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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관리툴 2013년11월09일 08시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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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날] 정만진의 경주여행 (1) 금척 고분군
죽은 사람도 되살리는 황금자를 찾아라

정만진(소설가) daeguedu@daum.net

[글쓴이 주] 대구 여행이 31편으로 끝났습니다. 오늘부터는 뉴스민 독자 여러분과 함께 경주로 여행을 떠날까 합니다.

경주는 우리나라 역사여행의 ‘金’이다. 1,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는 아득한 세계사 전체에서도 서양의 로마제국과 동양의 신라가 있을 뿐인데, 경주는 그 ‘천년 왕국’ 신라에서 다시 1천년 내내 ‘서울’이었으니, 세상에 다시없는 희귀한 ‘천년 왕도(王都)’라 하겠다.

‘희귀하다’의 준말은 ‘귀하다’이다. 금(金)도 희‘귀’하기 때문에 ‘귀’금(金)속의 상징이 되었다. 진흥왕이 중국에 보낼 국가 문서에 서명하면서 ‘金’진흥이라 쓴 것도 그 때문이다. 진흥왕의 서명은 성씨가 공식적으로 사용된 우리나라의 첫 사례로 확인된다. 진흥왕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金’을 왕족의 성씨로 삼았다.

금이 귀금속의 상징이듯 고분은 경주의 상징이다. 흔히 산에 있기 때문에 산소(山所)라 불리는 우리나라 대부분 무덤들과 경주의 고분은 다르다. 경주의 고분들은 평지에 위풍당당하게 자리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규모들도 동산만큼 커서 국내외에서 찾아온 모든 여행자를 단숨에 사로잡는다.

경주 고분들, “나는 ‘산(山)소’가 아니야”

고분들이 한 곳에, 그것도 평지에 운집해 있는 풍경은 경주 이외의 다른 곳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장관이다. 부여 능산리(陵山里) 백제 고분군이나 경북 고령 주산(主山) 대가야 고분군 등도 있지만, 그곳 무덤들은 지명 그대로 ‘산’에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경주의 고분군들은 온통 평지에 널려 있다. ‘과연 신라다!’하는 찬탄이 아니 나올 수 없다.

서쪽에서 경주로 들어갈 때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유적지는 ‘金’척고분군이다. 이름에 ‘金’까지 들어 있으니 경주 역사여행의 들머리로서 전혀 부족함이 없다. 세계 제일의 패권 국가였던 당나라와의 관계에서 빚어진 역사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금척 고분군! 황금으로 만든 자가 무덤 속에 들어 있는 곳이다. 물론, 무덤 속에 파묻힌 이래 지금까지 그 금자를 본 사람은 없다. 마치 경주를 제대로 본 사람이 거의 없는 것처럼.

금척 고분군으로 가려면 경주IC 아닌 건천IC에서 내려야 한다. 경주IC에서 내리면 무열왕릉, 김유신 묘, 법흥왕릉, 진흥왕릉, 금척 고분군, 단석산 마애불 등을 보기 위해 다시 경주를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오락가락, 우왕좌왕 여정이다. 여행은 길을 따라 순차적으로 다녀야 한다. 탐험은 길을 내는 일이지만, 여행은 이미 난 길을 내가 고이 되밟는 일이다.

건천(乾川)은 ‘마를 乾’과 ‘내 川’이 결합한 지명이다. 건천읍 일대를 흐르는 시내 강바닥이 지질상 너무나 배수가 잘되어 늘 한발이 발생하였기에 그렇게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 고분군은 건천 읍내 유일의 사통오달 사거리에서 경주 방면으로 우회전을 하면 이내 나타난다.

도로는 고분군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뚫려 있다. 도로 좌우로 큰 것 24기, 작은 것 14기, 모두 38기의 고분들이 마을처럼 운집해 있다. 이곳은 대단한 세력가나 소국의 웅거지였던 게 분명하다.

