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수나로 연속기고] (1) 가정의 달, 새로운 공동체를 상상한다

가족공동체의 권력관계 속에 청소년의 자유는 없다
뉴스일자: 2012년05월30일 11시40분

[편집자 주] 학교폭력이 전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 가운데 학생인권 문제도 뜨겁다. 교권의 하락, 학교붕괴 등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학생(or 청소년)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은 하늘에 별따기다. 저마다 대안을 내어놓지만 청소년 당사자의 목소리가 고려되기 보다는 기존 질서를 유지하기 급급하다. <뉴스민>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대구지부 회원들의 연속기고를 통해 이들의 목소리를 담고자 한다. 연재는 2주 간격으로 총 8회 이어진다

감사와 사랑이 넘치는 가정의 달

올해 5월도 흔히 말하는 가정의 달로서 사람들이 평소에 소홀했던 가족을 돌아보며 가정의 소중함과 가족의 의미를 깨닫게끔 하는데 한몫했다. 가정의 달을 대표하는 어린이날에는 어린이들이 부모의 손을 잡고 나들이를 나섰다. 어린이가 아닌 모든 사람은 어린이들이 늘 밝은 마음으로 살아가며 장차 세계에 우뚝 서게 될 큰 꿈을 가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많은 기업과 단체들은 여러 행사로 온 가족이 한마음이 되어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고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선사했다. 각종 어린이날 마케팅이 부모한테 어린이날 선물을 사라고 부추기기도 하지만 부모에게 있어 소중한 아이에게 쓰는 돈은 아깝지 않다.

가정의 달을 대표하는 또 다른 날인 어버이날에는 모든 자녀가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의 정성과 사랑 가득한 크나큰 마음을 깊이 느끼고 이에 보답하여 효도하고자 한다. 어버이날조차 부모를 챙기지 못한 불효자식이 될 수 없기에 자녀들은 어버이날 선물로 카네이션이나 현금, 상품권, 또는 비싼 물건을 선물한다. 고령의 부모는 자녀의 효도 의지에도 바쁜 삶을 살아가는 자녀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말을 아끼는 미덕을 보여주기도 한다.

가족의 화목과 유대를 상징하는 가정의 달 5월. 언뜻 봐도 지나치게 소비 중심적인이다. 우리가 더 눈 여겨봐야 할 문제는 가족을 가장 우월한 삶의 형태라고 보는 시각이다. 그리고 어린이, 자녀, 부모 등 각 가족 구성원 집단의 성격을 단정하고 그에 따라 다른 역할을 주는 것이다.

사회가 말하는 가족

현대사회에서 가족이란 일반적으로 이성애 핵가족을 지칭한다. 이성애 핵가족, 즉 여성과 남성이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아 가족을 이룰 때 사회는 이를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공동체로 보며, 각 가족 구성원에게 다른 역할을 부여한다. 여성친권자는 가사노동과 자녀양육을 맡으며 감성적으로 가족 공동체를 지키는 역할을 하고, 남성친권자는 임금노동과 함께 가족 공동체를 대표하는 가장을 맡아 공동체 내의 중요한 사항을 결정하고 다른 가족 구성원을 이끌어 나간다. 그리고 그들의 자녀는 친권자들을 존경하며, 그들에게서 받은 은혜를 지속적으로 갚는 역할을 맡는다.

▲2006년 개봉한 영화<가족의 탄생>은 '정상가족'에서 벗어난 형태의 공동체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가족의 형태와 구성원들의 역할은 사회적 규정 속에 신성함과 전통성을 가진다. 다른 형태의 공동체가 있더라도 사회는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에게 정상적인 가족 구성원이 맡는 역할을 대입시켜 정상적인 가족으로 끌어오려고 한다. 그래서 청소년과 청소년이 아닌 사람의 관계가 자녀와 친권자의 관계처럼 나타나고,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서도 아내와 남편의 관계로 드러난다. 지속적인 공동체가 아닌 단기적이고 순간적인 관계에서도 정상 가족의 역할 규정은 똑같이 투영된다. 이로써 사회 전체가 ‘정상 가족화’ 되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이토록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은 가족이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의 공동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는 곧 ‘가족 이데올로기’라는 하나의 거대한 인식을 만들어낸다. 가족 이데올로기에서는 인간이 처음으로 삶을 얻었을 때 자연스럽게 접하는 공동체가 가족이며, 경제적 자립을 할 때(또 다른 가족을 형성할 때)까지 최초의 가족 공동체 안에서 생활하게 된다. 가족 공동체는 인간에게 필요한 지원을 제공해주는 유일한 주체이기 때문에 그만큼 특별하며, 이는 역사를 통틀어서도 유래 깊은 전통성을 가진다고 가족 이데올로기는 주장한다.

하지만 인간이 자립하는데 필요한 지원을 제공해야 할 주체는 가족 이전에 그 사람이 속한 사회여야 한다. 인간의 삶 속에서 갖춰진 제도와 규범은 모두 사회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는 생존에 필요한 지원을 제공할 책임을 가족 공동체에게 떠넘기고 있는 셈이다. 사회는 청소년에 대한 지원이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친권자의 은혜라고 주장하며, 자연스럽게 노인에 대한 지원 역시 친권자의 은혜를 갚아야 할 자녀의 몫으로 만든다.

또한, 가족만이 사회를 구성하는 유일한 공동체라는 시각은 다른 형태의 공동체나 개인의 존재를 은폐한다. 더불어 경제적 자립이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지원도 힘들게 한다. 그러나 가족 공동체가 아니더라도 생활 형태는 얼마든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으며, 이때 필요한 지원은 사회가 제공해야 한다.

