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의 밑바닥을 전전하는 주인공 욱스발은 어느 날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는다. 그에겐 죽음의 그림자가 지독하게 따라붙는다. 영화사에는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이키루>(1952, 구로사와 아키라)의 시청 과장, 와타나베 간지가 있었다. 와타나베는 임종을 앞두고 시민을 위한 공원을 남긴다.
<이키루>가 전후 일본의 잿더미 같은 상황에서 만들어진 영화라면 <비우티풀>은 미국 헤게모니의 끝물,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거친 파도에 실려 우리에게 찾아온 영화다. 욱스발이 처한 곤란은 우리 세대가 마주한 곤란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굳건했던 모든 것들이 썰물처럼 쓸려가는 지금 시대에, 욱스발은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욱스발의 꿈은 거창하지 않다. 두 자식에게 필요한 집세를 마련하기 위해 욱스발은 인력브로커 일을 한다. 그는 미등록이주노동자와 고용주 그리고 경찰을 매개한다. 먹이 사슬의 가장 아래에 구 식민지와 냉전시대의 유령 같은 미등록이주노동자가 있다. 이들의 일상은 추방에의 공포와 꿈같은 희망 사이에서 진동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은 더욱 희미해지지만 공포는 현실이 된다. 스페인 국민이라는 자기동일성 바깥에 서 있는 그들은 두드려 맞고 추방당하거나 죽임 당한다. 강제단속이라는 폭력의 순간을 다른 국민들은 놀라 바라보고만 있다. 보다 욱스발은 이들을 연민하고 있다. 동료들을 구하려다 함께 잡혀 들어간다. 하지만 그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그의 조그만 욕심이 모든 것을 망친다.
욱스발은 끝내 무엇도 남기지 못하는 듯하다. 임종의 순간에 딸 안나에게 남긴 다이아몬드 반지는 진위를 의심받는다. 욱스발이 그 고생을 해가며 벌어둔 돈은 세네갈 이주여성 이게가 훔쳐 도망간다. 그녀가 돌아오는 장면은 애매하게 처리되어 있지만 환상에 가깝다. 열린 결말이라고 양보해본들 본질적으로 이 이야기는 비극이다. 욱스발 자신의 절규대로, 왜 이런 일들이 그에게 일어났나?
욱스발은 세네갈인이나 중국인과 마찬가지로 경계 바깥에 서 있는 사람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욱스발은 그 자신으로 경계인 사람이다. 그는 영매로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서 있다. 국민과 외국인의 경계에 서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타자들 중에 욱스발은 가장 비극적인 인물일 수도 있다. 타자들은 최소한 세네갈인 혹은 중국인, 게이라는 정체성, 경계 바깥에 서있다는 동질성을 갖는다.
하지만 욱스발은 이름을 제외하곤 어떤 정체성도 갖지 못한다. 돌아갈 고향도 없다.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내전의 상처가 환기되며 욱스발 역시 추방과 이주의 역사를 갖고 있다는 것이 뚜렷해질 뿐이다. 신음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욱스발은 자신과 같이 경계에 서 있는 동료 영매를 제외하곤 누구에게도 울음을 터트릴 수 없다. 자신을 피억압자로도 혹은 다른 무엇으로 서사화할 수 없는 곤란.
<비우티풀>은 <박하사탕>처럼 주인공에게 면죄부를 주는 영화가 아니다. <비우티풀>을 두고 중국인이나 세네갈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거짓 휴머니즘이라는 비난은 부당하거나 최소한 적절하지 않다. 마찬가지 이유로 (보편적인 의미에서) 숭고한 아버지상을 그렸다는 평 역시 반쪽짜리다.영화 내내 어둡던 욱스발의 표정이 환해질 때는 큰돈을 챙기게 되는 순간도, 양말에 꿍쳐둔 지폐 더미를 세는 순간도 아니다.
바로 네 가족이 함께 모여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마람브라와 처음 사귀게 된 이야기를 나눌 때다. 코딱지처럼 하찮을지 모르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순간이다. 이 영화는 비극이지만 묵시록은 아니다. 절망스런 상황에 발버둥 치면서 그는 분명 무언가를 남긴다. 세계와 자신 모두 종말로 치닫고 있지만 어쩌면 그는 가장 중요한 것, 바로 이야기=기억을 남긴다.영화의 첫 장면으로의 소급 혹은 마지막 장면으로의 도약. 욱스발과 그의 아버지 마테오는 피레네 산맥에서 만난다. 피레네 산맥은 그들의 가족이 떠나고 싶어 했던 곳이지만 욱스발과 아들 마테오가 결국 가보지 못한 곳이다. 또한 영화에서 욱스발이 안나에게 가르친 비우티풀(biutiful)이란 단어가 형용하는 유일한 대상이다.
돌이켜보건데 욱스발이 남긴 것은 하나 더 있다. 아름답다는 비우티풀biutiful이라는 말이다. 비우티풀은 뷰티풀beautiful이라는 문법 즉 글의 법에서 벗어난 단어다. 비우티풀이란 말이야 말로 영화에서 자기동일성의 폭력에 신음하는 이들에게 건네는 위로가 아닐까? 법이 그들에게 틀렸다고 선고할지라도, 그/녀가 말하는, 그리고 그/녀들의 아름다움이란 본질은 늘 옳다는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