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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관리툴 2013년03월29일 23시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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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날] 정만진의 대구여행(18) 독립운동
‘빼앗긴 들’에 ‘새 대구’를!

정만진(소설가) daeguedu@daum.net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 방방곡곡까지 번진 구한말의 대표적 항일운동이다. 그러나 망국 직전이었으므로 황제와 중앙정부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은 국채보상운동을 하는 백성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임금이 담배를 끊은 것이 도움 전부였다. 결국, 일제의 교묘한 탄압에 시달린 끝에 국채보상운동은 와해되고 만다.

▲앞산 안일암

하지만 그 뒤에도 대구에서 일제에 저항하는 움직임은 끝없이 이어진다. 1915년 1월 15일 서상일, 윤상태, 이시영 등 13명이 앞산 안일암에 모여 국권 회복에 목숨을 바칠 것을 서약하면서 조직한 ‘조선 국권(國權) 회복단’이 그 첫걸음이다. 조선국권회복단은 경남 창원 진동주재소를 습격하기도 하고, 상해임시정부의 군자금 조달에 앞장서는 등 활발하게 움직이다가 1919년 6월 일제에 발각돼 해산된다.

1919년의 3·1운동, 대구라고 예외일 리가 없다. 대구의 3·1운동은 3월 8일 서문시장에서 시작된다. 그날은 평양, 강경(논산)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시장으로 꼽히는 서문시장 장날이었다. 계성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큰장’ 장날 시장 복판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계성학교가 서문시장과 아주 가까이 있었으므로 선언문 등 만세운동 준비물을 들키지 않고 운반하는 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계성학교 본관
▲제일교회

계성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대구 3·1운동에 앞장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계성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은 학교 지하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학교 등사기를 남성정교회(현 제일교회) 김태련 조사의 집으로 가져가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다. 당시 대구의 3·1운동과 관련하여 투옥된 사람이 76명이었는데, 그 중 44명이 계성학교의 전․현직교사(8명)이거나 재학생(36명/당시 전교생 46명)이었다.

서문시장의 만세운동에는 신명여학교 학생들도 동참하였다. 대구고보(현 경북고) 학생들도 계성학교 측의 연락을 받고 이상화의 집에서 백기만, 허범, 신현욱 등이 모여 거사 계획을 세웠고, 당일 서문시장으로 달려가 동참했다. 만세 군중은 동산병원 옆 선교사 거주지 일대의, 뒷날 ‘3·1운동로’라는 이름이 붙는 골목길을 걸어 지금의 대구백화점까지 갔다. 그러나 기관총을 발사하는 일제의 무력 앞에서 더는 전진할 수 없었다.

이틀 뒤인 10일, 아직 체포되지 않은 계성학교 교감 김영서와 학생들, 대구고보 학생들이 남문외시장(지금의 염매-남문시장)에서 3·1운동을 재현했다. 이날 대구 3·1운동에서 중요 역할을 했던 남성정교회 김태련 장로의 아들 용해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 후 3월 30일에도 남문외시장에서는 동화사 소속인 지방학림(地方學林)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대구의 항일운동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한 분이 동암(東庵) 서상일 선생이다. 1887년에 태어나 1962년에 타계한 서상일은 보성 전문 졸업 후 1909년 안희제, 김동삼 등과 무장 항일 투쟁 단체인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일제가 소위 ‘문화정치’를 내세우자 고향으로 돌아와 동지들을 규합하여 대구구락부를 만든다. 그리고 1922년 민족의식의 구심점을 구축하고 청년교육을 위해 ‘아침[朝] 햇빛[陽]이 가장 먼저 비치는 곳’이라는 뜻의 조양(朝陽)회관을 달성공원 앞에 지었다. 이때 공사비를 거의 혼자 부담했다. (광복회관’이라 부르기도 하는 조양회관 건물 앞에 서상일 선생 동상이 세워져 있다. 조양회관은 1982년에 지금의 망우당공원 안으로 옮겨진다.)