그런데 감히 가운데를 뭉개고 예전에 없던 신작로를 내었다? 물론 왜인들의 짓이다. 왕년의 권력가와 그 후손이 여전히 당당한 세도를 누리고 있거나, 조선이 국가 주권을 지켰다면 지금의 참상은 상상도 하지 못할 풍경이리라. 국토 곳곳에 남아 있는 식민지의 흔적은 오늘도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건천읍 홈페이지의 금척리 ‘지명 유래’를 살펴본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시조 박혁거세왕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금자[金尺]를 주었다. 혁거세왕이 꿈에서 깨어나 보니 손에 그것이 쥐어져 있었다. 이상하게 여겨 꿈에 신인이 가르쳐준 대로 죽은 사람을 금자로 재어보았는데 다시 살아났고, 병든 사람을 재면 병이 나았다. 소중하게 간직하여 나라의 보물로 자자손손 물려오던 중, 당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이 신기한 금자를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왕은 거절하기 위해 38기의 무덤을 만들어 금자를 감추었다. 그 후 이 금척 고분(金尺古墳)의 이름을 따서 마을을 ‘금척’이라 부르게 되었다.

같은 홈페이지의 ‘관광 안내’ 중 ‘금척 고분’ 부분도 살펴본다. <건천읍지>의 내용을 옮겨 실었다는 설명이 붙어 있는 안내문을 맞춤법이 틀린 부분과 오자를 일부 고쳐가며 읽어본다.

금척(金尺)이란 글자 그대로 황금으로 만든 자(尺)라는 뜻이다. 옛날 신라 진평왕이 정사(政事)를 보다가 낮에 깜빡 졸고 있었다. 눈앞에 일곱 무지개가 곱게 나타나더니 금으로 된 황금자 하나를 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왕은 졸음에서 번뜩 깨어났다.

그런데 꿈속에서 신선으로부터 받은 그 황금자가 거짓말처럼 바로 눈앞에 놓여 있었다. 죽은 사람도 재면 다시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소원을 빌면 무엇이든 소원대로 이루어지는 그런 자였다. 나라의 모든 부귀와 영화도 그자를 가진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했다. 그자 덕택인지 신라는 날로 번창해 갔다.

신라는 하늘에서 내린 황금자가 있어서 점점 국력이 부강해진다는 소문이 당나라 황제 귀에 들어갔다. 황제는 이것을 자기 손에 넣고 싶었다. 그래서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황금자를 바치지 아니하면 당장 많은 군사를 일으켜 쳐부수고 말겠다고 협박했다. 진평왕은 머리를 싸매고 자리에 누웠다. 그러다가 계책을 세웠다.

왕은 백성들을 동원하여 여기에 크고 작은 여러 개의 가짜 왕릉 고분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황금자가 묻혀있는 금척이다. 왕은 자신만 알 수 있도록 남몰래 금자를 한 고분 속에 묻었다. 당나라 사신이 와서 내놓으라고 강요했지만 버텼다. 그런데 얼마 후 진평왕이 급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결국, 황금자를 묻은 고분은 진평왕밖에 모르는 영원한 비밀이 되었다.

식민지 시대, 일인들이 황금자를 탐내어 발굴 작업에 착수했다. 그런데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우왕탕탕’ 뇌성 번개가 치더니 비가 쏟아졌다. 하늘이 노한 것이다. 사방에서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들고, 밤낮 1주일간 빗줄기가 끊일 줄 모르게 내리퍼부었다. 곧 일대에는 대홍수(大洪水)가 났다. 일본 발굴단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는 누구도 이 금척 고분에 손을 대지 못했다.

