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올해는 애매한 연휴로 도로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길어질 듯하다. 고향과 가족, 친구들을 떠올리는 추석이라고 마냥 다 설레는 건 아니다. 요즘 들어 추석 앞에 ‘민족의 명절’이라는 미사여구도 잘 붙이지 않는 걸 보면 명절이면 외롭고 쓸쓸한 이들이 더 늘어났다는 반증은 아닐까.
밤을 지새워야 하는 경비 노동자, 시집살이에 친정 생각하면서도 말 못하는 며느리,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추석과 무관하게만 생각하는 이주노동자, 오랜 시간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철폐를 요구하며 싸우는 장기투쟁사업장 노동자, 언제 취직할 거냐는 물음에 맘이 졸아드는 청년, 결혼은 언제 할 거냐는 타박이 두려운 비혼자, 성적이 어떻게 되냐는 물음만 듣는 청소년 등, 추석은 마냥 즐겁지 않다.
보고 싶은 이들과 마주할 수 없는 것보다 슬픈 건 목소리도 나누지 못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이번 이야기의 화제는 ‘전화’다.
스마트폰까지 등장한 마당에 전화는 ‘문명의 혜택’보다는 ‘문명의 압박’에 더 가깝게 느껴지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화는 ‘낭만’이자 ‘추억’이었다.
전화를 소재로 한 노래로는 1989년 김혜림의 데뷔곡 <디디디(DDD)>를 꼽을 수 있다. 디디디가 무슨 뜻인가? 장거리자동전화direct distance dialing다. 먼 지역 간 전화 연결을 전화교환원 없이 자동으로 연결한다는 거다. 지금이야 생각하기 어렵겠지만 이 시스템이 우리나라에 최초 도입된 시기는 1971년이다. 모든 지역이 지역번호를 누르고 자동으로 연결하게 된 시기는 80년대 들어서다.
여하튼 김혜림은 이 노래로 큰 인기를 얻었다. ‘그대와 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기에 전화 다이얼에 맞춰 난 몰래 그대를 부르네...(중략) 디디디 디디디 혼자서 너무나 외로워 디디디 디디디 가슴만 태우는 그대여’라는 노래 가사는 전화가 사랑의 매개 역할이길 바라고 있다. 노래가 발표된 89년은 인터넷이 보급된 시기도 아니었고, KTX도 없었고, 더구나 휴대폰은 생각도 못했다.
편지는 너무 느렸고, 전화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곧 사랑의 소리였다. 방방마다 전화기를 두던 시절도 아니었고, 가족과 함께 산다면 집 전화기로 사랑을 속삭이긴 어려웠다. 지금에야 찾는 게 더 힘든 공중전화기지만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공중전화 앞에는 긴 줄이 서 있었다. 때때로 전화를 빨리 끊지 않아 싸움이 벌어졌다는 사건 기사가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뒤에서 기다리면 더 조급해지고, 오글거리는 사랑의 속삭임은 할 수 없어 늦은 시각 아무도 없는 전화기를 찾아다니던 기억을 가진 이들도 많을 것이다.
이어 이야기 할 노래 두 곡은 모두 94년에 발표됐다. 지금은 작고한 故 임종환의 <그냥 걸었어>는 당시 가요차트에서도 상위권에 오래 머물렀다. ‘여보세요’라는 여자 목소리로 시작해 ‘처음엔 그냥 걸었어 비도 오고해서 오랜만에 빗속을 걸으니 옛 생각도 나데 울적해 노래도 불렀어 저절로 눈물이 흐르네 너 내 모습을 보았다면 바보라고 했을 거야’라는 가사가 이어지고 ‘전화 왜 했어’라는 여자 목소리가 다시 등장한다.
그러자 ‘정말이야 처음엔 그냥 걸었어 비도 오고 기분도 그렇고 해서(중략) 미안해 너의 집 앞이야’라고 대답한다. 2절에서는 ‘거기 어디야’라는 여자의 말과 ‘미안해 너의 집 앞이야 난 너를 사랑해’라는 식의 대화가 깨알같이 이어진다.
