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산은 남쪽의 비슬산, 북쪽의 팔공산과 더불어 시민들이 즐겨 찾는 대구의 3대 등산지이다. 그 외 시민들이 많이 오르는 곳은 수성구 지산동의 용지봉, 달서구 용산동의 와룡산, 북구 칠곡의 함지산 등이다. 그러나 그 세 곳은 ‘구민의 산’ 수준이지 ‘시민의 산’이라고 격상하여 말할 정도는 아니다.
물론 앞산은 비슬산이나 팔공산에 견주면 낮은 산이다. 그러나 시민들의 선호도와 찾는 빈도수로 치면 결코 비슬산과 팔공산에 뒤지지 않는다. 이는 북한산이 설악산이나 지리산보다도 더 많은 시민을 유치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거리가 가깝기도 하지만,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이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한 것이다. 앞산은 말 그대로 남녀노소 누구나 오를 수 있으니 그만하면 ‘시민의 산’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절 입구 일주문 등에는 ‘팔공산 동화사’ 식의 현판이 걸린다. 사찰 이름보다 절이 있는 산 이름을 앞에 표시한다. 그런데 앞산의 안일사 현판에는 ‘앞산 안일사’가 아니라 ‘비슬산 안일사’가 적혀 있다. 앞산을 비슬산의 한 줄기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옛날에는 이 앞산도 대구에서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 꽤 ‘높은’ 산이었다. 그것을 증명해주는 자료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남산, 또 다른 하나는 ‘왕건’이다. (동수대전에서 견훤에 대패한 후 불로동, 시량리, 반야월을 거쳐 앞산으로 도망친 왕건은 은적사 , 안일암, 그리고 왕굴에 숨어 지내다가 임휴사를 거쳐 성주 쪽으로 물러난다.)
서울에 남산이 있고 경주에도 남산이 있듯이, 대구에도 남산이 있다. 그런데 서울과 경주의 남산은 거주지와 붙어 있는 앞산 그 자체이지만, 대구는 남산과 앞산이 서로 거리를 둔 채 별도로 존재한다. 남향집을 짓고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남(南)산은 곧 앞[前]산의 한자식 이름인데, 대구에는 서울이나 경주와 달리 앞산과 남산이 따로 있는 것이다.
동성로, 서문시장, 남문시장, 북성로 같은 지명을 보면 대구의 성내는 그리 크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 대구 ‘읍’내 사람들은 읍성의 남쪽에 있는 산, 즉 최제우가 처형당한 아미산부터 계명대 대명동 캠퍼스까지 이어지는 구릉을 곧장 (서울과 경주의 그것과 같은) 남산이라고 여겼다.
앞산이 지금은 도시가 커지는 바람에 주택가와 붙어 있지만, 당시에는 남산 넘어 멀리 있는 높은 산이었다. 그래서 왕건이 거기에 숨어 지냈다. 읍내와 지근거리에 있는 얕은 산이라면 어찌 왕건이 거기로 숨을 것인가.
앞산에 왕건 유적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왕건이 안(安)전하고 편하게[逸] 지냈던 암자가 안일(安逸庵)이고, 숨어 있었던 동굴(窟)이 왕굴(王窟)이다. 그렇게 왕건이 숨어서 지냈던 외딴곳 안일암에서 뒷날 대구의 청년들이 독립운동을 처음으로 모의하게 되는 것도, 지리적으로 볼 때는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앞산에 왕건이 숨었던[隱] 흔적(跡)은 또 있다. 은적사(隱跡寺)와 왕굴이다. 그러나 은적사 왕굴은 대웅전에 붙어 있어 숨어지낼 만한 곳이 못 된다. 안일암 뒤 왕굴은 절보다 500m 더 높은 곳에 있는데다 저 아래를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지점에 있어 은신처로 제격이지만, 은적사의 것은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는 지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건은 이곳에서 사흘 동안만 머문 뒤 다시 안일암과 왕굴로 옮겨갔을 것이다. (은적사 안내판에는 ‘왕건이 은적사 굴속에 머물자 갑자기 짙은 안개가 몰려오고 거미들이 굴 입구에 엄청난 줄을 쳐서 그를 사흘간 보호했다’고 적혀 있다.)
왕건은 안일암 왕굴에 머물다가 앞산을 넘어 자신을 지지하는 성주 쪽으로 피신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는 화원 사문진교 일대의 낙동강을 건너 성주로 떠나가는 길에 안일암 왕굴 너머 임휴사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래서 절 이름이 왕건이 머물며[臨] 쉰[休] 절[寺], 즉 임휴사(臨休寺)가 되었다.
앞산에서 놓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답사지는 고산골의 공룡 발자국이다. 1905년까지만 해도 달성공원 안, 그리고 1920년대까지만 해도 서문 시장 일대마저 커다란 늪지대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겠지만, 본래 대구는 아득한 옛날 거대한 호수 지대였다. 그것도 공룡들이 우글거리며 돌아다니는 그런 곳이었다. 그 흔적이 지금 고산골에 있다. 그러므로 고산골은 더욱 자녀와 함께 꼭 가보아야 할 필수 답사지다. ✺
* 더 알아보기 / 앞산에서 더 둘러볼 곳들
독립운동가 이시영 선생 순국기념탑 : 앞산공원 낙동강승전기념관 바로 뒤에 있다. 거부(큰巨부자富)를 협박하여 독립군 군자금을 마련하려다가 2년간 옥살이를 한 이시영은 22세인 1914년 중국 북경으로 옮겨 김좌진, 김동삼 등과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는 만주 삼원포(三源浦)에 한인무관학교(韓人武官學校)를 세웠다. 그러나 그해 7월 9일 병으로 불과 37세의 젊은 삶을 마쳤다. 아래의 시는 그가 북경에 머물고 있을 때인 35세에 쓴 것이다.
버들잎 푸르러 작은 길을 덮는데 홀로 잔을 기울이니 감회가 깊구나. 몇몇 곳을 떠다니며 마음 붙일 곳을 찾았던가. 어디서 들려오는 젊은이의 노래소리. 큰일에 몸 바쳐 천지를 떠도니 마음에는 거리낌이 없다.
고개 돌려 고국길 보니 더욱 아득만 하고, 종일 돌아가자 애쓰나 이룰 길 없구나. 망연히 물러서 숲속에 핀 꽃을 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