▲망우공원 조양회관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퇴학당한 이육사도 (당시 21세) 북경으로 가기 전 조양회관에서 활동했다(‘탄신 100주년 기념 이육사 시집’ <광야에서 부르리라>/손병희 엮음, 이육사문학관 펴냄). 그처럼 애국애족 청년들의 집합장소였던 조양회관은 일제 강점기 내내 감시와 탄압을 받았는데, 1945년 8월 15일 일본천황의 항복방송을 듣고 제일 먼저 거리로 뛰어나와 만세를 외친 이들도 바로 이곳에 모여 있던 청년들이었다.

대구의 항일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을 하나 꼽으라면 대구사범학교 항일학생의거를 꼽을 수 있다.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1928년에 105명이나 일제 경찰에 잡혀 구속 또는 불구속 송치된 것만으로도 그 규모가 충분히 짐작된다.

하지만 대구사범학교 교사들은 좌절하지 않고 1930년 ‘연구회’를 결성하여 학생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다가 다시 37명이 구속된다. 대구사범 교사와 학생들의 항일은 면면히 이어져 941년에는 전국 각지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가르치던 국민학생까지 합쳐 300여 명이나 검거되기도 한다.

잊혀가는 독립운동가들

대구 출생 항일운동가 중에서 가장 널리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아마도 민족시인 이상화일 것이다. 이는 물론 그 자신이 치열하게 독립운동에 온몸을 던진 결과이지만, 특히 격정의 절창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남긴 덕분이기도 하다.

1901년 4월 5일부터 1943년 4월 25일까지 이 세상 사람이었던 상화가 마지막으로 거주했던 ‘상화 고택’은 약전골목의 끝 지점에, 형인 이상정 장군 고택과 국채보상운동의 주역 서상돈 선생 고택에 인접하여 남아 있다. 달성공원에 있는 ‘상화시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시비(詩碑)로 이름이 드높다. 그의 묘소는 대구시 달서구 대곡동 산 9번지에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무대는 수성구 두산동과 상동 일대, 즉 수성못 아래의 너른 벌판(속칭 ‘들안길’)으로 알려져 있다. 허허벌판이었던 이곳을 배회하며 시인은 망국의 울분을 목청껏 토로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들판에 가보면 민족 자주의 흔적은 자취도 찾을 길 없고, 식당과 술집의 불빛과 취객의 호기만이 허공을 찌르고 있다. ‘빼앗긴 들’에 서면 “이상화는 교과서에서 배웠으니 이름이나마 알겠지만, 이상정, 이윤재, 이시영, 서상일, 백기만 등 항일투사들의 노고는 누가 기릴 것인가!” 하는 탄식이 저절로 일어난다.

사정이 그러한대, 과연 상화 묘소의 위치를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대구가 낳은 독립운동가 이시영을 기리는 기념탑도 앞산 큰골 초입에 있지만 찾는 이 드물고, 조선어학회 사건 때 옥사한 한글학자 이윤재의 무덤도 달성군 다사면 금호강변 산비탈에 버려진 듯 초췌하게 누워 있다. ‘대구 시민의 노래’ 가사를 짓고 <상화와 고월>을 저술하여 이상화와 이장희를 한국문학사에 남긴 백기만 등 숱한 독립운동가의 고명한 존함들도 모두 잊힌 지 오래다.

대구는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로서 민족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또 이상정 이상화 형제, 이시영, 이윤재, 서상일, 백기만 등등 뜨거운 불덩이와도 같은 독립투사들을 낳음으로써 다른 어느 지역에 비해도 부끄럽지 않은 이름을 얻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항일지사를 기리는 시민운동을 힘차게 펼쳐 대구를 정의가 펄펄 살아 숨 쉬는 지역사회로 재탄생시켜야 마땅하다. ‘빼앗긴 들’을 되찾았으니 이제는 그 초록빛 들판에 곡식을 심고 나무를 심자!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이상화, 이상정 묘소

정만진(소설가) daeguedu@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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