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날] 천병석의 신비한 우리말 산책 (3)

제3편: 바꿔(buy) 먹다!
뉴스일자: 2014년04월05일 20시50분

지난 제2편에서는 “가마-솥” 혹은 “숯-가마”라고 할 때의 그 ‘가마’의 뜻인 드라비다어의 두 가지 형태 즉 <āvi>와 <āma>라는 두 어형이 공존하고 있음을 통해 b, v → m으로의 순음(脣音) 변화(비음화)가 존재했었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처럼 문헌에 남은 어휘들을 통해 추론된 음운 원리를 광범위한 유라시아 어휘들에 하나하나 적용해 비교해봄으로써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여러 국적 언어 간의 상호 동일성이 확인된다고 보는 것이 필자의 관점이고,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 이를 실천한 바의 그 결과물이 “연재를 시작하며”에서 밝힌 필자의 졸저라고 할 수 있겠다.

나름의 폭넓은 어휘비교를 시도해본 필자의 책에 실린 각각의 국적(國籍) 어휘들은 “연재를 시작하며”에서 밝힌바 「연구개음(g․k)의 재구성」이란 음운 원리 하나만을 적용해보더라도 그 간의 학계에서 상상해본 바 없는 놀라운 친연성을 드러내게 되는데, 필자가 제1편에서 보인 다음의 5)의 경우 및 위의 재인용 글 상자 6)에서의 <가마>는 바로 그러한 무수한 예들 가운데의 하나다. 

이처럼 5), 6)에 적용된 음운 원리 즉 “모든 음절적(자립적) 모음 앞에는 연구개음(g․k)을 재구성할 수 있다!”라는 「연구개음(g․k) 재구성」의 원리를 역사적․실증적으로 입증해 주는 경우로서 아래에 소개한 수메르어를 빼놓을 수 없다.

서두에 언급한 필자의 졸저에 실은 ≪음운론≫ 편에는 기왕의 영어 및 프랑스어 변천사 연구 등에서 밝힌 연구개음 탈락의 역사적 사례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지만, 독자분들도 관심을 많이 가지고 계실 법한 ‘수메르어’에서의 예를 드는 것도 글의 재미를 더하는 일이 아닌가 싶어 소개해본다.
 
  ※① 수메르  giš - bar, ga-eš8 -bará- è : (승부를) 정하다, 결정(판결)하다   
  ※② 수메르  ka-aš(-bar) : 신성한(종교적) ~ 결정․판결       
  ※③ 수메르  eš -bar, èš-bar : 신의(신성한) 결정․계시

①②③으로 인용한 이 수메르어들은 {신(神)에 의한 신성한 결정(판결)}이라는 같은 의미를 가지는 점에서 어휘 형태적으로도 본디 같은 것이었다고 추론함이 이치상 합당하고, 음운론 일반의 견지에서 볼 적에 어두에 연구개음(g․k) 성질이 존재하는 ①②가 앞선 형태로서 이로부터 연구개 자음 성질이 약화된 ③이 나중에 나타났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을 반영해 ③의 어두에다, 본디 존재했다가 오랜 세월에 걸쳐 약화․탈락하였을 개연성이 높은 연구개음(g․k)을 소급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다시 말하지만, 수메르어 <eš -bar>를 이 글상자 7)에서와 같이 어두에 연구개음을 재구성해 관찰할 수 있음은 의미상 완전히 동일한 위 ①②와 같이 어두에 연구개음이 존재하는 어형이 존재하고 있음을 통해 그 음운적 방법론의 타당성을 일차 확보할 수 있으며, 뿐만 아니라 그러한 방법론을 적용하였을 때 <끗발>과 같은 현대 한국어로써 그 어휘적 대응이 충분히 확인 가능하다는 점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하겠는데, 이러한 가능성들을 일반화한 것이 바로 필자가 주장하는 “모든 음절적(자립적) 모음 앞에는 연구개음(g․k) 재구성할 수 있다!”라는 「연구개음(g․k) 재구성」의 원리이다.

이러한 음운 원리를 적용해 살펴보면 각기 다른 언어라고 생각했던 국적(國籍) 어휘들이 사실은 기원적으로 동일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으며,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어휘들의 의미론적 배경에 대하여도 보다 합당한 추론을 할 수 있게 된다.

가령, 승부결정 내지 재수와 관계된 <끗발>이란 한국어는 운명이라 불리는 어떤 거창하고 거대한 일의 향배, 혹은 대다수 인간사란 것이 “신이 결정하고 정해 주는데 달린 것이다!”라는 고대인의 종교적 사고방식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어휘라는 것을 「연구개음(g․k) 재구성」의 원리 및 수메르어와의 비교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고대인들의 종교적 사고방식은 나라의 일이나 왕손의 탄생 등에 관해 점을 치고 이를 소뼈에 새겨 기록으로 남긴 은[상]나라 갑골문 유물, 그리고 그런 관습이 존재했음을 어렴풋이 드러내고 있는 구약 성경에서의 기록 등을 통해 실증되고 있다가 아니할 수 없다.

