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냉전적 진영 갈등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서독 주도의 흡수 통일 이후 장벽에 가려있던 동독 사회주의의 온갖 치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동독을 대표하는 작가 크리스타 볼프(Christa Wolf)의 슈타지(Stasi, 동독 안기부) 부역 스캔들은 동독 사회의 일상적 감시 및 밀고 시스템의 실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과잉 해석되면서 자연스럽게 서독 자본주의의 절대적 우월성을 훌륭하게 반증하는 징후의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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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범적인 슈타지 요원 게르트 비즐러. “그럼 우리 정부가 무고한 인민을 멋대로 체포한다는 뜻입니까? 그런 생각만으로도 구금 사유입니다”라는 진술은 그의 인물됨을 잘 보여준다. | | |
도너스마르크 감독의 <타인의 삶>(The Lives of Others)은 모범적인 사회주의 국가였던 동독 안기부(정식 명칭은 국가안전기구)의 모범적인 요원 게르트 비즐러를 통해 동독 사회의 철저한 감시체제를 보여준다. 피도 눈물도 없을 듯한 외모의 비즐러는 냉철한 정치적 신념으로 무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감시와 도청 전문가이고 어느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심문 실력을 통해 정보국 교수로 자리 잡은 엘리트 슈타지 요원이다.
“아무 것도 안 했다”고 주장하는 용의자에게 “그럼 우리 정부가 무고한 인민을 멋대로 체포한다는 뜻입니까? 그런 생각만으로도 구금 사유입니다”라는 진술은 그의 인물됨을 잘 보여준다. 물론 도너스마르크 감독의 의도는 슈타지의 만행 폭로가 아니다. <타인의 삶>은 게오르그 드라이만이라는 한 극작가를 통해 비즐러라는 인물이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친구의 주선으로 극장을 찾은 비즐러는 “서방에서 읽히는 공산권 문인 중 유일하게 체제에 동의하는 작가”인 드라이만과 유명한 여배우 크리스타-마리아 질란트 커플에게서 수상한 냄새를 맡고 감시와 도청에 들어간다. 그런데 비즐러는 이 작전을 진행하면서 그것의 원래 동기가 국가안보가 아니라 크리스타-마리아를 취하고자 한 문화부 장관 헴프의 도착적 욕망 때문이었음을 알게 된다. 24시간의 감시를 통해 비즐러는 두 남녀의 열정적인 사랑과 예술가적 진실에 감염되고 공감해 간다. 이러한 훔쳐보기와 감정이입은 이 영화의 핵심적인 테마이려니와, 결국 얼어붙은 사회를 녹이는 것은 예술이라는 감독의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드라이만은 사실 이상주의적 사회주의자다. 처음 그는 동독 사회의 억압적인 실상을 직접 경험하면서도 직접적으로 대결하려하지 않는다. 그는 무제한적인 예술적 자유를 요구하고, 현실 정치의 논리로 예술을 제단하지 말 것을 주장하는 인물이지만 이 체제를 인정한다. ‘모범적인’ 사회주의자 비즐러는 이러한 드라이만의 태도에서 ‘반동의’ 징후를 직감하지만 그의 사람됨과 예술에 빠져든다. 드라이만의 삶과 사랑 자체가 그에게는 한 편의 연극인 셈인데, 그렇게 보면 도청과 감시가 진행되는 어두운 다락방은 캄캄한 극장의 은유이다. 오랫동안 창작금지를 당한 스승과도 같은 노작가의 자살, 아내에 대한 헴프 장관의 강간 등에 대한 드라이만의 좌절감이 그의 심란한 피아노 연주를 통해 전해올 때, 이를 엿듣는 비즐러의 차가운 얼굴을 가르는 눈물 한 줄기는 <타인의 삶>의 주제를 압축적이고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드라이만은 드디어 76년부터 그 조사와 발표가 중단된 동독의 과도한 자살률에 관한 기사를 서방언론에 투고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동료 작가들과 서방 언론인 등과 비밀스러운 회합과 토론을 거쳐 가다듬은 원고를 통해 다양한 자살들의 원인이 결국 동독 당국의 억압적인 정책에 있음을 폭로한다. 비즐러는 이러한 음모를 알면서도 동독 건국 40주년 기념 연극의 창작과정으로 그것을 미화하고 숨겨준다. 이것이 서방 언론에 보도되자 동독 당국은 조사에 들어가고 슈타지는 드라이만의 아내를 비밀리에 체포하여 심문 전문가 비즐러에게 조사를 맡긴다. 비즐러는 교묘하고도 훌륭한 방법으로 드라이만의 소행이었음을 알아내고 그 증거의 소재를 밝혀낸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 증거를 제거하고 드라이만을 보호하는 것도 비즐러다. 결국 슈타지와 헴프 장관의 음모는 수포로 돌아가고, 비즐러는 우편검열이라는 한직으로 쫓겨난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통일 이후 드라이만은 비즐러의 보호 덕분에 자신이 무사할 수 있었음을 알게 되고 그에게 자신의 책을 헌정한다. 정신적 멘토(Mentor)였던 노작가의 말처럼 <타인의 삶>은 희망과 양심을 붙들려는 예술가와 그에 감화된 감시자의 정신적 연대의 기록이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