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을 영위해 나감에 있어서 반드시 심오한 철학적 질문을 던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적 질문을 제기하지 않아도 사람은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잘’ 살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철학적 질문을 제기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니, 적어도 철학을 직접 ‘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라면, 죽음의 문제와의 대결은 불가피하다. 죽음이 철학의 유일한 문제는 아닐지라도, 철학적 사유의 가장 중요한 주제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철학이 죽음을 문제 삼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우선 철학은 죽음이 ‘무엇’이냐고 물을 수 있다. 이 때 문제 되는 것은 죽음의 존재론적 ‘본질’, 즉 죽음이라는 ‘개념’의 의미이다. 죽음은 삶의 절대적 종말인가? 아니면 죽음 후에도 삶은 어떤 형태로든 계속되는가? 영혼불멸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의 형태로 제기되는 이러한 죽음의 본질에 대한 물음은, 비록 오늘날에 들어 와서는 다소 그 비중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죽음에 대한 철학적 성찰의 역사에서 언제나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해 왔다.
죽음의 본질 외에 철학이 죽음을 문제 삼는 또 다른 방식은 죽음 앞에서 취하는 우리의 ‘자세’이다. 인간이 각자 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은 이성적인가? 목전으로 다가온 죽음에 대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죽는다는 사실에 대한 앎은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이들 물음 가운데 철학자들이 특히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죽음 앞에서 느끼는 공포였다. 철학사를 들여다보면 의외로 많은 철학자들이 다양한 방식의 논변을 통해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제거하고, 그것으로부터 자기 자신과 타인을 해방시키고자 노력했음을 우리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 중 하나인 <파이돈>에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 아마도 최초의 - 철학적 성찰과 만난다. <파이돈>에서 플라톤은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앞두고 어떤 태도를 보여 줬는지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플라톤의 묘사를 통해 드러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단적으로 말해서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자,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기다리고 반기는 자의 모습이다. (그렇다고 소크라테스를 ‘자살 예찬론자’로 오해하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소크라테스는 자살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감옥에 갇힌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한 일은 바로 “왜 철학자는 죽음에 임했을 때 즐거울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증명”이었다.
철학자가 죽음을 앞두고 즐거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죽음이란 영혼의 해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은 육체라는 감옥으로부터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고, 철학자의 사명이 성적 쾌락을 비롯한 온갖 육체적 즐거움을 멀리하고, 오직 영혼의 눈으로 진리를 바라보는 것, 그러한 일에 전념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적어도 소크라테스에게는 그랬다), 진리탐구로서의 철학함이란 육체로부터 영혼의 해방, 즉 죽음을 향해 한발 한발 조금씩 나아가는 노력 이외의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한 철학자는 언제나 죽음에 다가가며 어느 누구보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이다. (중략) 그러므로 죽음이 다가왔을 때 죽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애지자(愛智者), 즉 철학자가 아니고 육체를 사랑하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는 돈이나 권력을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두 가지를 다 사랑하는 사람이다.”
철학과 인연을 맺은 지 올해로 딱 30년이 된 나는 조용히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그대여,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