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추석 인사를 간 자리에서 오랜만에 만난 어른이랑 술을 한잔하였습니다. 하지만 몇 순배 돌지 못하고 술자리를 급하게 정리하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술자리에서 대선 이야기가 나와서입니다.
경상도 지역에서 예순 해를 넘게 사신 어른들 중 많은 분이 그렇듯 그분은 박근혜 후보의 장점을 늘어놓으시며, 목에 핏대를 올리셨고, 나의 입장에 대해 물어 오셨습니다. 여러 후보들의 장단점을 이야기하다가 ‘국가발전’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박근혜 후보라는 그분의 말씀에 서둘러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근혜 후보가 가진 경제발전의 이미지가 허상이고, 그녀의 부친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발전 역시 허상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박근혜 후보가 내세우는 ‘국가발전’과 안철수 후보의 ‘창조적이고 착한 발전’, 문재인 후보의 ‘정의롭고 공평한 발전’, 이정희 후보의 ‘남북관개개선을 통한 발전’의 개념들 사이에 차이를 찾을 수 없어 더 이상 대화를 이어 나가기 어려웠습니다.
대선이 다가오고 많은 후보들이 어떠한 형태로든 발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발전의 방법과 방향에는 조금씩 다른 부분이 있지만, 공통적 단어는 ‘발전’입니다. 하지만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아니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는 ‘발전’이라는 단어가 만들어낸 공포를 너무나도 많이 보아왔습니다. 자본주의 경제가 스스로의 동력으로 발전되지 못하는 현실에서 ‘발전’이라는 이데올로기는 결국에는 누군가의 박탈로 이어진다는 것(국내적이든 세계적이든)을 모두들 알고 있지만, 대선 시기에 모든 이에게 가장 와 닿는 달콤한 단어 그리고 가장 사람들을 현혹할 수 있는 단어는 ‘발전’과 ‘성장’이라는 폭력의 용광로였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발전’이라는 단어가 가진 폭력의 이데올로기를 끊어 내고, 우리가 서 있는 이 땅과 어제를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발전과 반목의 세기가 만들어놓은 삶의 공백을 메우고, 인간과 인간관의 우애로운 관계, 자연, 자연과 인간의 어우러짐이 오롯이 세상의 중심으로 설 수 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내일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발전’의 이데올로기로 또 다시 내일을 접근한다면, 우리는 결국 또 지표상의 수치와 몇몇 ‘발전’신화에 조급해 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발전’의 목표를 맞추기 위해 우리는 또 싸우고, 짓이기며 서로를 갉아먹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산업단지로 피해 보상’과 ‘지역 발전을 위한 또 다른 산업단지 지정’의 깃발이 함께 걸린 어느 마을의 패러독스를 보며 ‘발전’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어느 순간엔가 우리들을 발전과 생존의 틈바구니 속에 가두어 버린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우리가 함께 가진 것, 그리고 우리가 함께 극복해 나가야 하는 것을 함께 내어놓고, 토론하고, 풀어내 가는 것. 이것만이 ‘발전=성장=행복’이라는 어그러진 현대사의 도식을 바로잡고, 우리 스스로 ‘발전’의 벽이 막은 폭력의 미로에서 빠져나가는 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