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포털의 메인뉴스나 신문의 사회면에 [긴급], [단독], [속보]라는 앞머리가 붙으면 클릭하거나 들춰보는 것이 너무나 무섭습니다. 힘 있는 자가 그 힘을 무기로, 상대적으로 힘없는 사람을 짓누르는 행위인 폭력. 이러한 폭력은 이제 일상화가 되었습니다. 신문지상은 그 폭력 크기가 얼마나 커질 수 있는가를 경쟁하듯 무서운 이야기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특히 근래에는 나주 아동 성폭력에 대한 기사가 신문 일면을 장식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나주 아동 성폭력 사건은 피의자의 얼굴 및 주변 사람 신변공개, 물리적 거세, 사형 등 다양한 논쟁거리를 끌어내며 신문의 사회면뿐만 아니라 정치면에서도 뜨겁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이런 논쟁에 부딪히면 나는 늘 피의자의 얼굴 및 주변사람 신변공개를 반대한다 하고 물리적 거세는 미친 짓이라고 하며 사형제도는 실제 범죄의 예방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을 하고 글을 담으면서도 나 스스로 가장 고민이 되는 것은 나 역시 온전히 내 말에 동의하는지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글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폭력의 주체와 행위를 그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아니라 폭력을 저지른 한 객체에만 돌린다면, 이 사회에서 썩어버린 객체를 골라내기 전에 썩어가는 객체들이 더 많아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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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힘 있는 자가 그 힘을 무기로 상대적으로 힘이 없는 사람을 짓누루는 행위인 폭력, 이러한 폭력은 이제 일상화가 되었습니다. [출처;미디어충청] | | |
나는 폭력을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그 힘으로 짓누르고, 힘들게 하고, 빼앗고, 괴롭히는 것이라 정의하고 싶습니다. 그 힘은 자본이 될 수도 있고, 물리적 힘일 수 도 있고, 성인과 비성인간의 신체 발달에 따른 물리력일 수 도 있습니다. 또한 장애인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상황이 만들어 내는 힘의 차이일 수 도 있습니다.
이러한 폭력은 참으로 잘못된 것이고,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러한 폭력이 너무 일상화되어 있고, 일정 부분은 이것들이 경쟁이라는 단어로 미화되며 학습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학교 내의 경쟁이 심해지면 학교에서는 힘없고, 성적이 낮은 급우를 괴롭히는 것이 일종의 놀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자본이 있는 사람은 법적 한계를 넘어서서 자본이 없는 사람을 힘들게 하고, 자본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자본을 가진 사람이 주는 만큼만 누려야 한다는 한계를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법으로 구분되는 성인이라는 집단은 비성인 집단의 행동양태를 그저 나이로만 규정하고 통제하면서도, 스스로 행위의 반성보다는 비성숙한 비성인의 이성을 탓하기에 바쁩니다. 비장애인은 장애인의 삶에서 자연스러운 외침이 스스로의 편의를 방해한다고 지적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들의 최소한의 생존과 삶의 권리마저 무시하며 다수와 다른 몸을 가진 그/녀 들의 삶의 무게 정도로만 치부해 버립니다
이러한 폭력의 공간에서 우리가 ‘괴물’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탄생 했습니다. 하지만 그 ‘괴물’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폭력이 일반화되고, 그렇지 않으면 낙오자가 되어버리는 이 세상에서 그 폭력이 다른 사람보다 과잉되어 버린 불량품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불량품’들을 우리와는 다른 ‘괴물’로 부르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으며, 또 다른 폭력으로 이 ‘괴물’들을 제거하여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불편한 이야기에 스스로 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성폭력. 절대 있어서도 안 되며, 용서할 수 없는 나쁜 짓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사회적 아픔을 걷어내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폭력을 만들어 냄으로써 폭력의 주체를 제거하는 방식은 절대 사회를 바꿀 수 없고, 사회가 바뀌지 않으면 사회의 불량품은 언제든 생산 될 수 있다는 사실부터 우리는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대응은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많은 개방성, 더 많은 인간애입니다. 원주민성이 절대 아닙니다. 만약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증오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우리 모두가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랑은 얼마나 클지 상상해 보세요” - 2011년 우토야섬 총기난사 사건 추도식 스톨텐베르그 노르웨이 총리 연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