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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관리툴 2012년09월15일 02시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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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날] 이유택의 교양산책(5)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존재의 의미는 시간이다”

이유택(계명대) philonus@kmu.ac.kr

하이데거는 1889년 9월 26일 독일 서남부에 위치한 메스키르히(Messkirch)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났다. 1907년 하이데거는 프란츠 폰 브렌타노의 학위논문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른 존재자의 다양한 의미에 관하여』를 읽고 존재물음(Seinsfrage)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즉 “존재자가 다양한 의미로 말해진다면 그 근본적인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게 되는데, 이 이른바 존재물음(존재의 의미에 관한 물음)은 그의 평생에 걸친 철학적 사유를 지배하는 화두가 된다.

1976년 하이데거가 세상을 떠났을 때 독일을 대표하는 신문들 가운데 하나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rankfurter Allgemeiner Zeitung)은 다음과 같이 그의 철학을 높이 평가했다. “이 사람 안에 세계철학사의 모든 지혜가 집결되어 있으며 (...) 그가 남겨 놓고 간 방대한 양의 작품은 지금까지 그 어떤 철학적 문헌이 할 수 있었던 것보다도 더 깊이 독자들을 철학적 물음의 심연으로 휘몰아 갈 것이다.”

하이데거의 철학 사상의 핵심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존재와 시간』을 읽어 봐야 한다. 왜냐하면 『존재와 시간』(1927)은 하이데거의 출세작일 뿐만 아니라, 글자 그대로 하이데거의 ‘철학적 주저’이기 때문이다.

『존재와 시간』은 두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서론으로 시작한다. 서론의 1장은 이른바 존재물음의 필연성과 구조와 탁월성을 밝히고, 2장은 존재물음의 성취를 위한 방법론적 고찰과 『존재와 시간』의 전체적인 계획의 진행표를 담고 있다. 서론 앞에는 한 페이지에 걸쳐 『존재와 시간』의 모토가 아무런 제목도 달지 않고 등장한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플라톤의 대화편 『소피스테스』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존재와 시간』의 주제를 강렬하게 부각시킨다. 『존재와 시간』의 문제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할 때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있다’라는 말의 의미는 너무도 자명하다. 그것은 아무런 정보도 담고 있지 않기에 누구에 의해서도 그것의 의미는 물어지지 않는다. ‘있다’라는 말에 대한 물음은 아예 의심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이미 그 효능이 입증된 언어분석학적 처방에 따라 단순히 ‘있다’라는 말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우리는 ‘있다’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아무런 어려움도 가지고 있지 않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존재의 의미가 물어져야 하는가?
우리가 “있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아무런 어려움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하이데거도 일단 인정한다. 그러나 바로 이 사실이야말로 하이데거에게는 “존재물음의 의미에 대한 이해를 새삼스럽게 각성시켜야” 하는 동기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터무니없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의 성취”이다. 말하자면 『존재와 시간』의 궁극적 의도는 존재물음을 의미 있게 제기할 수 있기 위한 전제조건들을 마련하는 데 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이데거는 이러한 목표를 세우는가?

『존재와 시간』의 목표는 ‘있다’라는 말의 의미 물음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이 존재물음이 철학의 근본물음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 아니 철학의 근본물음 자체라는 사실을 확인시키는 데 있다. 이 점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묻자. 도대체 무엇 때문에 존재물음이 제기되어야 하는가? 철학의 기능이 대답에 있지 않고 새로운 문제들의 발굴에 있기라도 한 것인가?

해석학적 전통으로부터 하이데거가 물려받은 주요 사상은 다음과 같다. 어떤 것을 - 지금은 ‘존재’ 라는 말의 의미 - 묻기 위해서 우리는 대답하고자 하는 바로 그 물음 내지 문제를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물음을 모르고서 대답을 얻은 자는 그 대답을 이해할 수 없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있다’라는 말을 사용할 때 부딪히는 상황이다. ‘있다’라는 말의 의미를 우리는 묻지 않는다. 아주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처럼 자명하기에 그것의 의미를 우리는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존재적’으로 가장 가까운 것이 ‘존재론적’으로는 가장 먼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어떻게 ‘존재’에 대해서 물을 수 있단 말인가?

