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이 있습니다.
몇 주 전에 자원봉사하는 인권단체의 회원들과 법정 체험을 했다. 주로 TV 드라마에서 보았던 법정은 조명이 어둡고 바퀴벌레 한 마리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조용하고 엄중했다. 처음 경험한 법정은 드라마 속과 달리 환했다. 게다가 정면 상단에 앉은 판사분이 굉장히 젊어서 놀랬다. 방청 사례는 명예훼손 재판이었는데, 전후 사정이 조금 복잡했다.
발단은 회사 상사에 의한 성추행 사건이었지만,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가 자신의 기억을 확신해서 가해자가 빠져나갈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어느 사건이든 그렇겠지만,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 시점에 대한 검증은 중요하다. 기억이란 사람에 따라 재구성되는 과정이 다르므로 되도록 사건을 진술할 때 신중해야 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이번 사례처럼 무고죄로 고소당하는 경우가 생기면, 원인이 된 성폭력 사건은 묻혀버린다. 방청석에 앉아서 검사의 사실 심문과 변호사의 반대 심문, 검사 측 증인들의 증언을 듣는데, 며칠 전 관람했던 영화 <버니, Bernie>의 법정 장면이 떠올랐다.
영화 <버니>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고, 노인이 대부분인 마을 주민은 범인으로 지목된 장의사 버니를 절대 신뢰했다. 그는 결코 살인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는 살인 사건을 기점으로 앞부분은 코믹 영화, 뒷부분은 법정 영화 같았다. 버니 역의 ‘잭 블랙’은 코미디 영화에 단골로 출연했고, 뚱뚱한 몸집은 전형적인 코미디 스타일이었다. 중간마다 삽입된 실제 마을 주민의 인터뷰는 드라마와 다큐멘터리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어서 ‘버니’란 인물에 대한 사실성과 신뢰성을 더해 주었다. ‘그는 착하고 인기 있고 친절하며 성격이 좋은’사람이었다. 배가 불뚝 튀어나온 몸집에 팔자 모양 콧수염을 기르고, 항상 단정한 양복 차림의 버니가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모습은 사뭇 진지했는데,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관객은 자신도 모르게 키득키득 웃는다. 버니의 외모는 어쩐지 그의 선(善)한 행동을 미심쩍은 눈으로 보게 했다. 고객에 대한 살뜰한 버니의 보살핌은 마을의 괴팍하고 돈 많은 할머니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할머니의 사랑은 집요한 구속으로 발전했고, 버니는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정치적 야심을 품고 있던 마을의 젊은 검사는 재판 과정에서 버니를 할머니의 재산에 눈먼 탐욕스런 인간으로 묘사했다. 보통 사건이 발생한 지역의 주민을 배심원으로 두는데 버니는 주민의 절대적 신뢰를 받고 있는 까닭으로 배심원을 다른 지역에서 뽑아야 했다. 배심원은 주로 검사 측에서 추천했다.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로 검사는 버니가 (배심원 여러분처럼) 빈곤한 계층이 꿈꿀 수 없는 호사스런 생활에 젖으면서 할머니의 재산에 눈독을 들여 살인을 저질렀고, 살인 후에도 호화롭고 안락한 생활을 누렸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의 도덕성과 배심원의 부유층에 대한 무의식적 증오를 부추겼다. 검사는 자신이 만든 각본에 ‘버니’란 인물의 성격을 창조했다. 그것에 맞게 증인을 세웠고, 증언 중에서 각본에 필요한 부분을 집중하여 심문했다. 그러니 관객은 코믹하지만 착한 버니와 검사에 의해 묘사된 나쁜 버니 사이에서 ‘버니란 인물의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를 질문하게 된다.
버니는 결국 유죄 평결을 받고 무기징역수로 살아간다. 마을 주민은 재판 결과와 무관하게 그의 무죄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살인 후 9개월 만에 발각되어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버니는 소리 내어 울었다. 그러나 그의 눈물은 악어의 눈물 같았다. 영화는 살인자 ‘버니’란 실존 인물에 관한 판단을 유보하고 끝난다. 배심원 제도를 골자로 한 미국 사법 제도에 대한 문제의식을 노출하면서 법이 과연 한 사람의 됨됨이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했다.
그날 법정에서 피고인으로 앉았던 성추행 사건의 피해자 역시 고소인 측에 의해 행실이 부도덕한 여자로 그려지고 있었다. 고소인의 배우자, 친구, 부하 직원이 증인으로 출두했다.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은 힘의 차이가 엄연한 권력관계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 증언은 위증 가능성이 높았고, 일방적으로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언술했다. 더구나 ‘말’이 가지는 모호함은 판결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법은 표면적으로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그것을 믿는 사람은 없다. 오죽하면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란 말이 나왔을까. 법의 의도는 그렇지 않겠지만, 현실에서 작동하는 법은 가진 자와 권력의 이익을 대변하는 제도란 뜻이다. 더구나 법의 언어는 보통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용어다. 그것은 ‘특별한’ 사람의 ‘특별한’ 해석을 요구한다.
말로 기록된 법은 가시적인 폭력과 달리 우리의 무의식에 ‘감시자’로서 기능한다. 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불법) 시위와 집회를 엄격히 처벌한다는 법 집행자의 단언은 의사 표현의 자유가 정당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의 입을 머뭇거리게 한다. 또, 범법자로 낙인찍히면 사회로부터 추방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떤 철학자는 우리가 ‘아버지의 이름’을 수용하는 과정이 ‘사회화’라고 했다. 아버지의 이름은 다름 아닌 가부장제도이며, 아버지의 이름은 곧 법률이다. 그렇다면 법전의 말은 ‘아버지의 말’일 것이다. 게다가 말은 의미에 닿기 전에 미끄러지는 특징이 있다. 아버지의 언어로 진행되는 성폭력 관련 재판이 과연 피해자 여성의 억울함을 제대로 해명할 수 있을까. 피고인은 한 증인의 어처구니없는 증언에 감정이 북받쳐서 울면서 호소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판사에 의해 제지당했다. 그녀를 보면서 아버지의 이름 앞에서 막힘없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말, 여성의 언어가 절실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