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고난주간 중인 4월 16일(수)에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다. 우리는 그 참사로 인해 진짜 고난주간을 보냈다. 그 뒤 일 년 동안 자식을 잃은 부모들과 뜻을 같이하는 민주시민들이 진상규명을 위해 지난한 투쟁을 했다. 그 과정에서 정부가 보여준 태도는 분노와 한숨만 나오게 했다. 하여간 그 결과가 세월호 특별법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현실 때문에 금년에도 여전히 아프고 답답한 고난주간을 보내야 했다. 정부가 만든 특별법 시행령은 다시 한 번 이 정부의 악마성을 보여줬다. 부모들과 민주시민들은 '시행령을 폐기하라'는 새로운 구호를 외쳐야 했다. 지난 일 년 동안 죽을 고생 하며 간신히 만들어 놓은 특별법은 투쟁한 보람도 없이 침몰위기에 몰렸고, 진실규명은 원점으로 돌아가 버렸다.
4월 2일(목) 시행령을 규탄하는 삭발식 기자 회견에서 한 학부모의 발언 모습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 어머니는 미친 상태와 안 미친 상태 사이에서 간신히 외줄을 타는 듯이 보였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한이 맺혔다. 무엇보다 이 나라 대통령에 대해서, 그리고 이런 끔찍한 나라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양 살아가는 시민들에 대한 원망이 깊었다. 부모들이 간절히 바라는 일은 자식이 돌아와서 여느 날처럼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소박한 꿈은 이미 물 건너가 버렸고, 그러니 이제 우리 자식이 왜 죽어야 했는가, 어떻게 멀쩡히 살아 있는 아이들이 수장돼 버렸는가에 대해 이유라도 알고 싶어서 진상규명을 원하는 데, 정부는 '돈이나 받고 떨어져라'는 식으로 하니, 부모들은 악에 받칠 수밖에 없다. 부모들은 "돈은 니나 처먹고 우리 아이 살려내라"고 절규한다.
이런 나라 현실에서 부활절 말씀을 전해야 하는 내 마음도 무겁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님을 살리셨으니, 그의 권능으로 우리도 살리실 것입니다"(고전 6:14)라는 말씀처럼, 너무도 어이없는 죽음을 겪는 부모들에게 부활이 하나님의 은혜로 임하시기를 간절히 빈다.
고전 15장은 부활장이라고 부른다. 58절 전체가 부활에 대한 변증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울은 1절에서 자신이 말하는 게 복음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을 일깨워 드립니다."
3-5절은 자신이 전해 받고 또 전한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말한다. 전해 받았다는 말은 바울 이전부터 기독교 신조의 핵심이 있었음을 말한다.
복음의 내용은 모두 네 가지다. "그리스도께서 죽고, 묻히고, 살아나시고,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3절과 4절에서 주목할 표현이 있다. "성경대로"이다.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죽으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흗날에 살아나셨다는 말씀이다. 여기 성경은 구약을 말한다. 고린도전서를 쓴 연대가 54-55년경이다. 신약은 아직 정경으로 공인받기 전이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성경이라고 말할 때는 모두 구약말씀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구약 성경 어디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는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베뢰아의 유대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 사람들보다 더 고상한 사람들이어서, 아주 기꺼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행전 17:11) 우리도 성경에 대해서 베뢰아 교인들의 진지한 태도를 배워야 한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말씀의 출처는 어디인가? 가장 익숙한 말씀은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고난받는 종의 모습이다.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거의 사실적으로 표현한다. 특히 12절 말씀은 그의 죽음이 우리 죄를 위한다고 명시했다.
"그는 죽는 데까지 자기의 영혼을 서슴없이 내맡기고, 남들이 죄인처럼 여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졌고, 죄 지은 사람들을 살리려고 중재에 나선 것이다."(이사야 53:12)
시 69:21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하면 그들은 나에게 독을 타서 주고, 목이 말라 마실 것을 달라고 하면 나에게 식초를 내주었습니다." 특히 식초를 내주었다는 말씀은 예수가 목이 마르다고 하셨을 때, 신포도주를 마시게 한 대목이 떠오른다.
다음, 성경대로 사흗날에 살아나셨다는 말씀의 출처는 어디인가? 사흘과 연관해서는 호세아서 말씀이 있다.
"이틀 뒤에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니, 우리가 주님 앞에서 살 것이다."(호 6:2) 이틀 뒤나 사흘 만에 다시 일으켜 세우신다는 말씀이, 성경대로 사흗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유사하다. 또 부활을 암시하는 말씀도 있다.
"주님께서 나를 보호하셔서 죽음의 세력이 나의 생명을 삼키지 못하게 하실 것이며 주님의 거룩한 자를 죽음의 세계에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시편 16:10)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할 때는 시 16:10 말씀을 빠지지 않고 인용했다.(행전 2:31, 13:35) 그럴 정도로 이 말씀은 예수의 부활을 연상시키는 중요한 말씀이다.