『존재와 시간』의 첫 페이지에서 - 이 첫 페이지는 절 별로 엄밀하게 짜인 목차에 들어있지도 않다 - 하이데거는 벌써 거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목차 안에 『존재와 시간』의 전체 프로그램이 들어있다. 구체적인 물음 제기를 통해서 점차 분명해질 존재이해는 오직 ‘시간지평’ 위에서만 가능하다. 즉 존재 개념을 분석하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시간 개념과 만나게 된다. ‘존재’는 결국 동사 바로 그것이다. 명사가 아니다. 즉 실체가 아니다. ‘있다’라는 말을 사용할 때마다 우리는 언제나 이미 시간적인 규정을 행하고 있다. 존재물음은 이렇게 시간에 대한 물음으로 보다 구체적으로 규정된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전통철학 안에서 발견되는 ‘존재’에 대한 대표적인 선입견 세 가지를 지적한다. 이들 선입견은 서양철학 전체의 젖줄인 특정 존재론, 즉 그리스 존재론의 표현이다. ‘존재’라는 개념에 대한 선입견들은 - 존재는 가장 보편적인 개념이며, 정의 불가능하고, 자명하다는 세 가지 선입견 - 전통적인 형태의 존재물음(“존재란 무엇인가?”)이 사실상 무의미함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전통과는 다른 방식으로, 즉 의미 있게 존재물음을 제기해야 할 필연성은 더욱 커질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금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존재물음을 제기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하이데거의 대답은 세 번째 선입견을 다루는 곳에서 주어진다. ‘존재’의 자명함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우리가 “언제나 이미 어떤 존재이해 안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이 존재이해의 해명이야말로 존재물음이 제기되어야 할 이유에 대한 답이다. 존재의 자명함은 다른 두 선입견과 병렬하지 않고 그들의 근거를 이룬다.

첫 번째 선입견에 의하면 존재는 그것이 사유 가능한 모든 존재자를 포괄하는 이상 가장 보편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존재’의 보편성은 우리에게 친숙한 유개념의 보편성과 같은 보편성이 아니다. 예컨대 ‘인류’라는 개념은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유개념이다. 그러나 ‘존재’는 아무런 종도 가지고 있지 않다. 물론 우리는 존재자를 각각 다양한 범주로 (질, 양, 공간적 상태, 시간적 상태 등과 같은 존재자의 가장 보편적 규정들) 나눈다. 그러나 이들 규정이 종차는 아니다. 즉 한 존재자는 본질, 질, 양 등을 동시에 가진다.

각 존재자에 속해있는 것으로서 ‘존재’, 말하자면 가장 보편적인 개념으로서의 존재는 다른 보편성, 유개념의 그것보다 훨씬 고차적인 보편성을 지녀야 한다. ‘존재’의 이러한 보편성은 모든 규정을 넘어서는 보편성이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는 초월적이다. 그러나 이렇게 초월적인 ‘존재’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점이 매우 불분명하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해질 수 있다.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그것이 어떤 규정을 통해 정의되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도 벌써 무의미하다. 이로써 우리는 두 번째 선입견과 만난다.