“초반 끗발은 개-끗발이다!”라든가 “끗발이 좋은 걸 보니 마눌님 속곳이라도 훔쳐 입고 온 겐가?”, 혹은 세도나 기세가 당당하다는 뜻과 연결된 “끗발이 좋으니 출세도 빠르군!” 등에서의 <끗발>은 모두 신(神)에 의해 인간사가 결정된다는 옛적의 믿음에 그 의미적 바탕을 두고 있다 하겠다.

불규칙하고 거친 자연(自然)에 대응하는 능력이 오늘날보다 현저히 뒤떨어진 시대 배경에서는 이러한 원시 종교적 관념이 불가피한 것이었겠지만, 문명이 발달했다고 자부하는 요즈음에도 초자연적인 힘에 기대는 관습은 여전히 남아 있으니 고대인들을 나무랄 처지가 못 되는 것이 오늘날의 우리가 아닌가 한다.

우리가 즐겨 보는 ‘점(占)’이라는 것도 그와 같은 것으로, 내가 하려는 ‘어떤 일이 잘될 것인지 안 될 것인지’ 혹은 내게 재수가 따를 것인지 아닌지’를 미리 알고 싶어 하는 행위는 나의 일을 도와줄 것인지 아닌지를 신께 물어보던 고대적의 관습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점(占)을 치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 전통이 오래된 것을 말해보라 하면 단연 ‘새’를 이용한 점술이 아닌가 싶다.

그런 맥락에서 위에 소개한 수메르어 ①②③을 다시 보면 아래 글상자 9)와 같이도 풀어볼 수 있다. ‘끗발’이니 ‘재수-빨’이니, 혹은 ‘계시(啓示)-빨’이니 하는 다소 추상적으로 여겨지는 말들이 나타내는 바의 그 어휘적 의미가 구체적 행위어로서 나타난 것이 이 9)에서의 대응이 아닐까 짐작해볼 수 있다는 말이다.

한국어 <가볍-> 및 그와 기원적 동일성을 지닌 {새 ‘鳥’}라는 뜻의 포르투갈어 <ave>를 살펴본 지난 제1편에서 말했듯이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라는 존재는 높은 하늘에 있는 신(神)의 대리자 또는 사자(使者)인 점에서, 내가 하려는 일에 재수가 따를 것인지 아닌지’를 미리 알고 싶어 하는 행위 곧 ‘신께서 나의 일을 도와줄 것인지 아닌지’ 미리 답을 얻어 보려는 점술에 가장 적합한 매개라 아니할 수 없다. 즉 신에게 가까이 날아가 내가 하려는 일을 신께서 도와줄 것인가, 하는 답을 얻어올 수 있는 존재는 신의 사자(使者)인 ‘새’를 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는 것으로, 새를 이용한 점술의 전통이 유구함도 바로 이러한 까닭이 아닐까 한다. 

아래 10)으로 인용한 ‘새점(占)’ 관련의 영어 단어 <auspice>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 및 연구개음(g․k) 재구성의 원리를 적용하면 여기서 소개한 수메르어 ①②③과 기원적으로 동일한 어휘일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쓰는 “이사 갈 날을 보다”라든가 “결혼 날짜를 (빼다)”와 같은 표현들 또한 이 ‘새점(占)’ 관련의 말일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이러한 어휘 관찰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다시 말하지만, “모든 음절적(자립적) 모음 앞에는 연구개음(g․k) 재구성할 수 있다!”라는 「연구개음(g․k) 재구성」의 원리이고 이러한 음운추론은 역사적․실증적 어휘자료를 통해 뒷받침되어지고 있다. 

흔히 반모음으로 일컬어지는 /y/가 연구개음(g․k)으로부터 나타났음 또한 어휘변천사를 통해 드러나는 것인데, 이를 참고해 영어(English)와 한국어의 동일성을 보여주는 예를 아래에서  살펴보려한다.

바꿔(buy) 먹다

“얘, 네가 신고 있는 그 고무신하고 엿하고 바꿔먹어 보련?”

필자가 6~7살 되었을 때의 일이다. 산골에서 자란 필자는 고갯마루를 두 개나 넘어야 하는 산길을 걸어 외가를 가끔 다니곤 했다. 늑대가 나올까 조마조마한데다 시퍼렇게 고인 물이 나를 삼킬 것만 같은 커다란 연못을 지나야만 하는 산길을 따라 어찌어찌 외가에 닿으면 외할머니가 나를 무척이나 반겨주셨던 어렴풋한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외삼촌께서도 마당에 높게 자란 대추나무에서 대추를 따 어린 내게 먹어보라고 주셨던 것 같다.

그런 날들의 기억 속의 하루는 외삼촌께서 내게 소주병인지 뭔지 하여간 빈 병을 하나 주시면서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라고 하셨던 것같다.

