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장(山莊)
-편운제(片雲齊)
전 봉건
저만치
저수지의 물들은
맨살에
햇살을 받고 있었다.
과일나무 밭에서는
소년이 삽질을 하면서
과일나무 부리에
햇살을 묻어주고 있었다.
뜰의
햇살을
헤치고
나타난
삽살개는
새끼를 배고 있었다.
빛은 그저 빛이다. 스스로에 갇힌, 스스로에게로 진동하는 입자 혹은 파동으로서의 빛. 그 빛이 우리에게 빛이 되는 순간은 무엇에게 굴절되면서 스스로를 반성하는 오직 그 순간이다. 그러므로 “빛/ 물/ 빛과 물의 거리”는 멀다. 그러나 그 먼 거리,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그 거리에서 시는 있다. 그 거리에서 시는 부풀어 오른다. 시는 “빛과 물의 말”(전봉건. <아라베스크>)이다.
그러나 빛은 물을 밝혀주지 않는다. 물이 밝아지는 것은 물들이 맨살에 햇살을 받아들이면서이다. 빛의 무한 거리를 물이 꺾어 주면서이다. 그리하여 빛은 무한에서 유한에로의 꺾임을 통해 우리에게 반짝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물들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그 무한을 유한의 몸으로 견딤으로써 빛을 드러내는 것이다. 무한은 유한에 종속된다. 이제 무한의 빛은 유한한 우리의 것이 된다.
우리의 것이 된 빛은 사물들과 섞이며 각자의 역량에 맞는 힘들을 분배한다. 그 분배의 차이로 각각의 사물들은 각각의 빛깔들로 분리된다. 그러나 빛은 빛 스스로 그 역량들을 분배하지 못한다. 빛은 의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역량의 분배는 사물들 스스로의 욕구이다. 다만 그 욕구의 기계적 구획과 이데올로기적 포획으로 하여 역량이 가진 분산과 산란의 특이적 포착은 시인과 화가의 몫이 된다. 과학자들은 경향성만을 일반화할 뿐이다.
그러나 시인과 화가들도 가끔씩 사물들의 수많은 그 욕구를 견딜 수 없을 때 빛을 흙 속에 묻고, 빛이 수많은 흙 속의 욕구의 실금들을 따라 흘러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는 없다. 응시는 시인의 고통의 그릇이지만 그 그릇 속에서 무엇인가가 변하고 있다. 빛이 과일로 변형된다는 것, 상투적이긴 하지만 그런대로 견딜 만은 하다.
그런데 시인은 그 상투성을 이겨내었다. 햇살의 뜰에 나타난 것은, 그냥 나타난 것이 아니라 헤치고 나타난 것은, 삽살개이고 게다가 그 개는 새끼를 배고 있다. 빛은 보이지 않지만 그 빛은 무한의 변환을 거쳐 하나의 생명으로 드러난 것이다. 무한의 변환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시는 이야기 해 주고 있지 않지만 시는 우리에게 상상으로 부풀어 오르게 하고, 우리는 그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연 사이 산장(山莊)에서 오래 동안 서 있게 된다. 푸른 하늘 외로이 떠 있는 조각구름(片雲)처럼. 그리고 시인의 입술은 빛과 물의 말로 젖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