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주] 숨어서 보지 말고 소문내면서 만화 보자. 보면서 멘붕해도 괜찮아. 울어도 괜찮아. 심오해도 괜찮아. 세미나 해도 좋아. 만화책도 책인걸~ 멘.붕.독.서
<몹쓸년>, 한 권짜리 만화집. 이 책이 어떤 내용인지는 목차가 말해준다.
내 친구의 결혼식
마지막 순간, 유한양행
소풍
이기적이고 속 좁은 트라이앵글
몹쓸년
여자 친구들
어머니의 텃밭
아빠를 위하여
이대로 팔려 갈 수 없다
마지막 장의 제목이 가슴을 콕 찌르는 사람들 분명 있을게다. 이 책을 쓴 작가 김성희 씨는 “내가 내 엄마에게 몹쓸년이었고, 스스로에게 몹쓸년이었던 기억들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결혼하지 않고, ‘굶어죽기 좋다’고 말해지는 만화가로서 작가는 서른 살을 흔들거리는 시선으로 맞이한다.
서른. 소위 계란 한 판이라 불리는 그 나이를 나는 두근두근 뛰는 마음으로 시작했었다. 이런 느낌이었다. 20대까지는 내가 누구의 딸로 태어났는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부모가 날 어떻게 키웠는지 등 내가 디디고 서 있는 곳이 어디인가에 따라 삶이 이리저리 휘둘린 반면, 서른부터는 정말 온전히 나의 삶으로 느껴졌다. 내가 살아내고 내가 책임져야하는 나의 삶. 그것은 하나의 희열이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질 권리가 있지만 그것이 허락되지 않는 세상이니까. 나 역시도 그 그늘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으니까. 드디어 내 삶이 시작되는구나! 하는, 마치 처음으로 자취방을 얻어 독립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거운 나이가 서른이었다. 당시 난 어떤 이에게 “내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무거운 짐을 계속 만들어가는 느낌이야. 내 손으로 새끼줄을 엮어서 등에 계속 얹는 느낌이랄까?”라고 말했다. 어제 내가 살아온 삶이 오늘 내가 책임져야 할 몫이고, 오늘 살아낸 하루가 내일 살아갈 미래의 나를 제한하는... 하루하루를 내가 선택하고 내가 책임지고 매듭짓는다는 것은 무거운 일임이 틀림없었다. 그런 나이 서른을 작가는 “현실과 꿈의 경계에 선 우리들의 이야기”라고 표현했다.
만화 <몹쓸년>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자 작가의 이야기다. 작가는 자신의 일상을 흔들거리는 대로 그려내고 있다. 부모는 나이 들어가고,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씩 결혼을 하고 친구들은 아기 엄마가 되어서 말도 잘 통하지 않는다. 또, 한편으로는 결혼-임신-출산이라는 코스를 잘 밟아가는 친구가 나보다 우월한 것 같다고 느껴지기도 하며 문득문득 불안해지는 나날을 살아간다. 만화 같은 거 그려서 어떻게 먹고 사느냐고 구박하다가도 끝내는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게 행복이라며 행복하게 살라고 응원해주는 오빠한테 눈물이 왈칵 나기도 한다.
내가 숨 쉬고 잘 살기 위해서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뿌리치고 ‘몹쓸년’이 되어야 할 거 같은데 선뜻 잘라버리기는 힘든 그 끈들.
“딸이어서 힘들었다. 딸이 아닌 ‘사람으로서의’ 생각이 앞섰기에 불편했다”라는 작가의 말은 우리 모두가 ‘사람으로서’ 살려면 ‘나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지금 가진 것들은 내 부모의 삶이 그리고 희생이 만들어준 것이며 지금도 계속 무언가를 만들어주고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선의’를 거부하고 ‘내가 알아서’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건 몹쓸년이고 나쁜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서른셋인데도 다행히 집에서 결혼하라는 압박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딱 한 번, 엄마가 내가 결혼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그녀는 쉬고 싶다고 말했다. 계속 신경 쓰고 챙겨야 하는 결혼하지 않은 자식은 어떤 의미로는 그녀의 삶에 짐이었고, 내가 결혼을 해 누군가에게 의탁해야만 그 짐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그녀에게 굉장히 미안했다. 내가 평생 그녀를 자유롭게 해주지 못하겠구나는 생각이 들어 정말, 정말 미안했다.
하지만 그런 미안함으로 “팔려 갈 순 없다”. 몹쓸년에 나오는 어머니는 딸에게 옷을 사줄 테니 선보러 나가라고 애틋하게 말한다. 하지만 그런 것에 팔려 갈 수 없다. 우리는 팔려갈 수 없다. 그것이 돈이든 부모의 사랑이든 힘들어지는 삶의 순간을 잠시 잠깐 회피할 수 있는 마취제이든 간에 우리는 팔려갈 수 없다.
<몹쓸년>의 주인공은 그래서 훌쩍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돌아온다. 여행에서 그녀는 조금 털어내고 조금 가벼워지고 조금 단단해지고 조금 여유가 생겼다. 혼자일까 두려워 결혼해야 할 것 같은 압박에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되진 않았다. 결혼을 위한 결혼을 고민하지는 않게 되었다. 그것이 꼭 만나야 할 사랑이라면 그 사랑을 기다리고, 그것이 내 삶이라면 결코 포기하지 않고 내 삶을 멈추지 않고 살아내기로 한다. 그렇게 아무 곳에도 팔리지 않고 몹쓸년으로 나쁜년으로 살아가기로 한다. 독하게.
독기가 필요하신 분, 금방금방 넘어가는 책이고 한권짜리이니 한번 읽어보시라. 엔딩은 내가 가장 공감했던 장면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