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 안철수와 학생총회, 무엇을 선택할까

”인산인해” 안철수와 ”정족미달” 경북대 학생총회
뉴스일자: 2012년04월08일 21시51분

시장이 사회와 국가의 힘을 넘어섰다. 개인의 ‘먹고 삶’은 전적으로 사회가 아닌 시장에 의존하게 됐다. 여기서 개인의 가치는 시장의 교환가치로 치환된다. 즉 화폐, 경쟁, 효율성, 실용주의 등 기업의 문법을 체화한 개인이 탄생한 것이다. IMF외환위기 이후 시장의 구조적 문제는 자유경쟁이란 미명하에 ‘개인의 무능’으로 돌려졌다. 일정 맞는 말이지만, 개인에 새겨진 기업의 문법은 더욱 진해졌다. 한국 청년 세대의 개인주의는 이를 배경으로 한다.

청년들은 더 이상 개인적 이익이 없다면 움직이지 않는다. 암울했던 독재정권 아래에서는 ‘대의’를 위한 개인의 희생이 가능했었다. 하지만 현재는 학생운동의 상징인 학생회조차 손익을 따져가며 움직인다. 질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자기 욕망의 실현을 요구하는 개인주의가 만연한 오늘, 20대의 정치가 발현되는 지점은 어디일까.

▲ 학생회 간부가 학생총회 정족수를 파악할 수 있는 번호표를 뽑아가라는 피켓을 들고 있다. 학생총회에 참석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과, 단대의 깃발을 앞세우고 단체로 입장했고, 단체로 퇴장했다.

지난
4일, 경북대에서 이와 관련해 생각해볼만한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날, 안철수 교수의 강연과 전체학생총회가 계획되어 있었다. 결과부터 말하면 안철수 강연은 그를 보기 위해 모여든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학생총회는 정족수 미달로 성사되지 못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대학생의 정치참여 방식이다. 대학생들은 그들의 아픔을 이해해줄 것 같은 ‘대표자’에게 개별적인 참여로 화답했다. 반면 학생 본인의 직접적인 참여를 요구한 학생총회에는 소극적이었다. 높은 등록금과 기성회비 사용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정당성이 널리 알려졌음에도 말이다.

민주화시대 대학생이라면 이에 적극적으로 답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현재의 대학생에게 개인의 이익이 되지 않는 공적 영역에의 참여는 부담스럽다. 차라리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에 맞는 인물을 뽑아, 그들에게 역할을 위임하고, 미래를 위해 스펙을 쌓는 것이 편하다. 10년째 대학생에게 사회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요구하며, 때론 다그치고, 때론 어르기도 해왔지만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학생총회 역시 개인적 이익과 멀게 느껴지는 한 대표자들이 알아서 처리해주길 바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앞으로 대학생의 정치는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 개인주의 흐름에 주목해야 한다. 이들의 가치가 이기적인 욕망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촛불집회, 반값등록금, 박원순 서울시장 당선, 더 넓게는 반세계화 점령(occupy) 시위에서 볼 수 있었다. 또한 SNS를 매개로 한 소통창구의 확대는 대학생의 재정치화 가능성을 높였다. 그들의 참여는 개인의 욕망과 접점이 맞는 사안에 대해 자발적, 적극적으로 합류한다. 더 이상 ‘대의’라는 이름으로 재단한 의제에 함께하라 요구하는 건 먹혀들지 않는다. 스스로의 욕망에서 시작해 타인들과 공존할 수 있는 연대지점에서 대학생의 정치는 시작한다.

혹자는 총선을 통해 20대 정치인이 생길테니 정치적 활로가 생겼지 않느냐 말한다. 하지만 20대의 눈에 그들은 정당이란 대형유통업자가 표심을 얻기 위해 내놓은 상품에 불과하다. 때문에 대학생의 욕구와 가치를 ‘소통’하고 ‘공감’하려는 안철수에 열광하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그는 20대는 아니지만 담론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으며 듣기만 한다. 그는 20대의 이야기를 들어줌으로 해서 그들을 하나의 주체로 인정해준다. 그러니 학생들이 20대 국회의원보다 안철수에 열광하는 것은 당연하다.
 
▲ 한 학생이 학생총회 의제 중 하나인 기성회비 반환 청구소송 원고를 모집하고 있다.

20
대, 대학생을 흔히 ‘청춘’이라 이른다. 청춘을 인간의 특정 시기를 뜻하는 의미로 쓴다면, 당연히 20대나 젊은 시절과 동의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즐거운’, ‘뜨거운’ 같은 형용사의 뒤를 따르는 ‘청춘’이 가리키는 것은 20대가 아니다. 그는 ‘지금 내 삶은 팍팍해도 그 땐 내가 좀 놀았었지’ 혹은 ‘그 때라도 충분히 놀아둘 걸’이란 추억과 회한의 교차점에서 출발한다. 어른들의 시선인 것이다. 어른들의 시선에 갇힌 ‘청춘’은 오늘도 자신이 해야 할 선택을 어른들에게 미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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