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새해 인사를 빙자한 안부전화를 주고받는 것이 사람들에게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 버렸습니다. 간밤에 편안했느냐는 인사의 나눔이 지인에 대한 고마움보다는 가슴시림으로 들리는 것은 우리가 지켜내지 못한 노동자들의 죽음 앞에 어쩌면 우리들 하나하나가 상주이고, 살인자고, 파괴자이기 때문입니다
10년 전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김주익 열사 추도사와 며칠 전 최강서 열사의 추도사를 담은 동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가며 심장에 삼키어 봅니다. 그녀의 주름과 흰머리는 점점 늘어 가지만, 그네들의 죽음의 이유와 차가운 겨울바람은 그녀의 말처럼 바뀌지 않고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 살아남은 자들에게 눈물과 또 다른 싸움의 또 하나의 이유로 남아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걷잡을 수 없는 자본의 성장과 폭력의 일반화 그리고 우리의 피와 눈물을 먹고 한뼘 한뼘 자라고 있습니다. 그/녀들 눈물을 숙주 삼는 누군가의 곳간에는 그 노동의 신성한 땀방울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습니다. 비정규직의 눈물위에 여성의 눈물을 쌓고, 청년의 한숨위에 이주 노동자와 장애인, 도시 빈민들의 목숨을 곱하여 만화 드래곤볼에 나오는 괴물 마인부우처럼 그렇게 더욱 흉폭하고 무섭게 커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제 더는 우리가 죽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많은 노동자의 죽음에도 저렇게 단단한 그들은 죽음을 지켜보며, 말년병장이 하루를 지워가듯 귀찮은 것 하나를 지워가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 우리의 눈물과 죽음을 보며, 더욱더 무서운 싸움의 방법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사회적 타살을 생활고에 의한 자살로 교묘히 포장하고, 죽음으로도 다 토해내지 못한 민중의 요구와 삶의 이야기들은 가지지 못한 자의 옹알이로, 자신들의 이야기는 산업역군의 영웅 신화로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살아남은 것이 부끄러운 나는 하루에 세 끼를 챙기고, 술을 줄이고, 억지로라도 많이 웃습니다. 그들의 죽음에 부끄럽게 하늘을 대하지만, 이제는 아무도 하늘 아래에 억울하게 고개 숙이지 않게 지인들과 안부의 전화를 나누고, 그렇게 하루를 보냅니다
살아간다는 것이 견뎌내는 것의 동의어일지라도,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뻥 뚫려버린 사랑하는 이들의 가슴에 바람구멍 하나를 메우는 것, 얼굴도 이름도 모르더라도 서로 격려하고 먼저 손 내밀고 하루하루를 빚어내는 것. 그래서 언젠가는 슬픔이 아닌 기쁨의 눈물을 안주 삼아 소주 한잔을 건넬 수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이렇게 살아남은 자의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한 분도 돌아가시질 말기를. 그리고 힘들고 먼 길 걸어온 것처럼 알 수 없는 그 길이라도 함께할 수 있기를 바라는 기도를 삭풍에 날려보냅니다. 이 기도가 방방곡곡에 그렇게 닿아 그/녀들의 마음에 혼자라는 느낌을 지울 수 있기를 기도를 보낸 자리에 채워 다시 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