이외에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는 여러 말씀이 있다. 그런데 어떤가? 인용한 말씀들이 명백하게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부활이다 하는 것을 증명하는가? 내용적으로 그리스도의 운명과 매우 밀접한 말씀도 있지만, 그보다는 해석적으로 그렇게 보는 말씀이 더 많다. 무슨 뜻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마음으로 볼 때에야, 구약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지을 수 있다. 인용한 시편이나 예언서 말씀에 나오는 그를(또는 나를) 예수로 봐야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살아나셨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이다. 예수교도들은 구약성경에 나온 이 말씀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온전히 이루어졌다고 굳게 믿었다.
또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나타나심이 우리에게 남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고대 세계 신들의 나타남과 매우 대조적이다. 사람들은(주로 왕이나 제사장) 꿈이나 비밀스런, 황홀한 종교적 경험을 통해 신적존재를 만난다.(또는 만났다는 신화를 만든다) 신화를 만드는 이유는 권력이 신으로부터 왔다는 권위를 입히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나타나심은 어떤가? 예수의 부활나타나심을 경험한 사람들을 보자. 많은 사람에게 동시에 여러 번 반복해서 나타났다. 오늘 성경말씀 5절부터 8절까지 '나타나셨다'는 말씀이 여섯 번이나 연속해서 나온다. 게바(베드로), 열두 제자, 오백 명의 형제자매, 야고보(예수의 동생), 모든 사도들, 마지막으로 칠삭둥이 자신(바울)에게 나타났다고 했다. 예수의 부활현현을 본 제자들의 사회적 계급은 어떤가? 모두 그 시대 하비루들이다. 세속 권력과는 무관한 사람들이다.
고대 신들의 현현은 오직 은밀하게 권력자 한 사람에게만 나타났다. 하지만 대조적으로 예수 부활현현은 어느 한 사람이 독점해서 권력화할 수 없도록 보편적으로 평등하게 나타났다. 바로 이 점이 고대세계 신들의 현현과 그리스도의 부활현현이 다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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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코르와트 사원. 출처: pixabay.com | | |
바울은 부활예수가 '맨 나중에 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다고 고백한다. 바울이 부활예수를 만난 사건도 특이하다. 바울은 길에서 부활예수를 만났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환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행전 9:3) 그리고 예수와 바울의 만남은 몰래 비밀스럽게 일어난 일이 아니다. 동행하는 사람들도 바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 목격했다.
무엇이 특이한가? 고대세계에서 신은 모양 빠지게 길 같은 데서 아무에게나 나타나지 않는다. 신은 꼭 신전에만 있다. 그리고 신전 깊은 곳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왕과 제사장 뿐이다. 지배자들은 신을 만나는 장소인 신전과 제단을 만드는 데 엄청난 공을 들인다. 사람들에게 위압감과 경외심을 주기 위해 외관에서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로 짓는다. 최대한 땅에서는 높게, 하늘에는 가깝게. 왕은 꼭 신전의 제단 안에서만 신의 뜻을 받고 백성과 신하에게 전달한다. 그 뜻이 신에게서 왔는지, 왕이 지어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여간 신은 신전에서만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나타나심은 참으로 평등하고 탈권력적이다. 그리스도교의 부활속성은 세속권력이 신을 이용하는 속성과 완전히 다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해하고 고백할 때 꼭 함께 기억해야 할 내용이다. 부활나타나심이 많은 사람에게 동시에 여러 번 반복해서 나타났다는 것.
오늘 부활말씀을 대면하는 우리는 부활을 어떤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부활은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어떤 변화인가? 새로운 세상을 향한 변화이다. 바울은 스스로 말했듯이, 하나님의 교회박해자였다.(9절) 옛 세상을 지키려는 율법수호자였다. 그랬던 바울이 율법 세계를 탈출해서 하나님의 교회라는 새 세상을 세우는 일에 전력을 다한다.
그리고 바울이 새 세상을 향해 전력을 다하도록 밀어준 원동력은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사흗날에 일으켜지셨다는 것이다. 사흘은 오늘내일 바로 다음날이다. 실제 예수가 무덤에 묻힌 시간은 48시간도 안 된다. 죽음은 짧게 지나갔다. 일으켜지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전제가 있다. 넘어지는 것이다. 넘어져야 다시 일으켜질 수 있다.
나는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을 보면서 놀란다. 고비마다 포기할 법도 한데, 다시 투쟁의 길에 나서는 것을 보면서 저 뒤에는 예수의 부활정신이 있다고 확신한다. 정부가 시행령조작으로 장난을 치자, 체념하지 않고 단번에 치고 나가는 것을 보면서, 다시 일어서는 그 정신에 감탄한다. 왜 죽음 같은 아픔과 좌절이 있을까? 다시 일어서라고. 그래서 예수의 부활이 있는 것이다.
살다 보면 넘어지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하지만 두려워 말자. 우리에게는 부활이 있다. 하나님이 다시 일으켜주신다. 그래서 끝내 새 세상으로 인도하신다. 어두운 시대, 죽음의 세력이 지배하는 세상이지만, 부활 정신으로 담대히 걸어가자. 특히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은총이 충만하기를 간절히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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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http://treasuretroveblog.com/2012/08/20/master-pupil/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