두 인용문에는 약간 다른 내용이 보인다. 금척이 이 세상이 나타난 시점을 한 곳에서는 박혁거세 때라고 말하고, 다른 곳에서는 진평왕 때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금척을 내놓으라는 당나라 황제의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38기의 무덤을 조성했다는 내용은 두 기록이 일치된다.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금척이 묻힌 자리가 매장 당사자인 왕의 사망 이래 아무도 알지 못하는 비밀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도굴범 일제도 그것을 손에 넣지는 못했다. 죽은 사람을 살리고, 가난한 사람을 단숨에 부자로 만들어주는 신이한 금자가 왜적 도굴범의 손에 들어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시간과 장소가 분명하고 증거물이 남아 있는 설화를, 신화(神話)나 민담(民譚)이 아닌, 전설(傳說)이라 한다. 고분들이 남아 있고 황금자를 묻은 왕의 이름이 나오니 금척고분군의 설화는 전설이다. 그렇다면 일제가 도굴을 시도했을 때 갑자기 폭우가 연일 쏟아지고 뜻밖의 대홍수가 범람하였다는 것은 전설인가, 아닌가. 물론 전설이 아니다. 역사적 ‘사실’일 뿐이다. 다만 그 폭우는 ‘우연’이었겠지만.

고분군에 왔으니 능, 원, 총, 묘의 차이를 한번 알아보자. 능(陵)은 묻힌 왕이나 왕후를 알 수 있는 무덤을 말한다. 무열왕릉 등.

원(園)은 왕과 왕비가 아닌 왕족의 무덤을 말한다. 대릉원 등. 총(塚)은 묻힌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지만, 유물이나 벽화가 두드러지게 발견된 무덤을 말한다. 천마총,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측되기도 하는 만주의 장군총 등.

묘(墓)는 보통의 무덤이다. 경주에서 보는 대표적인 묘는 ‘김유신 묘’다. 어지간한 왕릉보다 더 웅장하지만, 왕도 왕족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물론 왕으로 있다가 쫓겨난 연산군, 광해군 등의 무덤도 그냥 묘라 부른다.

그럼 고분(古墳)은? 글자 그대로 옛날[古] 무덤[墳]을 말하지만, 오래되었다고 모두 고분이라 하지는 않는다. 역사적 가치가 있어야 그런 이름을 얻을 수 있다. 금척고분군, 공주 송산리 고분군 등.

아직 금척고분군은 찾는 사람이 별로 없다. 경주시는 이곳 일대를 역사공원으로 정비하고 단장할 계획이다. 고분군 동쪽에 인접한 집들은 철거되었고, 이전 대상에 들어가지 않은 단 두 집만 사람이 살고 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을 살려내고 가난한 이를 부자로 만들어낸다는 금자가 묻혀 있다는 금척고분군은 ‘金’과도 같이 오랜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경주 답사여행의 첫 관문이다. 경주시 건천읍 금척리 192-1번지, 국가 사적(史蹟) 43호.

문화재청의 해설을 보면, 사적은 광역자치단체가 ‘기념물’로 지정한 유적, 제사, 종교, 정치, 국방, 산업, 교통, 토목, 교육, 사회사업, 분묘, 비석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들을 말한다. 기념물은 패총, 고분, 성터, 궁터, 요지(窯址), 유물 포함층 등의 사적지로서 역사상, 학술상 가치가 큰 것이나, 경승지(景勝地)로서 예술상, 관람상 가치가 큰 것, 그리고 동물(서식지, 번식지, 도래지 포함), 식물(자생지 포함), 광물, 동굴 중에서 학술상 가치가 큰 것을 가리킨다.

사시사철 어느 때 방문해도 평지를 가득 메우고 있는 고분들과 고목들, 광활한 풀밭과 갖가지 꽃들, 멀리 배경을 이루고 있는 단석산의 곡선까지, 이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금척고분군의 풍광은 참으로 곱고 아름답다.

물론 금척고분군이 경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분군이라고 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곳에는 경주의 상징인 고분군이 있고, 중국과의 갈등 서린 역사가 있고, 전설이 남아 있다. 게다가 경주로 들어가는 진입로다. 또 머잖아 역사공원으로 꾸며지고 나면 고풍스럽고 자연스러운 지금의 민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될 ‘수몰 예정지’다. 혹시 아는가. 고분군 사이를 거닐다가 혹여 금척이라도 발견하면 진시황의 불로장생 염원을 오늘에야 완성해낸 위대한 인류사의 인물로 역사에 남을 수 있을는지도.

서울에서 경주로 가는 길, 꼭 금척고분군부터 먼저 찾아보자.
 

정만진(소설가) daeguedu@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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