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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관리툴 2012년09월15일 02시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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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날] 정만진의 대구여행 (7)
‘달구벌’이 ‘대구광역시’에 남긴 문화재들

정만진(소설가) daeguedu@daum.net

동화사, 파계사, 부인사, 용연사, 유가사, 소재사 등등 대구 지역에 산재하는 대부분의 고찰들은 모두 신라 때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 어느 절도 본래의 건물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없다. 부인사에 보관 중이던 대장경이 1232년 몽고의 2차 침략 때 방화로 타버리는 등 호란과 임란 같은 전란 탓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들이 모두 목조 건물인 까닭에 소멸은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신라 고찰이 온전히 남아 있지 못한 것은 대구만의 사정이 아니므로, 그것을 다른 지역에 견줘 유난히 안타까워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불상은 대체로 돌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아주 없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천 년 전 신라의 부처들을 우리가 지금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것도 다 그 덕분이다. 팔공산의 신라보물 중 ‘갓바위’가 대중에게 가장 주목받은 것도 어쩌면 당대의 목조 유산들이 모두 없어진 데 따른 ‘어부지리’인지도 모른다.
 

▲ 갓바위, 공식 명칭은 ‘관봉 석조여래좌상'이다.

대중들은 갓바위의 공식 명칭 ‘관봉 석조여래좌상(冠峰石造如來坐像)’에는 흔히 낯설어한다. 그러나 ‘갓바위’라면 모두 친근감을 느낀다. 바위를 깎아 만든 커다란 불상(자체 높이 4.15m, 좌대 포함 전체 높이 5.6m)이 머리 위에 갓 모양의 거대한 넙적바위(두께 15cm, 지름 180cm)를 얹고 있으니 그만하면 ‘갓바위 부처님’에 틀림이 없지만, 대중들은 우선 눈에 보이는 대로 ‘갓(을 쓴)바위’라 호칭하는 것이다.

산꼭대기의 갓 쓴 돌부처, 대구 말고 또 없다

갓바위가 이름을 드날리게 된 것은 두 가지 연유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하나는, ‘빌면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들어준다’는 갓바위의 신화(!) 덕분. 초고학력 시대를 살면서 첨단과학의 세례를 받은 현대인들조차, 심지어는 타 종교 신자 중에도 “시험 잘 치게 해달라, 부자 만들어 달라” 식의 기복(祈福)신앙에 매달려 갓바위를 찾는 이가 드물지 않다는 소문이다.

그러나 신라인들이 1년 365일 내내 금호강을 건너고 동화천 들판과 팔공산 계곡을 걸어 부지런히 관봉에 오른 것은 그런 기복신앙 때문이 아니었다. 신라인들은 미륵불의 도래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 말은 신라인들이 현실의 이익 때문에 갓바위를 찾지는 않았다는 뜻이다.(미주1)이재웅 박사가 ‘지금은 모두들 약사여래로 모시고 있으나 불과 20여년 전에만 해도 미륵불로 모셔졌다고 한다’고 증언하는 것처럼(대구은행 <향토와 문화 1권>, 1996) 신라 때의 이 석불은 ‘빌면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주는’ 그런 부처가 아니었다.

기독교의 메시아 격인 미륵불은 모든 중생을 빠짐없이 구제하여 한결같이 지상낙원의 행복을 구가하게 해줄 ‘미래’의 부처인 데 비해, 약사불은 병을 낫게 해주고 돈도 벌게 해주는 ‘현재’의 구세주이다. 신라인들이 ‘돌부처’를 섬긴 것과 현대의 한국인들이 ‘갓바위부처’를 찾는 것은 그 성격이 사뭇 다른 종교 행위라는 말이다.

‘갓바위’의 지명도가 나날이 높아진 또 다른 까닭은, 부처가 세워진 위치며 그 형상이 워낙 판이하기 때문이다. 보통 불상은 사찰의 불당 내에 금빛을 번쩍이며 모셔져 있거나, 아니면 바위에 볼록하게 새겨져 있는 것이 보통이다.(미주2) 그런데 갓바위부처는 특이하게도 해발 850m의 산봉우리 꼭대기에 저 홀로, 금빛이라고는 한 오라기도 지니지 못한 맨 돌덩어리의 온몸을 송두리째 드러낸 채 앉아 있다. 이만하면 불국토를 꿈꾸던 신라인들에게 충분히 경외롭지 않았을까. 신라인들은 틀림없이 (아직 갓을 쓰지는 않았지만 다른 마애불들에 비하면) 동상처럼 생긴 아주 색다른 모습의 석불이 (금당 안이나 절벽이 아닌) 산꼭대기에 앉아 있다는 점에 뜨겁게 매혹되었을 것이다.

관봉석조여래좌상은 언제 만들어졌나
 
관봉 석조 불상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관봉석조여래좌상을 관리하는 선본사(禪本寺)는 사적(寺蹟)을 통해 638년(선덕여왕 7)에 원광법사의 제자 의현(義玄)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불상을 만들었다고 밝힌다.

그러나 불상의 양식 등을 검토한 전문가들은 9세기 작품으로 간주한다. 경상북도 홈페이지 역시 ‘풍만하지만 경직된 얼굴과 형식화된 옷주름, 평판적인 신체는 탄력성이 배제되어 8세기 불상과는 구별되는 9세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한다.
 
