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의 법칙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참된 앎이다.”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말이지요. 동일률을 준수하라는 가르침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고의 기본법칙을 발견하고 확립했습니다. 그 첫째는 동일률입니다. ‘1은 1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모순율입니다. ‘1은 1 아닌 것이 아니다’라고 표현되지요. 다음으로는 배중률입니다. ‘P는 1이거나 1아니거나 가운데 어느 하나이지 1이면서 동시에 1 아닌 것일 수는 없다’고 하는 원리입니다.
이 법칙을 부정하면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없습니다. 정상적인 사고 능력을 갖춘 사람은 이 법칙에 따라 사고하고 추론하지요. 이 법칙을 어기면 어떻게 될까요? 개인뿐만 아니라 세상은 엉망이 되어버릴 겁니다. 이 법칙에 따라 사고하는 능력이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하나요? 사람은 무슨, 그냥 ‘미친놈’이라고 하지요.
자신이 세웠지만, 자신이 세운 게 아니다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있었지요. “저는 요즘 에~~ 제가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어~~ 인터넷 금융회사를 어~~ 창립을 했습니다. 어~~ 올해 1월에 BBK라는 투자 자문회사를 그~~ 설립을 하고, 이제 그 투자 자문 회사가 필요로 하는 업무를 위해서 &^*%증권회사를...” 이렇게 자신의 입으로 말해 놓고도 자신은 BBK라는 회사를 자신이 세우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더 나가 만약 자신이 그 회사를 세웠다는 게 사실로 드러나면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바로 물러나겠다고 했던 걸로 기억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사실을 까발려도 멀쩡하게 돌아다니는데 어떤 사람은 이 사실을 까발렸다고 해서 감옥에 들어갑니다. 둘 다 같은 발언을 했는데 한 사람은 죄가 되고 한 사람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기소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유죄라고 판결한 사람도 제정신을 가진 게 아닌 것은 마찬가지일 겁니다.
미국 소고기 수입 문제도 그렇습니다. 언제는 미국 소고기는 위험해서 절대 수입해서는 안 된다고 하던 신문들이, 정권이 바뀌자 미국 소고기가 위험하다는 말은 괴담이라고 지껄였지요. 같은 대상을 긍정하면서 동시에 부정한 것이지요. 그런 기사를 싸지르는 신문 회사가 정상적인 언론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지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그런 신문에는 ‘찌라시’라는 이름 딱 어울립니다.
정상적인 사고를 하면 좌파, 빨갱이, 종북이 되는 세상
인 것은 이고 아닌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사고에서 어겨서는 안 되는 철칙입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 것은 인 것이고 아닌 것은 아닌 것인 그런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사회가 이런 법칙을 준수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 역시 미쳐버린 사회입니다. 불의가 정의를 단죄하고 매국이 애국을 심판하는 기가 막히는 세상이 되는 거지요.
강도(强盜) 일제의 식민 통치가 우리나라를 근대화시켜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일본에 고마워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단 사실 여부를 떠나 매우 모욕적인 말입니다. 우리나라는 자율적으로 사회를 발전시킬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거니까요.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주장이 사실과 부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일제 식민 통치 동안 우리나라에 근대적 산업 시설이 들어선 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설을 설치한 목적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주목해야 합니다. 조선을 근대화시키기 위해서였나요? 자신들의 파쇼적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이유 이외에는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일제 지배하의 조선 민중은 어디까지나 왜놈의 노예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왜정(倭政)을 미화하거나 동경하는 자들은 무지에서 비롯되었건 의도적이건 상관없이 한국 사람이면서 동시에 한국 사람이 아닌, 자신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내다 버린 존재에 불과합니다.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존재는 역시 정상적인 인간 존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젖먹이 때는 아직 정체성이 확립되어 있지 않겠지만, 배울 만큼 배우고 나이가 들만큼 들어도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인간은 ‘얼간이’일 뿐입니다. 사전 그대로의 얼간이는 사회나 역사에 해악은 끼치지 않습니다. 가끔은 일반인이 상상하지 않았던 바보 같은 짓을 함으로써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요. 하지만 왜놈의 지배가 우리나라를 근대화시켰다고 하는 유의 얼간이들은 사회와 역사를 병들게 하는 치명적인 독극물일 뿐입니다.
문제는 지금 세상에서 이런 미친놈이나 얼간이들을 비판하면 비판하는 사람이 종북, 좌파, 빨갱이가 된다는 겁니다.
암세포
대부분의 기득권 세력들은 절대로 기득권을 포기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세력들을 만들고 또 끊임없이 확장해 갑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부와 권력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들의 행태는 암세포의 그것과 놀랄 정도로 일치합니다.
