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으면 그 근처에 버려다오.”
그리스 철학자 ‘시노페의 디오게네스’(Diogenes of Sinope; 기원전 412~324년?)*의 말이다.
어떤 권위도 부정하고 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한 절대자유를 추구하며 살아간 첫 번째 아나키스트로 디오게네스를 선택했다. 그는 들판을 방랑하는 들개처럼 세속적 권력이나 체제, 그리고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평생 거리에서 노숙하거나 나무술통 속에서 살았다. 그가 죽은 후 무덤 앞에는 강아지 한 마리가 항아리 안에 들어가 있는 형상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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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게네스는 ‘키니코스학파(Greek: Κυνικοί, Latin: Cynici)의 대표적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어 키니코스는 개를 뜻하는 그리스어 Κύνος에서 유래하는데, 견유학파(犬儒學派)로 부르기도 한다.
‘견유’라는 표현은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한 마리 들개처럼 간소하고 단순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다른 하나는, 개처럼 사회를 향해 짖고 그 발목을 물면서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그들을 괴롭혀서 그들의 삶에 관해 달리 생각하게 하는 사람을 뜻한다. 이러한 집단을 일컬어 ‘견유학파’라고 불렀다.
이 학파의 주요 가르침은 금욕․자율․자급자족․관습 무시․반문명사상의 실천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폭력적이고 독설적인 언어를 사용했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배변을 보고, 성행위를 하며 일부러 미친 척을 하기도 했다. 또한 그들은 집과 가족, 소유를 포기했고, 가난을 적극 권장했다. 그들은 넝마 같은 외투를 입었고, 턱수염은 자르거나 다듬지도 않았으며 머리는 산발이었다. 그들이 맨발로 다니는 것은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의미했고, 배낭을 지니고 다니며 구걸하며 생계를 유지했다(박흥용, 304~305쪽).
이처럼 그들은 기존 사회의 체제와 사상, 그리고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삶의 실천을 통해 현재의 사회는 부패하고 무가치하다는 것과 인간으로서 최선의 길은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삶의 방식은 다분히 도발적이고, 도전적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짤막한 경구(aphorism)나 간명한 진술을 주로 사용하였다. 또한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대화 형식의 논법인 디아트리베(diatribe)와 내면의 생각을 대담하고 솔직하게 말하는 화법인 파레시아(parresia)도 그들이 즐겨 사용한 방법이었다(박흥용, 304~305쪽).
키니코스학파의 학문을 시니시즘(Cynicism)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영어로 ‘냉소적인’이라는 뜻인 ‘cynical’이라는 단어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애초 시니시즘은 금욕주의 사상을 뜻하는 것이었으나 철학이나 예술, 문학 등에 대해서도 냉소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디오게네스의 영향을 받아 ‘냉소주의’라는 뜻도 함께 갖게 됐다(네이버 지식백과: 키니코스학파[Cynics, ─學派, Κυνικοί]).
키니코스학파의 학문은 ‘비정한 금욕주의’로 불렸던 스토아학파(Stoicism)가 형성되는 데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스토아학파의 창시자 제논은 기원전 300년경 이상적 사회(a utopian society)에 대한 그의 비전으로 “국가의 구조가 필요하지 않은 공화국”을 제시했다. 그 주장의 핵심 내용을 요약하면, “국가의 전능과 그 개입 및 통제를 거부하고, 개인의 도덕법의 주권(the sovereignty of the moral law of the individual)을 선언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제논의 ‘정부 없는 자유공동체’의 비전은 플라톤의 공화국사상인 ‘국가-유토피아(the state-Utopia)’와 완전히 반대된다.
제논은 자신의 비전을 제시하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기보존에 필요한 본능(the necessary instinct of self-preservation)’에 주목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그 본능은 인간을 이기적으로 이끌고 있지만,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만일 인간이 그 본능(곧 본성)을 따른다면, 그들은 구태여 법원이나 경찰은 물론, 사원이나 공중예배, 그리고 돈(화폐)도 필요없다고 주장하였다. 제논의 사상은 오늘날의 아나키즘과 견주어보아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진보적이다. 크로포트킨이 “고대 그리스의 아나키즘 철학의 주창자”라며 제논을 높이 평가한 이유이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사실은, 제논의 이 비전은 키니코스학파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학파의 창시자 안티스테네스(Antisthenes; 기원전 440년~336년)는 가난을 미덕으로 삼고 덕에 충실한 금욕주의적 삶을 강조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배고프지 않을 만큼, 목마르지 않을 만큼 가졌다. 벗지 않을 만큼 입었다. 밖에 있을 때는 저 부자 칼리아스보다 더 떨지 않고 안락하다. 안에 있을 때는 따뜻한데 왜 옷이 필요한가?”라며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중시한 것은 인간의 자유였다. 안티스테네스에 따르면, 현자(賢者)는 자유로운 인간이다. 왜냐하면 현자는 사회의 모든 구속에 초탈할 줄 알기 때문이다. 또한 현자는 법이 아니라 덕에 따라서 자신의 행동을 삼가고, 공사(公事)에 괘념치 않는다. 공사에 전념해야 하는 정치가는 불행한 사람들이다. 우리나 그들이나 모두 똑같은 사람인 까닭이라는 그의 말은 2천년 이상의 세월을 거슬러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공명(共鳴)하는 바가 크다(장 프레포지에, 20쪽).
