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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관리툴 2012년10월27일 05시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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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날] 김성범의 동양철학 다시보기 (7)
죽은 사람 장사지내는 데 원통함이 없어야 한다.

김성범(농부) pfkimsb@hanmail.net

제목이 좀 자극적인가요? 병든 부모가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도시 변두리 골방이나 궁벽한 시골 외진 오두막에서는 힘없고 병든 늙은이들이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일자리를 찾지 못한 젊은이들은 가슴에 한을 품고 이승을 등집니다. 학생들까지도 자신의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생을 꽃다운 생을 버리기도 합니다.

오직 휴머니즘 하나로 무장한 아나키스트 피터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 1842~1912)이 1892년에 저술한 <빵의 정복>(The Conquest of Bread)이 출판된지도 100여 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이 책이 집필될 당시는 아직도 산업화가 완성 단계에 이르지 못했고, 세계의 총생산은 현재와 비교했을 때 아주 보잘것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당시 크로포트킨이 보았을 때 세계는 물질적 풍요가 넘쳐흐르는 세상이었습니다. 그것은 크로포트킨의 눈에만 그렇게 비친 것이 아니지요. 사실 세계는 그 이전부터 이미 모든 인류가 풍족하게 누릴 수 있는 재화를 충분히 생산해 내고 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필요 이상의 재화를 생산함으로써 자연에까지 심각한 타격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백 년도 넘게 지난 지금, 그 간의 눈부신(?) 과학 기술의 발달과 이로 말미암은 산업의 발달은 인류는 역사상 어느 시기에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넘치는 물질적 풍요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굶주림은 여전히 인류가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정의로운 사회는 권력과 부가 공정하게 분배되는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정치는 이러한 사회를 구현해 내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만약 정치가 사회적 정의를 도외시해 버린다면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죽이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맹자는 정치를 잘못해서 사람이 죽어나가게 하는 것은 몽둥이로 때려서 죽이는 거나 칼로 찔러서 죽이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자살, 폭력, 묻지마 범죄가 난무하는 사회

2012년 9월 13일 통계청은 지난해 자살 사망자 수는 2010년에 비해 340명(2.2%) 늘어난 1만5906명, 인구 10만명당 자살자 수를 나타내는 자살 사망률은 1.7% 증가한 31.7명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국격, 이른바 국가의 품격을 강조하는 현 정부의 자랑스러운 통계 가운데 하나입니다.

경찰청의 ‘2011 범죄통계’에 따르면, 강간·강제추행 등 성폭력 범죄는 1만9489건으로 2010년보다 1233건이나 늘었다고 하는군요. 폭력범죄도 31만1944건으로 1만9456건 증가했다고 합니다. 범행 동기를 보면 살인과 성폭력은 ‘우발적’인 사례가 46.1%, 43.1%에 달했다네요.

율곡 이이는 <만언봉사>에서 황건이나 적미와 같은 도적들이 본성이 흉포해서 도적질을 일삼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방의 땅이 고관대작들에 의해 점유되어 백성들은 바늘 꽂을 땅조차 없는 상황에서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이라고 했지요. 당장 굶어 죽어가는 상황에서 예의니 염치 따위를 따지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그러기에 공자도 우선은 배불리 먹이고 난 다음에 가르치라고 했던 겁니다.

지배 계급은 놀고먹는 ‘큰쥐’

▲과서도

<시경, 위풍>에는 ‘석서’(碩鼠)라는 시가 있습니다. 클 석에 쥐 서이니 큰 쥐라는 뜻이지요. 내용상으로는 ‘큰 도둑’이라는 뜻이 될 겁니다. 그 큰 도독은 당연히 자신은 손끝 하나 까딱 않으면서 일반 백성의 노동의 대가를 착취해 호의호식하는 지배계급을 가리킵니다.  

큰 쥐야 큰 쥐야
내 보리 먹지 마라.
삼 년이나 너를 섬겼지만
내 덕을 몰라주네.
내 장차 너를 떠나
저 낙국(樂國)으로 가리라.
낙국이여 낙국이여
그 곳에서 평온 얻으리.

시경 같은 편 ‘단목’이라는 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것을 착취하는 너희들은)
심지도 가꾸지도 않고
넌 어찌 삼백 집가질 곡식을 가졌느냐.
사냥도 안 하는데
네 뜰엔 오소리가 가득 걸렸구나.
군자라는 것들아
놀고먹지 말아라.

‘석서’나 ‘단목’이 지어진 시대는 농업 중심의 노예제 사회였습니다. 그리고 수렵 또한 중요한 생계수단이었던 것 같습니다. 생산 수단이나 생산량 모두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었던 때이지요. 사회 제도나 의식 수준도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체제와는 매우 달랐습니다. 그럼에도 그때나 지금이나 일반 백성의 삶은 본질에서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이는 죽도록 일만 하고, 어떤 이는 그 노동의 대가를 빼앗아 잘 먹고 잘 산다는 측면에서는 말입니다.