암세포는 정상세포와 달리 무한하게 분열, 증식한다. 영양분을 섭취, 분해, 이용하는 대사 과정이 정상세포보다 훨씬 왕성하기 때문에 정상세포로 공급되는 영양물질을 빼앗는다.
정상 세포는 일정한 형태를 이룬 채 자기 위치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암세포는 모양이나 형태가 불규칙하고 매우 공격적인 성질을 지니고 있어서 혈관이나 림프관을 통해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장기에까지 옮겨가 새로운 암을 발생시킨다.
암세포는 분열 및 증식을 하면서 독소나 독액을 분비해 신체를 약하게 만들고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이렇게 정리해 놓고 보니 암세포의 특징이 신자유주의의 속성과도 흡사합니다. 탐욕스럽고, 공격적이고, 정복적이며, 끊임없이 다른 지역으로 전이 해 나가 그 지역의 고유한 가치관뿐만 아니라 전통문화와 삶의 방식까지도 사정없이 파괴해 버리니까요.
기득권자들은 대중을 기만합니다. 그것이 통하지 않으면 억압을 합니다. 그들은 군대와 경찰, 행정관료들을 매수하고 지배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인간이 전적으로 그렇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어쨌든 이기적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이러한 인간의 속성에 빌붙어 자신들의 마각(馬脚)을 ‘이익’이라는 달콤한 설탕물로 감싼 다음 사람들에게 먹이지요. 세상을 볼 수 있는 일정 정도의 식견이 없는 사람이라면 달짝지근한 알약이 자신의 생명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알아채기가 어렵습니다. 교묘하기가 신기(神技)의 경지에 이르렀으니까요.
맹자는 “백성들이 사는 방법은 ‘생활에 필요한 재물(항산, 恒産)이 있으면, 온전한 마음(항심, 恒心)을 갖지만, 항산이 없으면 자신의 욕구에 따라 함부로 행동한다.’”<맹자, 등문공 상>고 했습니다. 또 “항산이 없어도 항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선비만이 그럴 수 있다.”<맹자, 양혜왕장구 상>고 했습니다.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기 위해서는 식견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하루하루 연명해 나가기도 버거운 사람들이 그런 데까지 관심을 가지기는 어렵습니다. 식견의 대부분은 국가가 옳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내용 통해 얻어진 것이지요. 그 외의 것에 대해서는 신경 쓸 여유가 없습니다. 만약 그들이 선의를 가지고 있다면 별 문제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그와 정반대이지요. 자신의 핏줄에 빨대를 꼽아 피를 빠는 기생충에 대해서는 맹목적인 지지를 보내면서도 자신의 복지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보고 빨갱이니 좌파로 매도하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각한 건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있는 식견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득권자에게 빌붙어 구걸하는 경우입니다. 썩어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생선 찌꺼기를 찾아 성가시게 날아다니는 파리처럼 말입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한 판별, 명변(明辨)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는 주어진 여러 선택지(選擇枝) 가운데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해서 판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판별 자체가 불가능한 때도 있지요. 또 옳은 것이 한 가지가 아니라 둘, 또는 그 이상이 되는 때도 있습니다. 진리는 복수성(複數性)을 가질 수도 있다는 거지요. 사실 이러한 복수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곧 전제(專制)가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문제는 선택함에 그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거지요.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인가, 사회 전체의 평화와 발전을 위한 것인가에 따라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게 되는 겁니다.
오래전 모 대학 입시 문제에 “엘리트가 될 건가 민중이 될 건가”라고 묻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지식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지식을 갖춘 엘리트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 사는 세상에는 잡다한 문제가 없을 수 없습니다. 유토피아에서도 먹으려면 농사를 지어야 하고, 농사를 짓는다면 가뭄이 들었을 때 물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의 문제로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을 거니까요. 지식은 그러한 문제에 봉착했을 때 어떠한 방법으로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지식을 가진 식자(識者)들의 역할이 바로 이런 걸 것입니다.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은 그른 것입니다. 이게 뒤죽박죽이 되면 사람의 세상이 아니라 약육강식이 횡횡하고, 거짓과 기만이 난무하는 난세가 되는 거지요. 태평한 세상을 만드는 건 어려운 게 아닙니다.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되면 임금은 임금 노릇을, 신하는 신하 노릇을, 부모는 부모 노릇을, 자식은 자식 노릇을 제대로 하게 될 겁니다. 세상이 이렇게만 된다면 평화와 정의도 쉽게 구현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