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개인에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 상태라고 할 수 있겠지요. 개인에게 자유를 빼앗는 것은 인간의 권리를 파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노예제도를 가장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제도라고 하는 이유는 그들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이 자유라는 것이 경제적인 영역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른바 자유주의에 입각해서 확립된 시장경제체제 속에서 자유는 경우에 따라서는 오직 굶어 죽을 자유만을 극대화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체제 속에서는 굶어 죽는 것도 개인이 자신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선택한 것이 됩니다. 만약 굶어 죽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는 길을 선택했다면 천하의 부를 다 긁어모을 수 있을 건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이라는 거지요. 그러므로 국가나 사회는 가난이나 굶주림의 문제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에 대한 강력한 반론이 있습니다. 엥겔스(Engels)는 <영국 노동 계급의 형편(The Condition of Working Class in England)>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한 개인이 다른 이에게 육체적인 위해(危害)를 가하여 그로 인해 결국 공격받은 사람이 죽게 되면, 그것은 고살죄(故殺罪, manslaughter)가 된다. 반면에 공격자가 자신의 폭행이 치명적이라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면 그것은 모살죄(謀殺罪, murder)가 된다. 만약 사회가 수백의 노동자들이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요절할 수밖에 없는 그 같은 처지에 처하게 한다면, 이것 또한 모살이 된다. 그들의 죽음은 찔러 죽이는 것이나 쏘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폭력에 의한 것이다. …만약 수천의 노동자가 생활필수품을 가지지 못한다면, 혹은 그들이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 속에 떼밀려진다면, 이것 또한 모살이 된다. 만약 사회가 이 같은 상황이 계속되도록 내버려둔다면 불가피하게 수천의 노동자가 희생되리라는 것을 완벽하게 잘 알고 있다면, 이것 또한 모살이 된다. 이 같은 종류의 모살도 개인적으로 행해진 모살과 마찬가지로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다. 얼핏 보면, 그것은 전혀 모살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희생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어떠한 개별적인 가해자에게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 책임이 있으나 아무에게도 책임이 없다. 왜냐하면, 희생자는 마치 자연적인 원인으로 죽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만약 노동자가 죽는다면, 비록 어떤 이들은 사회가 희생자가 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를 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기는 하겠지만, 아무도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사회에 지울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점에서 모살과 같다.
맹자는 <맹자(孟子)> 「양혜왕 상편(梁惠王上篇)」에서 사람을 죽이는 데 몽둥이로 죽이는 것이 칼로 죽이는 것과 정치로 죽이는 것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굶는 것을 보고 굶어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나, 정치를 잘못 해서 백성을 굶겨 죽이는 것이나, 패권(覇權)을 차지하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나 사람이 죽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차이가 없다는 것이지요.
정치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政者正也)
공자는 정치는 바르게 되도록 하는 것,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나라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서 묻지요. 공자는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부모는 부모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사회 구성원들은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올바로 수행해야 올바른 세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정치의 요체는 이름을 바르게 하는 것, 즉 정명(正名)에 있다고 했던 겁니다. 이름에 걸맞은 행위, 명(名)과 실(實)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공자는 제자 자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을 통해서 올바른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고, 올바른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떤 일도 이루어낼 수 없으며...... 형벌이 올바로 시행되지 않게 되고, 형벌이 올바로 시행되지 않게 되면 백성은 수족을 둘 바가 없게 된다.”
공자의 뒤를 이은 맹자 또한 <이루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질지 못한 사람이 높은 자리에 있으면 이는 그의 악을 여러 사람에게 뿌리는 것이다. 위에 있는 임금은 도로써 하늘의 뜻을 헤아리려 하지 않고, 아래에 있는 백성은 법도를 지키는 일을 하지 않고, 조정에서는 도를 믿지 않고, 장인은 척도를 믿지 않고, 군자는 의리를 어기고, 소인은 형벌을 어기는데 나라가 존속되는 것은 요행일 뿐이다.”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을 자신의 이익 추구를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사회는 더 이상 사람이 사는 사회라고 할 수 없를 겁니다. 온갖 범죄가 난무하는 생지옥이 되겠지요. 어쩌면 우리도 이러한 상황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위정자라는 자들은 자신이 가진 권력을 사회적 모순을 바로잡는 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추구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기업하는 사람들은 노동자를 오직 착취의 수단으로만 생각합니다. 지식을 가진 자들은 또 자신의 지식을 가지고 대중들의 눈과 귀를 흐리게 함으로써 스스로 권력과 자본의 노예가 되어 그들이 던져주는 음식물 찌꺼기에 탐닉합니다. 맹자는 이런 말을 하지요.