사회의 부는 커져도 백성은 주린다

올해 우리나라 명목기준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2만3천159달러 내외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2015년이 되면 국민소득이 3만불 시대가 될 거라고 하네요. 가구당 평균소득이 7200만원이 된다는 말이지요. 그럼에도 생계조차 이어가기 어려운 소외계층은 늘어만 갑니다.

며칠 전 생활고에 여관을 떠돌며 암 투병하던 30대 가장이 열세 살 어린 아들만 남겨두고 숨진 채 발견돼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죽은 이는 갑상샘암을 앓고 있었지만, 직업이 없어 제때 치료도 받지 못하고 일대 여관을 전전하다가 사망에 이르렀다는 겁니다.

이런 말을 흔히 듣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부자가 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따라서 가난은 게으른 개인의 책임이다.”

아직도 분배보다 성장이 중요하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업이 잘돼야 고용이 늘어나고, 고용이 늘어나야 소비가 늘어나고, 소비가 늘어나면 다시 생산을 자극하고, 생산이 늘어나면 다시 고용이 증대되어 모든 사람이 더욱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거지요.

자본의 속성은 오직 최대의 이윤추구입니다. 생산이 늘어나도 고용이 늘어난다는 보장이 없지요. 가능한 고용을 억제하고 생산을 증대시킴으로써 이윤의 극대화를 꾀합니다. 더욱이 기술의 발전은 노동현장에서 인간 노동력을 자꾸만 배제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자본과 권력은 한통속이 되어 노동자의 권리를 철저하게 파괴합니다. 노조는 기업의 활동을 위축시킴으로써 사회적 발전을 저해한다는 이유를 들면서 말입니다. 고용도 정규직은 줄이고 그 자리를 비정규직으로 채웁니다. 이들에게 노동자는 자본의 이윤을 증대시키는 수단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게지요. 이들은 언제든지 해고될 수 있고, 사실이 그러합니다. 우리 사회에 자영업자의 비율이 늘어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자영업자라 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국내 자영업자 중 작년에 폐업한 사람이 83만 명에 이른다고 하지요. 망하기 위해서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망한 83만 명이 모두 게을러서 그런 것도 아닐 겁니다. 살기 위해서 나름대로 최대한 노력을 했지만 실패한 겁니다.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거대 자본은 이른바 돈 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동네 구멍가게는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빵집도 사라지고 피자 가게도 사라지고 다방도 사라졌습니다. 그 업종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그나마 거대 자본이 아직 마각을 뻗치지 않은 다른 업종을 선택하게 되고, 이들은 기존의 종사자들과 경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빚어지지요. 이 가운데서 또 많은 자영업자들이 생존의 기반을 잃어버리게 되는 겁니다.

제는 놀고먹는 큰 쥐들

▲사진은 내용과 관계 없습니다.
시경에 나오는 두 편의 시는 시대가 바뀌어도 지배계급의 속성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줍니다. 그때는 노예주가 곧 정치적 권력자였습니다. 자본과 권력의 미분화 상태였다고나 할까요. 지금은 형식상 자본과 권력이 분리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형식상’ 그럴 뿐입니다.

권력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돈을 필요로 합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한 번 하려면 엄청난 선거 비용이 들어가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자본은 자신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권력이 있어야 합니다. 예컨대 노동운동을 탄압하기 위해서도 법률의 제정이 필요하고,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 파괴에 대한 비용을 지불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환경에 대한 법을 느슨하게 할 필요가 있겠지요.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겁니다. 이처럼 권력과 자본은 본질적으로 한통속이 될 수밖에 없는 거지요.

따라서 정치가 자본과 결탁하면 백성을 억압하여 자본과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기생충의 역할을 할 뿐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시경>에서 말하는 놀고먹는 큰 쥐는 이런 무리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소수이고 이들에 의해 억압받는 자는 다수입니다. 이들은 사회가 창출한 부 대부분을 지배합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이들이 흘려놓은 얼마 안 되는 재화를 가지고 서로 나누어 먹는 꼴이 되어버립니다. 살기 위한 아우성이 커지지 않을 수 없는 거지요. 율곡 이이가 황건이나 적미와 같은 도적이 천성이 나빠서가 아니라는 말을 새삼 되새길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죽은 사람 장사 지내는 데 원통함이 없게 해야 한다’는 말 앞에는 ‘살아 있는 사람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다면 죽어도 원통할 것까지는 없을 겁니다. 아마도 세상에 우울, 범죄, 자살, 공포 등이 난무하는 건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일 겁니다. 이런 세상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은 죄악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선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놀고먹는 큰 쥐를 잡을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김성범(농부) pfkimsb@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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