안티스테네스의 제자 가운데 디오게네스는 유독 상식을 뛰어넘은 괴팍한 언행을 한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길거리에서 자위를 하고, 대낮에도 등불을 들고 참사람을 찾아다닌 일화는 유명하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이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대왕과의 일화이다.
알렉산더대왕이 디오게네스를 찾아왔을 때 그는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대왕이 물었다.
“내가 지금 당신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을까? 당신도 알겠지만 나는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는데 말이야.”
“아! 그러시다면 제발 몸을 좀 비키셔서 폐하의 그림자를 치워주시겠습니까? 저와 해 사이를 가리고 있는 폐하의 그림자 말입니다.”
그의 불손한 말에 신하들은 분개하였고, 대왕에게 그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왕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구나.”
하지만 그냥 넘어갈 디오게네스가 아니었다.
“폐하만 아니라면, 나는 그 어떤 사람이 되어도 좋겠습니다.“
디오게네스의 마지막 말은 후일 각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디오게네스는 한 나라의 왕이 가지고 있는 어떤 권위도 거부하고, 오직 인간의 자연스런 욕구인 ‘행복’을 추구하였다.
“행복이란 인간의 자연스런 욕구를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만족시키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것은 부끄러울 것도 없고 보기 흉하지도 않으므로 감출 필요가 없다. 이 원리에 어긋나는 관습은 반자연적이며, 또한 그것을 따라서도 안 된다.”
그는 가능한 적게 가지고, 적게 욕망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행복하기 위한 조건으로 보고, 실제로 자신의 현실에 만족하는 자족의 삶을 살았다. 그가 추구한 반문명의 삶은 곧 자연적 삶이었다. 그는 평생 거리를 떠도는 들개처럼 집 대신 커다란 나무술통에서 살았다. 철저한 ‘무위자연’ 혹은 ‘무소유’의 삶을 산 그는 한 권의 저서도 남기지 않았다. 오직 다른 이들의 저술이나 일화를 통해 그의 언행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아테네 시민도, 그리스인도 아니다. 한명의 세계시민이다(I am not an Athenian or a Greek, but a citizen of the world).”
이 말대로 디오게네스는 국적을 갖지 않고, 아테네 거리를 떠돌며 생활하였다.
당시 아테네는 그리스 전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인구밀도가 아주 높은 도시였다. 기원전 5세기 중엽의 아테네에는 성인 남성 시민이 35,000명 정도, 성인 남성 노예가 20,000~30,000명, 아테네 출신이 아닌 자유인으로서 아테네에 거주하는 거류외인(居留外人)이 10,000~15,000명 정도 있었다고 추정된다(네이버 지식백과: 아테네). 거류외인들도 자유인으로서 신체의 자유는 있었지만 아테네시민권은 가질 수 없었다. 정치참여권이나 재판출석권 등 정치적 권리는 물론 토지소유권도 원칙적으로 아테네시민에게만 허용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디오게네스는 아테네시민권과 그리스 국적을 거부함으로써 그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였다.
국적은 국가와 국민을 연결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각국마다 국내법으로 국민이 되는 요건을 정하여 ‘국민’과 ‘외국인’을 구별하여 대우하고 있다(예: 우리헌법도 제2조 1항에서,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는 요건은 법률로 정한다”고 하면서, 『국적법』을 두고 있다). 어느 국가의 국적도 갖지 못한 자, 즉 ‘무국적자’는 국적이 없으므로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설령 국적을 가진 이들이라 할지라도 난민자나 망명자 등은 어느 국가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여러 나라를 떠돌고 있다.