두 번째 선입견에 의하면 존재는 정의 불가능하다. 전통이 그랬던 것처럼 정의를 가장 가까운 상위 유개념과 종차를 결합하는 규정으로 이해한다면 ‘존재’는 정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존재가 이미 유개념이 아니라면 당연히 존재는 보다 높은 유개념으로부터 종차적 구분을 통해 규정 가능한 종개념도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전통적인 방식의 정의를 상기해 보자. 전통적으로 인간은 인간이라는 유개념과 그것의 상위 개념인 동물, 동물과 인간의 종차인 이성을 통해 규정되어 왔다. “인간은 로고스를 가진, 즉 말을 하는 동물이다.”(zoon logon echon) 물론 시대마다, 사람마다 종차는 다르게 이해되었고, 그럼으로써 인간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가능해지고, 아울러 올바른 종차를 두고 무용한 논쟁이 불붙게 되었다. 인간은 말을 하는 동물일 수도, 생각하고 회의하는 동물일 수도, 웃고 울 수 있는 동물일 수도, 노동하는 동물일 수도, 신의 모상인 동물일 수도, 무엇인가를 제작하는 동물일 수도 있다. 하이데거는 이 가운데 어떤 특정한 인간 정의도 선호하지 않는다. 그에게 문제는 인간의 본질을 이렇게 다양하게 규정하고 정의하는 태도 자체의 타당성과 그 가능성 자체이다. 종차를 이용하지 않고, 인간의 본질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 규정할 가능성은 없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과연 불변하는 속성이라는 의미로서의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존재는 도대체 그 어떤 존재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있다’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 존재에 대한 세 번째 선입견의 근거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선입견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으로 가장 현명한 해결책으로 인정받아오고 있다. 존재는 그냥 자명하므로 전혀 물을 거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문제를 방치하고, 물음금지표를 세우고, ‘있다’라는 사소한 말이 사용되는 방식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정한다. 그러나 짜증스럽게도 인식이 문제될 때 우리는 저런 식의 해결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 헤겔의 말을 빌자면 알려졌다고(bekannt) 해서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는(erkannt)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선 명심해야 할 것은 지금까지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 대답 가능한 방식으로 물어진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자각은 우리로 하여금 아주 일반적이고 형식적인 의미에서 존재물음이 어떤 형태로 물어져야 하는가를 다시 묻게 할 뿐이다.

존재물음이 의미 있으려면 어떤 형태를 갖춰야 하는가? 여기서 하이데거는 한걸음 뒤로 물러나 우선 도대체 물음이라고 하는 것에 일반적으로 무엇이 속해있는지를 생각해 본다. 물음에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 본질적인 구조계기가 속해 있다. 묻는 자, 묻는 것, 대답. 존재 물음과 관련하여 묻는 자는 현존재, 묻는 것 즉 물음의 대상은 존재 의미, 존재의 의미 물음에 대한 대답은 시간이다.

하이데거는 물음을 일종의 찾음으로 특징짓는다. 무엇을 찾을 때 찾는 것과 실제로 찾아지는 것 (이 양자가 반드시 일치한다는 보장은 없다)이 있듯이 물음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찾는 것 (묻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미리 알고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찾을 수 (물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대답이 불가능한 물음은 애당초 잘못된 물음이다. 무엇인가를 물을 때 비록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이미 그것에 대한 일정한 전(前)이해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누구에게 이름을 물을 때, 비록 그 이름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상대방이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음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어떤 물음에 ‘대답한다’는 것은 그 물음 안에 이미 들어있는 것을 찾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존재의 의미를 묻기 위해 우리는 존재 그 자체를 물음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존재는 존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존재는 존재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존재론적 차이 ontologische Differenz라고 부른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우리 자신을 존재물음의 실마리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존재의 의미를 묻는 것은 이로써 존재의 의미 물음을 던지는 자, 즉 인간을 그것의 존재에 있어서 해명하는 일로 바뀌게 된다. 존재의 의미 물음을 던지는 자로서의 인간이 바로 ‘현존재’(Dasein)이다. 즉 현존재는 존재의 의미를 묻고 찾는 자라는 의미에서의 인간을 말하며, 이러한 현존재로서의 인간의 존재론적 구조 분석이 바로 ‘기초존재론’(Fundamentalontologie)이다.

‘기초존재론’의 과제는 바로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물음을 제기함으로써 “존재의 여러 가지 가능한 방식들에 대한 비연역적, 비구성적 계보학”을 형성하는데 놓여있다. 이러한 계보학 형성을 위해 필요한 것은 ‘존재’의 의미에 대한 이해이고, 다름 아닌 바로 이 존재이해가 존재물음의 존재론적 우위를 이룬다. 존재물음이 성취되지 않고서는 개별과학의 생산적 논리 역시, 과학의 위기상황이 보여 주듯이, 임의적이고 기준이 결여된 상태로 머물 뿐이라는 게 하이데거의 생각이다.

이유택(계명대) philonus@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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