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19막은 박근혜가 장식했다. 그리고 작가 공지영은 유신 퍼스트레이디의 당선을 “나치 치하”로 표현했다.
대선을 불과 한두 달 남겨두고 80년대를 소재로 삼은 영화 3편이 개봉했다. 어떤 영화는 정치인들이 단체관람했다. 시민단체도 단체관람에 동참했다. 대중문화의 꽃으로 여겨지는 영화가 독재정권의 잔재를 향해 정조준하자 ‘민주화 세력’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역사를 쉽게 숙지하는 데 더할 것 없이 좋은 방법임은 틀림없다.
그런데 이 영화가 재미없다면 어쩔 것인가? 재미가 없어도 ‘봐 줘야 하는 영화’기 때문에 꾸역꾸역 봐야 할까. 영화가 던지는 정치적 메시지를 받지 못한 자신을 자책해야 하나.
영화 <남영동1985>는 故 김근태가 빨갱이로 내몰려 대공분실에서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고초를 겪는 내용이다. 영화에는 김근태의 가운데 글자만 바뀐 김종태가 등장한다.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님에도 빨갱이로 내몰린다. 물고문과 전기고문으로 김종태는 민주화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의심하는 상황에 빠지기도 한다. 동료를 향해 분노를 내 뿜기도 하면서. 하지만 그는 그 신념을 버리지 않는다. 이후 장관이 되어 이근안을 만난다.
영화는 말 그대로 재미가 없다. 이 영화를 세 번이나 봤다. 감동의 눈물을 흘린 것도 아니었고, 영화적 가치를 높이 평가해서도 아니었다. 첫 번째 두 번째 볼 때 이내 잠이 들어 버리고 말았다. 이런 영화를 재미로만 보느냐고 질타할 이들도 있을 터이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평가가 박하다고 해서 김근태의 민주화 운동을 부정할 이유는 없다.
고문 속에서도 ‘정치권이 아닌 재야에서 민주화 운동이 자신의 역할’이라던 김종태는 87년 이후 정치인이 된다. 기존 정치세력을 바꿔보겠다는 의지로. 김근태에 대한 존경과 애도, 그리고 이근안과 군부정권에 대한 분노는 이내 대통령 당선인이 된 박근혜로 향한다. <남영동1985>는 그 시대를 보낸 486지식인들의 회상과 추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정리해고법, 비정규직법을 통과시킨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의 ‘김근태’는 없다. 오직, 민주주의의 투사 김근태만 놓여 있다.
박근혜의 당선을 두고 지식인들은 “해외로 이민 가야겠다”, “절망스럽다”, “국민의 역사인식 부족”을 운운하거나 ‘투표 안 한 젊은 것’을 가리키며 “등록금 비싸도, 비정규직 돼도 욕할 자격 없다”고 몰아부친다. 단골손님인 새누리당 몰표의 원흉 TK에 대한 비난도 이어진다.
<남영동1985>에 투표하지 않는 20대, TK시민들은 끼어들 자리가 없다. 박근혜가 대구를 방문하면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에 혀를 차지만, 이들의 삶에 끼어들 방도를 내놓지 못한다. 이들은 김근태의 삶에도 끼어들지 못한다.
<남영동1985> 개봉 후 딱 일주일 만에 강풀의 만화를 영화로 만든 <26년>이 개봉했다. 다행히도 재미로 봐도 일주일만큼 낫고, 영화에 끼어들 여지도 일주일만큼 더 있다. 518민중항쟁 희생자 2세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이들이 모여 29만원이 전 재산이라는 ‘그분’ 암살 계획을 세운다. 그들을 불러 모은 건 대기업회장이 된 계엄군 병사였다.
이근안에 대한 분노는 그 분에 대한 분노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분을 암살하는 것은 단지 살인마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을 넘어선 역사의 준엄한 심판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영화적 재미 가운데 80년 광주를 다시금 잊지 않게 해준 점 높이 살만하다. 문제는 여전히 80년 광주를 사는 오늘이 부실하다는 점이다. 2006년은 참여정부 시기다. 그분에 대한 분노는 경찰을 비롯한 국가권력의 폭력을 그대로 보여주면서도 딱 그분에게서 머무른다.
흥행성적은 앞선 두 영화에 미치지 못했지만 10월 개봉한 <강철대오:구국의 철가방>은 나은 편이다. 앞선 영화들이 민주 대 반민주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강철대오:구국의 철가방>은 코믹영화를 표방했음에도 좀 더 폭넓은 80년대를 그리고 있다.
1985년 미문화원 점거 사건을 다루지만 ‘대학생’이 아닌 중국집 배달부 강대오가 주인공이다. 짜장면을 배달하며 첫눈에 반한 여대생 예린을 짝사랑 하지만 그녀의 넘사벽 스펙에 가로막혀 고백 한 번 못하고 속을 태우던 대오는 얼떨결에 미문화원 점거에 동참한다.
대오가 미문화원 점거 주동자로 지목돼 TV에 나오자 중국집 배달부 동료는 이에 합세한다. 영화는 이들의 노동을 엿보기도 하고, 1년째 수배를 피하고 있는 전설적인 전학련 의장 황영민의 정치권 진입을 다루기도 한다. 마치 전대협 의장 출신으로 정치판에 뛰어든 이인영, 임종석을 연상케 한다.(전대협의 기치가 '구국의 강철대오'다. 영화 제목은 이 점을 철저히 활용하고 있다) 또, 당시 학생운동의 지적 허영을 꼬집기도 한다.
황영민을 비롯한 학생운동권은 중국집 배달부들의 희생으로 경찰에 검거되지 않고 탈출한다. 이들 민주화 투사의 밑바탕에 깔린 이름 없는 노동자의 삶처럼.
대선은 끝이 났고, 영화도 끝났다. 현실은 52%의 시민이 유신공주에게 지지를 보냈다. 이들을 지지한 계층이 무엇이고 왜 지지할 수밖에 없었는지 면밀하게 살피지 않고 비난만 보낸다면 더는 답이 없다. 지식인의 판타지에 갇혀 살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