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철이 다가오나 봅니다. 좌파, 종북, 빨갱이라는 말이 황사 바람에 온갖 쓰레기와 잡것들이 미친놈 널뛰듯 이리저리 몰리고 흩어지듯 난리를 피우고 있습니다.
상어가 사람이라면
문득 프랑스 교육학자 에버레트 라이머의 <학교는 죽었다>라는 책이 생각납니다. 읽은 지 벌써 30년이 지났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곳에 농사지으러 들어온 지 벌써 5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풀지 못한 짐짝이 창고 속에서 나뒹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풀 생각은 없습니다. 아마 그 짐짝 어딘가에 있겠지만 찾을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그 책 첫머리에 대충 이런 내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만약 상어가 사람이라면 그들은 작은 물고기들에게 더 좋은 대우를 해 줄 거야...집도 지어주고 다치기라도 한다면 곧바로 치료도 해 주겠지. 죽어버리면 제 입에 들어갈 물고기가 줄어드는 게 될 거니까...학교를 세워 어릴 때부터 상어님께 온몸을 바치는 것이 물고기의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일임을 알 수 있도록 윤리와 도덕도 가르쳐 줄 거야...상어가 미래의 아름다운 세상에 대해서 그려 보여 줄 때는 그 말이 진실이라고 믿고 따르도록 가르쳐 주겠지. 만약 믿지 않는 물고기가 있다면 빨리 상어에게 달려가 일러바치는 게 정의로운 일이라는 것도 가르칠 거야. 말을 잘 듣는 큰물고기에게는 작은 물고기를 집어삼킬 수 있는 특권도 줄 거야. 상어야 작은 물고기보다는 큰 물고기를 먹는 게 훨씬 편할 거니까...
파블로프의 개
잘 아시겠지만, 파블로프는 조건화라는 과정을 통해 행동의 수정이 인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개를 통한 실험으로 증명했습니다.
조건화는 평소에는 대상에게 특정한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중성자극(Neutral Stimulus)이 무조건적인 반응(Unconditioned Response)을 이끌어내는 자극(Unconditioned Stimulus, 무조건적 자극)과 연합하는 과정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조건화가 이루어지면 중성자극은 조건자극(Conditioned Stimulus)이 되어 조건반응(Conditioned Response)을 이끌어내게 됩니다.
조건화 이전, 개는 음식을 보면 무조건 침을 흘립니다. 이때 음식은 무조건 자극이 되고, 침을 흘리는 반응은 무조건 반응이 되겠지요. 그런데 개에게 밥을 줄 때마다 종을 칩니다. 종소리 자체는 개가 침을 흘리는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자극, 즉 중성자극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반복하게 되면 무조건 자극과 중성자극의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다시 말해 조건화가 이루어지는 거지요. 이렇게 되면 개는 종소리만 들어도 침을 흘리게 됩니다. 이때 종소리는 조건 자극이 되고 침을 흘리는 것은 조건 반응이 되겠지요.
개인적 경험
요즘은 초등학교라고 하지만 그때는 황국신민학교의 줄임말인 국민-학교라고 했지요. 국민과 학교 사이에 줄을 넣은 건 그렇게 하지 않으니까 한글 워드가 자동으로 초등학교로 바꿔줘서입니다. 좌우간 그 시절, 당당하게 “무찌르자 오랑캐....”를 목젖이 찢어지도록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미술 시간, 반공 포스터 그릴 때는 어떻게 하면 저들을 좀 더 잔인하게, 그리고 악마적인 모습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습니다.
그즈음 크리스마스가 가까웠을 때 아버지가 장로인 아이가 교회 가면 사탕이랑 양말을 준다기에 따라가 보았지요. 길게 늘어뜨린 금발에 턱수염을 점잖게 기른 흰색 피부의 사내가 허공을 응시하는 그림이 걸려 있더군요.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그 사내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그분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교회 벽에 걸린 그 흰 피부의 사내가 너무나도 위대하고 훌륭해 보였습니다. 그런 훌륭한 사람을 따르는 사람들도 모두 그분과 같이 훌륭해 보였습니다. 사탕은 받았냐구요? 크리스마스 끝날 때까지 노래 연습에 자질구레한 심부름과 청소 등 온갖 궂은일 다 하고도 양말은커녕 사탕 한 알 받지 못했던 기억이 아주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당시 마음을 무척 많이 다쳤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때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학교라는 데서도 미국의 조지 워싱턴은 얼마나 위대했고 링컨은 또 얼마나 훌륭했으며...영국은 신사의 나라고 미국은 평화와 자유,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고매한 나라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지요. 그즈음 알았습니다. 피부색이 흰 사람은 모두 착하고 아름답구나, 옷만 흰색을 좋아했던 우리 민족은 너무나도 보잘것없구나. 나는 왜 영국이나 미국에서 태어나지 못했을까, 왜 노란 피부색에 찢어진 눈을 가지게 되었는지 원망했습니다.
무지개는 일곱 빛깔?
누가 세어 봤나요? 아무리 세어 보아도 도무지 셀 수가 없던데.