물론 국적은 근대국가가 성립한 이후 확립된 제도로서 기원전 3~4세기 당시의 그리스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여부를 떠나 디오게네스는 아테네시민권과 그리스 국적을 포기함으로서 그가 행사할 수 있는 정치적 및 시민적 권리를 포기하였다. ‘국적의 거부’는 오늘날에도 국가주의에 도전하는 가장 도발적인 행위의 하나라는 측면에서 그의 결단은 후세의 철학자와 사상가들에게 많은 학문적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다음으로, 디오게네스는, “나는 한 명의 세계시민이다”고 선언함으로써 ‘세계시민주의’를 주창하고 있다. 세계시민주의를 뜻하는 Cosmopolitanism은 어원적으로 그리스어의 Cosmos(세계)와 Polites(시민)의 합성어로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하나의 동포로 여기고, 전 세계를 고향으로 보는 사상이다. 디오게네스는 스스로를 “세계를 고국으로 삼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코스모폴리테스(Kosmopolites)’로 부르면서 국가와 민족, 인종, 혈통이나 국적에 따른 차별이나 편견을 떠나 세계시민이 되고자 하였다. 그의 이 사상은 스토아학파로 이어져 후일 세계시민사상의 토대가 된다.
세계시민주의는 디오게네스에게서 처음으로 유래된 것은 아니다. 그가 생존하던 당시보다 적어도 1세기 전(기원전 5세기)에 활발하게 활동한 소피스트들이 주장한 인간의 자유와 평등 사상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을 구별하지 않았고, 모든 인간은 같은 종족이라고 간주했다.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에는 소크라테스와 토론하는 히피아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그리스 중심의 자문화중심주의에 반대하면서, “보편적 도덕규범이 개별적 법과 관례를 초월하며, 자벌적으로 우러나온 우애가 변치 않을 때 인류가 하나로 통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아시아와 유럽은 대서양의 두 자매”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시민(코스모폴리턴)’이라는 핵심 개념을 정립한 것은 바로 디오게네스였다. 이 말이 그 후 ‘세계시민주의’로 발전하였다. 디오게네스에게 있어 ‘세계시민’은 진정한 인류의 연대를 상징하는 것이자 민족주의에 대한 거부를 나타내는 것이었다(자크 아탈리,『세계는 누가 지배할 것인가』). 국가와 민족이라는 다분히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체제와 형식에서 벗어나 인간의 자유로운 이동과 교류라는 이상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디오게네스의 사상은 오늘날의 자유사상에 비춰보아도 전혀 뒤지지 않는 탁월한 내용을 담고 있다.
마지막으로, 디오게네스의 행복관 혹은 소유관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최소한 소유하고 있는 것에 만족하는 자가 가장 큰 부자이다(He has the most who is most content with the least).” 그의 소신에 따라, 그는 평생 집을 비롯한 어떤 재산도 소유하지 않고, 한 벌의 옷과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면서 나무술통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86세(혹은 89세. 여러 설이 있다)까지 살다 죽었다고 한다. 죽기 전 그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몸을 쓰레기더미에 던져둘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친구들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장엄하게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그리고는 파로스 대리석 기둥에 개 한 마리를 새기고는 아래의 시를 묘비에 새겼다.
“청동마저 시간을 따라 늙어간다.
그러나 너의 이름 디오게네스여! 늙음을 뛰어넘어 영원하리라.
오직 너만이 홀로 죽음을 뛰어넘어 독립적인 삶의 영광을 보여주었고
행복한 존재의 오솔길을 따라 그 누구보다 쉽게 달려갔기 때문에.“
“디오게네스는 어떤 인물인가?”고 묻는 질문에, 플라톤은 “미친 소크라테스”라고 했다. 그만큼 디오게네스는 문명 이전의 인간, 문명에 반대하고 자연의 본성에 충실한 인간에 대해 탐구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을 통하여 실천하였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국가 체제를 옹호하고, 여성과 노예를 비하한 반면, 디오게네스는 국가가 예속되기를 거부하고, 아테네시민 여부를 묻지 않고 그들을 평등하게 대우하도록 요구하였다. 인간의 자유와 자율, 그리고 자급자족을 주장하며,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사상을 실천한 그는 진정 위대한 자유인이었다. 그가 뿌린 자유의 씨앗은 세월을 따라 성장하고, 열매를 맺었다.
디오게네스여! 당신의 이름, 시간을 뛰어넘어 영원하리라. 그의 묘비에 새겨진 시구(詩句)처럼.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철학자 ‘아폴로니아의 디오게네스(Diogenes of Apollonia)’와 구별하기 위하여 ‘시노페의 디오게네스’로 부른다.
<참고문헌>
•박흥용, “예수와 견유학파의 상관성에 대한 비판적 고찰”, 신약논단, 2007, 제14권 제2호.
•자크 아탈리, 『세계는 누가 지배할 것인가』, 청림출판사, 2012.
•장 프레포지에(이소희․이지선․김지은 옮김), 『아나키즘의 역사』, 이룸, 2003.
•Diogenes Quotes: http://www.brainyquote.com/quotes/authors/d/diogenes.html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