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뉴스일자: 2012년05월02일 13시44분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이마트에서 옷이며 신발, 먹을거리까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소비하는데 사회 변화가 가능할까. 모두가 자본주의적인 교환관계 속에 들어 와 있는데 자본주의를 어떻게 뛰어넘는단 말인가. 이 얘기를 거꾸로 하면 자본주의적인 교환관계가 작동하지 않을 경우 자본주의 초월이 가능하단 말과 같다.

2010년 한국 사회의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960조원이었다. 인구 5천만 중에 2백만명만 자본주의 식으로 살지 않으면 960조에서 38조원이 빠진다. 2백만명이 불가능하다 치고 그 중의 1/100인 2만명만이라도 비자본주의적인 삶을 산다고 치자. 그래도 0.38조원, 380억원이 빠진다. 이 돈으로는 자본주의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없지만 그 규모가 누적되어 간다면 자본주의의 변혁은 가능하다. 자본주의 변혁이 불가능하다면 그 돈을 자본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인구 등 변수야 많고 경제통계에 문외한인 필자의 상상이 완전히 빗나갈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GDP가 증가하고, 무역수지 1조달러를 돌파해 봐야 경제를 독점하는 인간들과 재벌들에게 그 돈이 다 돌아 갈 터이니 GDP 증가를 위해 노동을 팔 이유는 없다.

노동자를 소비자로 만들어 노동자에게 준 임금을 회수하는 전략에 더 이상 말려서도 안 된다. 반발은 많을 듯하다. 스마트폰이 있어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도 사용 가능하고, 그러자면 삼성 것이든 에스케이(SK) 것이든 스마트폰을 소비해야 하지 않느냐고. 하긴, 스마트폰 시대에 피처폰 들고 다니며 화성인 소리 듣는 것도 이상하기는 할 듯하다.
 
상상이야 내 맘이지만 그것이 공상으로 첨벙 빠지지 않는다면 한 번 비자본주의적인 삶을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최저임금을 넘어 생활임금 투쟁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오른 임금은 물건소비, 교육소비에 소진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생활임금 투쟁과 비자본주의적인 삶을 병행해보는 것은 어떨까. 말이야 쉽지만 비자본주의적인 삶의 경영이 어디 말처럼 쉽던가. 필자가 옷 사 입기 싫어하고 신발 사 신기 싫어한다지만 자주 먹는 술은 교환관계 안에 이미 푹 빠져 있지 않던가.

여기서도 반발은 생긴다. 내수가 죽는다거나, 술가게로 자식 키우던 사람들은 어떻게 살라는 것이냐 하는 반발이 생길 법하다. 하지만 내가 내수를 키우는 유효수요 대열에 동참할 이유는 없다. 내수가 살아봐야 자본주의가 심대한 타격을 입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강화될 뿐이라면 내 호주머니와 노동만 털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주머니 털털털 털어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지만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는 안치환의 노래를 듣다 보면 그 인생이란 게 자본이요 국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참에 술을 만들어 노동자들끼리, 사람들끼리 나누어 먹고 그 돈으로 물건의 사용가치에 국한한 삶을 산다면 어떨까? 만일 비자본주의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프랙탈처럼 늘어나 2백만명이 된다면 38조원이라는 로또로도 상상할 수 없는 돈이 우리를 위해서 한국 사회의 변혁을 위해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비자본주의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의 숫자가 눈에 띄지 않을 때, 국가는 눈치를 채지 못하지만 규모가 누적되기 시작하면 이들의 모임을 해체시키려고 할 것이다. 애초에 국가란 것은 이런 모임들을 “해체 모여!” 시킨 것이다. 필자는 그러한 모임을 코뮌이라 부르고자 한다.

막연한 공동체가 아니라 의도된 공동체로서의 코뮌은 한국 사회의 변혁을 가능하게 만드는 토대가 아닐까. 사회 변혁이 가능하려면 사회를 안정화시키는 사회적 재생산 구조가 불가능해져야 한다. 그 구조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실업과 선거다. 실업은 생산현장에서 착취당하지 않는 것이므로 착취보다 나은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사실은 착취보다 더 나쁜 것이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실업예비군을 냉장고에 채워 넣고 필요하면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꺼내 쓰는 경제 구조다. 선거는 노동자들의 정치적 이익에 봉사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강화에 이바지한다.

실업과 선거로 사회를 재생산하는 이 구조가 깨지지 않으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코뮌에서는 임노동자도 실업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강화에 기여하는 선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복지든 사회 운동이든 요구하는 부분을 다 들어준다면 사회 변화는 야기되지 않고 사회는 안정화된다. 사회적 재생산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사회 변혁은 불가능해진다. 그러니 우리 코뮌을 상상하자.

 이득재 편집위원장 (대구가톨릭대 러시아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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