은 이후 조롱과 풍자, 반어, “중용”을 잃은 직설로, 때로는 “피곤”으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우리가 이 시를 다시 읽었을 때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것은 아마도 김수영 시가 갖는 명료함과 급진성이 언제나 우리를 대한민국의 한복판으로 던져놓기 때문일 것이다. 4·19라는 혁명의 열기 속에서도 ‘혁명’을 빙자한 반동이 있어왔는데 무기력과 지리멸렬이 특징인 우리의 시대에는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금값은 오르고 달걀값은 떨어지는 현상이 의미하는 것이 지금은 차라리 일상사가 되었다고 해야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는 정권만 바뀌면 “천국이 온다고 바라고 있다”는 점이다. 이 불가사의한 현상의 반복은,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을 조금 냉정하게 바라볼 줄 모르는 사태 속에서 일어나는 일일 것이다.

1964년에 쓴 산문 「양계 변명」을 보면 김수영의 양계는 1956년 즈음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 나온다. “이걸 시작한 게 한 8년 가까이 되나 봅니다. 성북동에서 이곳 마포 서강 강변으로 이사를 온 것이 그렇게 되니까요. 먼저 우리들은 돼지를 기르면서 닭을 한 열 마리가량 치고 있었지요.” 지난번 글에서 김수영이 서강으로 이사를 간 것이 그의 시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말한 바 있는데, 김수영에게 서강 강변에서 돼지와 닭을 치고, 밭을 일구는 노동은 그의 시의 밑바탕을 이루는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김수영의 모더니티를 논할 때 평자들이 그의 노동을 ‘번역’에 한정시키는 경향이 있으나, 김수영 신화가 존재하고, 그가 문학주의자들에게 오독되는 게 사실이라면 바로 이 체험이 그의 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고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본다.

사실 김수영의 삶에서 이런 생활노동이 없었다면 “달걀값”에 대한 감각도, 다음 혁명이 “빈곤과 무지의 해방”이라는 인식도 없었을지 모른다. 어떤 글에서 자기 시의 비밀은 자기가 번역한 것을 보면 안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의 시의 어떤 비밀은 바로 ‘노동’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 시에서 그가 분개하는 것은 자신 같은 “불쌍한 백성들”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거나 “위정자가 다 잘해 줄 줄 알고만 있”는 혁명은 “혁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혁명이란 방법부터가 혁명적이어야” 하는 것이고 ”합법적으로 불법을 해도 될까 말까 한“ 것이다.(여기서 김수영은 ‘합벅적으로’에 방점을 찍었다.)

4·19 혁명이 일어나고 한 달이 조금 지난 시점에 혁명의 실패를 단언한 이런 용감무쌍함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가 생활 속에서 겪은 경험이 토대가 되었던 게 확실한 것 같다. 무엇보다 백성들을 속이는 혁명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런 혁명은 다 위정자들의 잇속이나 챙기는 일에 지나지 않는 일이니까 말이다. 오늘날에도 역시 그러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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