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 때 아이가 처음으로 역사책을 접했다. <역사야, 나오너라 / 이은홍 지음 / 푸른 숲>이란 책은 초등학교 중학년이 읽기 무난한 책으로 만화와 글을 적절한 분량으로 편집해서 ‘역사’를 친근하게 접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책은 선사시대부터 현대사까지 통사로 기술했고, 지은이의 가족사적 체험을 뒤에 덧붙여 개인의 삶과 무관하지 않은 ‘역사’를 보여주었다.
끄트머리에 지은이 부부의 87년 ‘6월 항쟁’ 경험이 사진과 함께 소개되었다. 책을 읽던 아이가 “엄마는 그때 뭐 했어?” 라고 물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엄마도 그때 지은이처럼 거리에 있었지”라고 대답했다.
그때부터였다. 가능하면 급박한 정치적 사안을 다루는 집회는 될 수 있으면 참석하겠다고 다짐했다. 훗날 아이가 기성세대가 되어 “그때 엄마는 뭐 했어?” 라고 묻는다면, 할 말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적어도 책임지는 어른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지난달 시내 동성로 한일극장 앞에서 있었던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 규탄 촛불집회’에 최대한 참석하겠다는 의지로 자원봉사 중인 인권단체 회원들과 함께 참여했다.
목회자 단체, 대학 교수협의회, 여성 단체의 시국선언이 이어졌고 자발적인 시민 자유 발언도 경청했다. 고3 남학생이 연단에 올라와서 우리 사회의 부조리에 관해 조목조목 근거를 나열하면서 자기주장을 표현하는 모습에선 한 편으로 대견했지만, 다른 한 편으론 청소년까지 집회 현장으로 내모는 상황이 몹시 씁쓸했다. 그러다가 최근 집회 현장에서 보기 드문 젊은 대학생 두 명이 미리 준비해 온 선언문을 낭독하는 순서도 있었다. 그들의 주장을 듣는 데 마지막 문장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의 이 주장은 정치적 행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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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7월 13일 대구 동성로 한일극장 앞에서 열린 국정원 대선개입 규탄 시국대회에서 "우리의 이 주장은 정치적 행위가 아니다"라고 발언한 두 대학생 | | |
그들의 행위는 분명 정치적이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정치적 행위가 아니’라고 밝혔을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정치적 행위’에 대한 두려움을 조장하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정치는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국어사전에는 정치(政治)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으로,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한다.> 사전적 의미로 고찰하면 ‘정치’는 이미 ‘정치인’의 행위로 제한된다. 그러나 ‘권력’의 차이가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해를 조정’하고, ‘인간다운 삶의 영위’를 위해 ‘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이라면 ‘정치인’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도 빈번한 행위다.
정치는 인간관계에 만연한 힘의 차이와 권력관계에 대한 인식이 출발이라고 생각한다. 힘의 차이는 정치 사회적 관계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일상에도 존재한다. ‘권력은 도처에 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공부 잘하는) 친구와 (공부 못하는) 친구, 선생님과 제자, 나이와 성별, 지식, 부 등 권력의 차이를 낳는 기준은 무수하다. 그러기에 권력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이해 또한 첨예하다. 그리하여 부모는 아이가 부모의 권력에 복종하기를 바라고, 저항할 때 체벌과 “너, 그러면 용돈 안 준다”고 협박(?)하기도 한다.
이렇게 일상적인 권력관계를 정치라고 한다면, 우리는 왜 정치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까. <국가>란 책에서 고대의 케케묵은 철학자 ‘플라톤’은 각각의 신분이 위치에 맞게 사회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지혜로운 철학자가 다스리는 정치를 이상적이라 주장했다. 그의 이상적 국가는 제자리에서 제 몫의 일만 하는 부품으로 조직된 기계 같다. 그런데 그가 주장하는 ‘철인 정치’는 다르게 보면, 정치는 엘리트의 역할 같다. 그뿐만 아니라 마치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의 면면이 화려한 경력과 학력, 평균적인 국민재산보다 훨씬 많은 재산을 소유하면서 전혀 ‘대표성’을 띄지 못하는 현재의 ‘대의 민주주의’ 체제의 ‘정치인’과 유사하게 느끼는 것은 필자의 지나친 억단일까.
힘없고 시근 없던 아이는 자라면서 당연히 힘도 생기고 어른 세대의 이중성과 세상에 대한 나름의 판단도 키운다. 그러다가 부모의 부당한 요구를 ‘씹거나’ 때로 대거리를 하면서 ‘저항’의 몸짓도 시도한다. 힘의 관계는 고정되지 않고 변한다. 아이 측에선 ‘저항’이 부모 편에선 ‘반항’이다. 그러다 아이는 부모의 말이 잔소리가 되고, 귀와 입을 닫고, 부모는 그런 아이가 답답해서 이런저런 시도를 한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아이가 귀와 입을 닫게 하듯 공중파와 케이블 TV, 신문을 비롯한 언론이 앞장서서 정치에 대한 혐오를 생성한다. 플라톤의 ‘국가’처럼 모든 시민이 각자의 본분에 너무 충실해서 정치에 무관심하면, 누구에게 이득이 될까. 또한, 직분을 다하는 시민에게 ‘정치적 행위’를 삼가라고 부추기고, 우리의 내면을 검열하는 이들은 누구일까? 그 역시 ‘권력’이다. 그로 인한 결과로 이익을 챙기는 권력 말이다.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려고 집회에 참석하지만, 무엇보다 일상의 영역에서 힘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어른이 가장 어른다운 어른 같다. 자신을 중심으로 형성된 관계에서, 혹은 현재 내 위치에서 가장 약한 사람은 누구인가를 고민하고, 혹시 부당하게 힘을 남용하지 않는가를 성찰하는 어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