어제 아내가 술을 빚어 1리터짜리 병 세 개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 두었습니다. 지금 아내는 냉장고에 1리터들이 병에 담겨 있는 술 세 병이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한 점 의심이 없습니다. 지금 냉장고에 술 세 병이 있다고 알고 있는 아내의 앎은 참일 수 있을까요? 그 사이 내가 한 병을 마셔버렸다면 어떻게 되나요. 다 마셔버렸을지도 모르지요. 물론 제가 다 마셨다면 아내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제가 술에 취해 주정부렸을 것이라는 사실을 연상하게 될 겁니다. 그러한 믿음은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게다가 직접 빚은 술이라 도수가 매우 높기 때문에 믿음의 확실성은 더욱 높아지지요. 그렇다면 제가 어제부터 줄곧 아내와 함께 있었고, 주정을 부리지 않았다면 아내의 현재의 앎이 참일 가능성도 높아지는 걸까요.
비가 오면 땅이 젖는다는 것은 필연적인 진리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흄은 이를 부정했습니다. 비가 오는 것과 땅이 젖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사건이고, 다만 그것이 시간적으로 근접해서 일어나고 있으며, 그것을 반복적으로 경험함으로써 비가 오면 땅이 젖는다는 사실을 기계적으로 연상해내는 것에 불과할 뿐이라고 했지요.
박학(博學)과 박학(薄學)
현재의 인간은 과거에 의해 규정되면서 동시에 새로운 미래를 규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조건에 머물러 있으면 어떠한 발전도 있을 수 없습니다. 과거에 관심을 두는 것은 현재를 이해하기 위함이고, 현재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개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겠지요. 개인도 한 편으로는 사회적 조건에 의해서 규정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에 내재해 있는 문제점을 찾고 이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합니다. 만약 인간이 사회적 조건에 맹목적으로 지배되기만 한다면 인간존재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 될 겁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닭이나 새와 같은 축물(畜物)은 주어진 조건에 지배될 수밖에 없거든요. 개와 돼지도 그렇고 물고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식은 일차적으로 경험으로 형성됩니다. 그렇게 해서 형성된 의식은 행위를 결정합니다. 경험은 널리 배운다는 뜻의 박학(博學)과 유사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책을 통해서,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서, 학교 교육을 통해서, 대중매체를 통해서, 그리고 부모를 통해서도 배웁니다. 이 밖에도 다른 여러 통로가 있을 것입니다. 박학하면 다식(多識)해지겠지요. 우리는 이러한 박학다식한 사람이 충분히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수반해서 그들에게는 그에 걸맞은 권위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어떤 이는 자신의 권위를 한껏 발휘해서 대중들을 기만하기도 하지요. 정말로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앎의 양과 함께 인격도 그만큼 성숙해야 할 건데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수없이 많이 만나게 됩니다. 상대방을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진정한 앎을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수단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대우하는 것 자체가 인간 가치에 대한 올바른 앎을 가지지 못한 명확한 징표이니까요.
일곱 빛깔 무지개가 그렇듯, 알고 있는 것이 항상 객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닙니다. 공자는 제자 자로(子路)에게 “아는 것에 대해서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에 대해서 모른다고 하는 것이 참된 앎”(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이라고 했지요.
인간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아니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요. 그럼에도 자기 확신이라는 자물쇠로 그러한 오류의 가능성을 채워버렸을 때도 문제가 발생합니다. 박학다식하다고 해도 그 박학다식이 사실과 동떨어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널리 배운 것이 박학(博學)이 아니라 박학(薄學)이 되어버리는 거지요. 이렇게 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자신의 앎이 잘못된 것임을 알지 못할 경우, 재앙이 개인에게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많은 파장을 몰고 옵니다. 잘못된 앎은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이에 대처할 수 있는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객관적으로 옳은 것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거짓을 생산하는 세력이 있다는 겁니다. 권력 가진 집단에서 그러한 경우가 흔하게 보이지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야 그렇게 함으로써 떨어지는 이익이 엄청나니까 그렇다 쳐도, 그들에 의해서 짓밟히는 사람이 자진해서 자신의 핏줄에 빨대를 꼽아 그들 입에 물려주는 모습은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차라리 동정심까지 일 지경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목에 밧줄을 건 사람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생명수처럼 받아 마십니다.
좌빨, 종북, 빨갱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관철하기 위해 이런 말을 만들어내는 극소수의 집단들은 제쳐놓고, 이들이 날조한 거짓 언어에 맹목적으로 현혹되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그런 말에 휘둘리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논리는 있을 겁니다. 아울러 이들도 개인적으로는 양심에 따르고자 하고, 도덕적으로 올바른 생활을 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또 사회가 좀 더 정의로워져야 하며, 그렇게 하는 데 일조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나아가 자신의 행위가 사회를 정의롭게 하는 데 일조를 하는 거라고 확신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국가 또는 공적 기관, 학교, 언론 매체 등에서 행하는 명령이나 말은 모두 옳은 것이며, 따라서 이를 어기는 행위는 악이라고 믿는 순박한 사람들일 수도 있겠지요. 이렇게 놓고 보면 그들 또한 매우 정의롭고 순수하며 선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아무리 좋게 봐 주어도 자율적 판단 능력이나 비판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그 부족을 오랫동안 자각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아예 상실해 버렸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한 번 굳어지면 깨기가 어려워집니다.
<중용>에는 널리 배우고, 배운 내용에 대해서는 의심스러운 점은 없는지 세심하게 살펴보고, 신중하게 생각한 다음,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판단하라고 했습니다. 옳고 그름이 판단되었으면 그에 따라 철저하게 실천하라고 했지요.(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辯之, 篤行之.)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가르침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왜 좌파, 종북, 빨갱이와 같은 모욕적이고도 도발적인 말이 사회를 휘젓고 다니게 되었을까, 어떻게 하면 이러한 상황을 말끔히 쓸어낼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횡설수설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