제나라 사람 가운데 아내 하나와 첩 하나를 데리고 사는 자가 있었다. 남편이 나가면 반드시 술과 고기를 물리도록 먹고 나서 돌아오곤 해서 더불어 음식을 먹은 사람에 대해서 물으면 모두 돈 많고 벼슬 높은 사람이었다. 아내가 첩에게 “남편이 나가기만 하면 반드시 술과 음식을 물리도록 먹고 돌아오는데 더불어 마시고 먹은 사람들에 대해서 물으면 모두 돈 많고 벼슬 높은 사람들이지만, 여태껏 높은 사람이 찾아온 적이 없네. 내가 남편이 가는 곳을 몰래 살펴보려고 하네.” 하고는 일찌감치 일어나 남편이 가는 곳을 몰래 따라갔지만, 나라 안을 다 돌아다녀도 서서 함께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마침내 동쪽 성곽 밖의 공동묘지에서 제사지내는 사람에게 가서 먹고 남은 것을 구걸하고, 부족하면 또 두리번거리다가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가 물리도록 배를 채우는 방법이었다. 아내가 돌아와 첩에게 말하기를 “남편은 평생 우러러볼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 이 꼴일세.”하고, 첩과 함께 남편을 나무라면서 뜰 가운데 서서 울고 있었으나, 남편은 그것도 모르고 밖에서 으스대며 들어와 아내와 첩에게 뽐냈던 것이다. 군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람들이 부귀와 영달을 구하는 자 치고 그의 아내와 첩이 부끄러워하지 않고, 서로 울지 않는 것이 극히 드물다.
문제는 분배다
공자는 <자로편>에서 “내가 듣기에 나라를 다스리고 집안을 다스리는 자는 가난한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균등하지 못한 것을 걱정해야 하며, 적은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편안하지 못한 것을 걱정해야 한다. 균등하게 분배되면 가난이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나아가 분배를 균등하게 하려면 올바른 조세 제도를 확립해야 한다고 했지요. <선진편>에서 “계씨가 주공보다 부유했다. 그런데 공자의 제자 염구는 계씨를 위해 세금을 더 거둬 재산을 불려 줬다. 공자가 말하기를, 그는 우리의 무리가 아니다. 북을 쳐 공격하는 것이 옳다.”고 했습니다.
이와 달리 유약이라는 제자는 공자의 균등 이념을 실제 정치에서 실현하고 있습니다. <안연편>에는 이런 기사가 있습니다. “애공이 유약에게 물었다. 금년은 기근으로 재용이 부족하다. 어떻게 해야겠소. 유약이 대답했다. 어째서 10분의 1 제도인 철법(徹法)을 사용하지 않습니까?” 이에 대해 애공이 “10분의 2의 세금을 받아도 오히려 모자라는데 어떻게 철법을 쓸 수 있다는 말이오?” 이에 유약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백성이 넉넉하다면 임금께서는 누구와 더불어 부족하다고 할 수 있겠으며, 백성이 넉넉하지 못하다면 임금께서는 누구와 함께 넉넉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낙수효과라는 말을 가끔 듣습니다. 기업이 비대해지면 노동자들에게도 부스러기가 떨어진다는 의미가 될 겁니다. 기업은 최대의 이익 추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비대해 지면 노동자도 혜택을 입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물고기를 잡으려고 나무에 올라가라는 거나 다를 바 없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용어 자체가 매우 혐오스럽다는 겁니다. 사회적인 부의 대부분은 노동자의 노동을 통해서 생산됩니다. 기업이 비대해지는 건 그만큼 노동자의 몫을 저들이 착취했다는 걸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따라서 노동자가 부에 대해 분배를 요구하는 것은 그들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그럼에도 정당한 분배를 유예하고 낙수효과라는 말로 현실을 호도하는 것은 노동자를 자본가의 부의 축적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려는 비열한 의도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른바 기업프랜드리라는 괴이한 정책의 결과만 봐도 낙수효과라는 게 얼마나 허황된 기만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올바른 정치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명(名)과 실(實)이 일치하도록 이끌어 나가는 거지요. 재물이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분배될 수 있도록 하는 것 또한 임금으로서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이겠지요. 그럼에도 이러한 역할을 소홀히 한다면 천하의 안정은 생각할 수 없을 겁니다. 율곡 이이 선생은 <만언봉사>에서 황건이나 적미와 같은 도적도 천성이 악해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땅이라는 땅은 모두 권세가들이 차지하고 백성들은 송곳 꽂을 땅조차 없으니 도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거지요.
생계형 범죄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자살률은 OECD국가 중 가장 높다고 하지요. 잘못된 정치는 그 자체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흉기입니다. 몽둥이로 때려죽이거나 칼로 찔러 죽이거나 정치 잘못해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거나 죽는다는 것에서는 동일합니다.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가 있습니다. 내가 건져주지 않으면 그 아이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이 확실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물에 밀어 넣거나 그냥 지나가는 행위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도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