헤어진 옛 애인을 그리워 전화를 걸었다는 내용쯤으로 보인다. 내게도 공중전화 박스에서 비를 맞으며 옛 애인의 다이얼을 누르고서는 한참을 말없이 수화기만 든 채로 있다가 ‘너 맞지’라는 소리에 뜨끔해 ‘그냥 걸었어’라고 대답한 기억이 있다.
발신자번호가 다 뜨는 신기술 덕에 이같이 그냥 전화를 걸기는 쉽지 않아졌다. 비도 오고 기분도 그렇고 하더라도.
같은 해에 ‘전화’를 소재로 한 노래가 한 곡 더 발표됐다. 꽃다지의 <전화카드 한 장>이다.(꽃다지의 합법음반 1집에 수록된 시기는 94년이나 93년 비합법음반 2집에도 수록됐다. 대중가요라는 정의상 94년에 공식 발표한 것으로 본다)
대중가요라면서 왜 속칭 민중가요를 소개할까 궁금할 수 있겠다. 이만큼 널리 오랫동안 불리는 노래라면 민중가요이자 대중가요기 때문이다. 민중가요 가운데 집회 장소에서 다수 인원이 함께 부르는 노래가 있는가하면, 집회 장소에선 잘 불리지 않지만, 술자리나 소소한 모임에서 자주 불리는 노래가 있다. 후자 중 대표적인 노래가 <전화카드 한 장>이다.
게다가 이 노래는 당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공중전화기는 동전을 먹는 것과 전화카드를 먹었다가 뱉는 것이 있다. 시간이 지나며 IC카드라는 것도 나왔다. 전화카드의 장점은 동전을 바꿀 필요가 없고, 3000원 짜리 이상의 카드는 조금씩 돈을 더 얹어줬다. 그리고 0원이 될 때까지 쓸 수가 있다. 때문에 지금은 거의 없어진 전화카드지만 당시는 슈퍼마켓의 필수품이었다.
또, 당시 전화카드는 선물의 역할도 톡톡히 했다. 사랑하는 이에게, 군대 가는 사람에게, 부모님에게, 친구에게, 그리고 당시 운동권의 동지에게.
언제라도 힘들고 지쳤을 땐
내게 전화를 하라고
내 손에 꼭 쥐어준
너의 전화카드 한 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고
고맙다는 말 그말 한마디
다 못하고 돌아섰네
나는 그저 나의 아픔만을
생각하며 살았는데
그런 입으로 나는 늘
동지라 말했는데
오늘 난 편지를 써야겠어
전화 카드도 사야겠어
그리고 네게 전화를 해야지
줄 것이 있노라고
-꽃다지 <전화카드 한 장>
90년대를 살아온 이들은 누구나 전화카드를 주고받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떠나보내는 이에게 전화카드 한 장 건네며 다시 만나자고 눈시울을 붉혔던 추억과 감동도. 학창시절 대학 총학생회 선거에서 낙선한 한 선배는 선거운동원들에게 전화카드에 편지를 적어 건넸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추억에서 빠져나온 2000년대는 더이상 전화카드를 건네지 않는다. 2004년 다이나믹 듀오가 발표한 21세기판 전화카드 한 장 <Ring my bell>은 ‘내가 필요할 때 내가 힘이될게 전화해(중략) 고민 있다면 바로 call me 말해봐 들어줄게 너의 story’라고 노래한다.
‘힘들 때 전화해 call me up ring my bell 외로울땐 전화해 call me yo ring my bell’은 전화를 하라고 말한다. 받은 전화 카드 한 장을 바라보며 전화를 해야겠다고 마음먹던 90년대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 그 덕에 몇 년 전까지는 군대 가는 후배에게 전화카드를 선물하곤 했으나 이젠 수신자 부담 전화를 마음껏 하라는 말로 전화카드를 대신하게 됐다.
추석, 옛 추억을 떠올리며 한동안 잊고 지냈던 이들에게 전화 한 통씩 건네자. 또, 추석을 쓸쓸하고 힘겹게 보낼 이들에게 전화 한 통화라도 건네자. 아니면 카카오톡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