동화사 창건 시기에 대해서도 해석은 비슷하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편 <답사여행의 길잡이 8- 팔공산 자락>도 ‘동화사는 493년에 극달화상이 창건하여 (중략) 832년에 심지왕사가 중창했다고 하지만, 심지왕사(미주3) 때의 중창을 사실상 창건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가 하면, 갓바위부처가 처음부터 머리에 갓을 쓴 형태로 제작된 것은 아니라는 점도 알아둘 만하다. 갓[冠]바위가 있는 산봉(峰)우리의 이름이 관봉(冠峰)이라 불린 것이나, 관봉의 ‘돌부처’가 ‘갓바위부처’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모두 고려 시대 이후의 일이다. 갓바위 석불의 머리 위에 갓 모양의 돌이 얹혀진 때가 고려 시대이기 때문이다.

갓바위는 ‘경산 것’인가?
 
▲팔공산 동봉불상
갓바위의 주소가 대구광역시가 아닌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대한리 산 44번지라는 사실을 거론해야겠다.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한다면 갓바위는 대구의 문화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관봉석조여래좌상은 팔공산 너머에 있지 않고 능선 정상에 있는 덕분에 대구 시민의 마음속에 ‘갓바위는 대구의 것’으로 완벽하게 자리 잡고 있다.

어디 대구 시민뿐일까. 타지 사람들도 갓바위를 찾아 경산 시내로 가지는 않는다. 팔공산 너머에 있는 거조암과 삼존석굴은 흔히 “영천 은해사 거조암”,  “군위 제2석굴암”이라 부르지만, 팔공산 능선의 갓바위는 별로 “경산 갓바위”라고 지칭하지 않는다. 따라서 갓바위는 대구가 타지인이나 외국인들에게 크게 홍보할 만한 대표적 문화유산의 지리적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다.

경상북도 경산시는 해마다 ‘갓바위 축제’를 열고 있지만, 접근성 때문에 관봉석조여래좌상이 ‘대구의 갓바위’로 이미지가 굳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대구광역시도, 갓바위가 행정적 소재지는 경산시이지만 일반인들은 그 점에 큰 의미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관봉석조여래좌상을 통해 ‘관광 대구’의 위상을 높이는 데에 도움을 얻어야 한다. 좁은 국토에서 인접 지방자치단체끼리 이런 일도 함께하지 못해 ‘약사불’(미주4)이 안겨주는 눈앞의 이익마저 놓친다면, 과연 언제 ‘미륵불’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겠는가.   

갓바위는 국보는 아니다.(미주5) 하지만 21세기 현대인들이 현재의 복을 빌기 위해 줄기차게 찾는 갓바위의 풍경은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한 번쯤 다시 생각해볼 실마리를 던져준다. 21세기 첨단과학 시대에, 어느 산꼭대기에서 이런 모습의 ‘현대인의 초상’을 또 볼 수 있겠는가. 아마 여기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갓바위는 역사가 남긴 보물이기도 하지만, 지나간 시대만이 아니라 현대의 정신문화까지 아울러 증언하는 보기 드문 문화유산이다. 단언하건대, 갓바위를 찾는 행렬이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관봉석조여래좌상은 반드시 국보의 영예를 얻을 것이다. 당연히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 경산시는 힘을 합쳐 팔공산의 갓바위를 국가적 관광 명소로 키워야 한다.

미주

1. 신라인은 재앙, 난관을 어떻게 극복하였는가? 이는, 신라인은 행복을 어디에서 찾았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에 대한 해답의 단서는 ‘도솔가’에서 찾을 수 있다. (중략) 미륵사상을 읊은 도솔가는 월명사가 왕을 위하여 이변을 물리칠 목적에서 지은 노래이지만 거기에는 미륵의 대자대비를 바라는 마음- 곧은 마음-이 전제되어 있다. (중략) 삶의 의미는 공덕을 닦는 데에 있다. (박재문, <한국교육사>, 학지사, 2001, 83∼84쪽)

2. 동화사를 찾을 때에도 신라인들의 마음은 갓바위부처를 모시는 때와 한결같았다. 지금은 동화사가 세계 최대의 거대 약사대불을 건립하는 등 절의 성격이 많이 바뀌었지만, 본래는 금산사, 법주사와 함께 미륵불을 모시는 법상종의 3대 사찰이었다는 기록이 이를 증언해준다.

3. 헌덕왕(809∼825년 재위)의 아들인 심지(心地)는 숙부인 흥덕왕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승려가 되었다. 동화사를 창건한 심지대사는 직접 정을 들고 사찰 입구 봉황문 옆 절벽[崖]에 앉은[坐] 모양의 불상(像)을 새겼다[磨]고 한다. 그것이 보물 243호인 ‘대구 동화사 마애(磨崖)여래좌상(坐像)’이다.

▲ 대구 동화사 마애(磨崖)여래좌상(坐像)

4. 세계에서 가장 큰 불상인 동화사의 ‘남북통일발원약사여래석조대불’- 약칭 ‘통일대불’은 높이가 무려 30m, 둘레가 16.5m에 이른다. 1992년 11월 27일에 완공되었다.

▲동화사 통일대불

5. 팔공산에는 국보도 ‘있다!’ ‘군위 삼존석굴’과 ‘영천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이다. 군위 삼존석굴은 가산산성 뒤편 한티재 너머 군위군 부계면에, 거조암 영산전은 은해사 뒤편 산 너머 영천시 청통면 신원리에 있다.

▲군위 삼존불


 

정만진(소설가) daeguedu@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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