가족이 아닌 다른 생활 형태가 존재할 가능성은 가족 공동체가 가진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암시하기도 한다. 가족 공동체가 완벽하고 유일무이한 삶의 형태일 수 없으므로 자연히 다른 형태의 삶이 나타나는데, 가족 공동체를 정당화하는 사회의 시각에 문제가 있는가 하면 가족 공동체 안에도 문제점은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문제점이 바로 가족 공동체 내부의 권력관계이다.

가족 안의 권력관계

가족 안의 권력관계는 앞서 말한 가족 구성원의 역할 규정에서부터 생겨난다. 특히 청소년의 경우, 자녀인 청소년은 친권자로부터 생활 전반과 생존에 필요한 경제적·물적·정신적 지원을 받으면서 이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친권자에 대한 존경심을 태도나 표현으로 드러내야 하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친권자의 지원을 하늘과도 같은 은혜로 만들어 청소년으로 하여금 보답에 대한 의무감을, 나아가 더 많은 지원을 요구하는 데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친권자 또한 자신이 자녀에게서 경제적·물적·정신적 보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당연시하고, 만족할 만한 수준의 보답이 되돌아오지 않으면 실망감을 느끼며 청소년에게 직접적으로 보답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서 청소년이 친권자에게 복종을 해야 하는 권력관계가 나타나는 것이다.

가족 공동체에서 생기는 권력구조의 문제점을 알려면 억압당하는 위치의 입장으로 바라봐야 한다. 청소년이 친권자를 따르는 구체적인 예로는 친권자 혹은 청소년이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부터 생활습관을 고치는 것, 생각이나 신념을 바꾸는 것 등이 있다.

친권자는 청소년이 학습노동이나 자기계발에 적극적으로 임할 것을 명령하고 이를 보조하거나, 진로 결정에 개입하고, 청소년에게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힘든 일도 참고 이겨내라고 지시할 때도 있다. 이로 인해 청소년은 자신이 정말로 원했던 일, 자신이 느끼고 생각한 바, 자신의 솔직한 감정 등을 부정하게 된다. 자신을 부정한 채 다른 사람이 강요하는 대로 사고하고 행동한다면, 그것이 바로 권력관계이고 복종이다. 가족 공동체 안의 권력구조는 청소년이 스스로 자신을 판단하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할 자유를 빼앗는다.

친권자가 청소년에게 특정한 사고와 행동을 명령하는 것은 청소년을 통해 차별적인 사회구조를 계속 이어가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친권자는 현재 유지되고 있는 사회구조에 문제가 없음을 청소년이 인식하게 하고 청소년의 생각과 행동을 사회구조에 맞춤으로써 결과적으로 사회구조를 유지시킨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회구조 때문에 청소년은 차별과 억압을 받고 있고, 사회구조에서 소외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에 문제를 제기하고 구조를 바꿔나가야 마땅하다. 사회구조가 그대로 유지되어서 이득을 보는 것은 권력관계에서 우위를 가진 계층의 사람들뿐이다.

가족 공동체에서 청소년을 향한 억압의 원천에는 청소년이 미성숙하며 순수한 존재이고, 청소년에 대한 억압은 가족 간의 사랑과 정이라는 왜곡된 관점이 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청소년은 사회의 여러 가지 부정적인 면으로부터 지켜져야 하기 때문에 친권자의 보호를 받아야 하고, 친권자가 청소년의 행동과 표현을 제한하는 것은 억압이 아니라 사랑이요 정이다.

이렇듯 청소년을 바라보는 인식을 차별적으로 만드는 데는 가족 이데올로기가 관여하는 바가 크고, 이러한 관점이 가족 공동체가 가진 권력관계를 은폐하여 그것에 저항하기를 어렵게 만든다. 아무리 사랑과 정으로 뭉치고 자녀에게 관대한 가족 공동체라 하더라도 자녀와 친권자라는 위치가 나뉘어 있는 이상 권력과 차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가족 개념 자체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청소년은 비로소 자유를 되찾을 수 있다.

새로운 공동체를 상상하며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 공동체는 오로지 가족밖에 없다는 인식이 여전히 지배적이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사회 구성원을 작은 단위의 공동체로 나눈다면 그 경우의 수는 무수히 많다. 가족 공동체가 가장 보편적이고 바람직한 삶의 형태가 된 것은 가족 공동체가 정말로 어떤 신성함이나 정당성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사회가 다른 형태의 삶이 존재할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고 사회적 제도 등으로 이를 뒷받침해주지 않아서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모든 형태의 공동체와 개인에 대한 사회의 지원이 있어야 하며, 동시에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가족주의를 해체하는 움직임 역시 필요하다.

공동체란 친밀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뜻을 같이 하는 모임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억압도, 권력관계도 있을 수 없다. 권력이 개입하는 인간관계는 각자가 동등한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거나 어떤 행동을 하는데 제약을 받는 사람이 나타난다. 폭력이나 차별에 대한 제약이 아닌, 정당한 이유 없는 제약은 그 자체가 곧 폭력과 차별이 된다. 이런 제약이 존재하는 인간관계로는 결코 친밀한 모임을 만들 수 없다.

진정으로 친밀한 관계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는 관계라고 생각한다. 어떤 외적인 조건도 고려하지 않고 상대방을 하나의 온전한 개체로서 생각할 수 있는 관계, 서로에게 특정한 표현이나 행동이 제약되지 않는 관계가 친밀한 관계이다. 사회를 이루는 공동체는 그러한 관계가 기반이 되어 맺어져야 한다. ‘나’라는 한 사람의 인간을 온전히 이해해주는 사람, 또 내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이해하고 싶은 사람과 함께 공동체를 만들며 생활하고 싶다는 바람이 어렵지 않게 이뤄질 수 있는 사회를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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