수십 년이 흐른 내 기억 속에 외가의 대문과 잇닿은, 돌들이 듬성듬성 박힌 토담 길로 10리도 더 떨어진 면 소재지에서 아이스크림 장수가 어깨에 나무로 만든 아이스크림 박스를 메고 “아이스 께끼(cake), 아이스 께끼 사려!”하고 외치며 지나가고 있다. 나는 외삼촌이 주신 빈 병을 들고 그 아저씨에게 달려가 빈 병을 내민다. 아이스크림 장수가 박스 뚜껑을 열자 하얀 얼음 김이 동그란 구멍 밖으로 내비치고 그 속에서 아이스크림 장수는 아이스 께끼를 하나 꺼내 내 손에 쥐어준다. 나는 그것이 녹아 바닥으로 흐를 새라 혀로 날름날름 핥아먹으며 의기양양하게 외갓집 골목을 누비고 다닌다.

산골에서 자란데다가 나이로도 한 참 어린 60년대 후반의 내가 아이스 께끼가 맛나다는 것을 어찌 알았는지 지금 생각해도 고개가 갸웃거려지는데, 하여간 그것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먹어 본,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아이스크림으로 기억되고 있으니......

지금도 그런 경향이 있지만 알다시피 그 시절의 시골이라는 데는 현금이 무척이나 귀하였을 것임이 분명하다. 요즘이야 조카가 오면 하다못해 천 원짜리 1장이라도 손에 쥐어주고 “가게에 가서 아이스크림 하나 사 먹고 오너라!”하면 되지만, 그때야 5일마다 열리는 10리가 넘는 장터까지 가서 무엇을 좀 팔아야만 현금이 생기는 것인데 그 마저도 바쁜 농사철이 되면 장에 나갈 엄두도 내기 어려운 법이니 현금이 안 귀할 내야 안 귀할 수가 없었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하여간 그런 시절 덕분에 나는 빈 병과 아이스 께끼를 서로 ‘바꾸어’ 먹을 수 있었던 것인데 오늘날 정신 차리고 한국어/영어/라틴어/수메르어 등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때의 그 ‘바꾸다’가 바로 영어 사전에 {물건을 사오다}로 풀이 된 <buy>가 아닌가!

※표시로 인용한 것은, 이번 장의 주제인 <buy>와 마찬가지로 끝부분이 ‘y’로 구성된 현대 영어 <day>가 출현한 음운 변천사다.

y’가 본래 /g/ 즉 연구개음이었음을 보여주는 이러한 역사적 실증자료를 통해 ‘buy’를 ㉠과 같이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한 결과 ‘buy’는 화폐가 귀한 시절이거나 더 거슬러 올라가면 돈이란 것이 아예 없었던 상고시대에 내 물건과 네 물건을 서로 맞-‘바꾸’는 행위 곧 물물교환을 가리키는 말이었음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무엇과 무엇을 맞바꾸는 행위는 필자가 빈 병으로 아이스크림을 맞바꿔 먹던 나이를 제법 지나서도 되풀이되었으니 그것이 버릇(?)이 되어 부모님께 된통 혼나기까지 하였다.

초등학교 3~4학년 쯤 된 기억인 듯한데, 또래의 아이들이 대개 그렇듯 나도 유달리 단 것을 좋아했던지 마을에 가끔씩 들르는 엿장수에게 마당에 널어 둔 빨간 고추를 한 줌씩 집어주고 엿으로 몇 번 바꾸어먹다가 어머니께 혼 난 적이 있었다, 그 탓인지는 몰라도 5일 장에서 돌아오실 때는 엿을 자주 사다주시곤 했는데, 친구 녀석 중엔 나보다 더한 아이도 있었으니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다가  “얘, 네가 신고 있는 그 고무신하고 엿하고 바꿔먹어 보련?” 하는 엿장수 말에 그만 신고 있던 검정 고무신이랑 엿이랑 바꾸어버린 친구도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교환행위인 <바꿔(바꾸어)>는 그 제2음절 연구개음의 변화를 입어 현대영어 ‘buy’로도 되었지만, 그 제1음절 순음의 변화(비음화)를 겪어 오늘날 자주 쓰는 ‘매매(賣買)’라는 말에서의 []라는 말소리도 되었다.

㉢줄에 적은바 {사다}와 {팔다}가 동일한 []로 표현되어왔던 것은 상업행위라는 것이 화폐가 없던 시절의 내 물건과 네 물건을 서로 ‘바꾸’는 행위였음에 기인한다. 즉 밀림에서 바나나를 가지고 약속 장소(장터)로 나온 사람은 그 바나나를 생선을 가지고 바닷가에서 온 사람에게 ‘파(매도)’는 동시에 바닷가에서 온 사람이 가진 생선을 ‘사(매수)’는 하나의 행위만을 하는 것이기에, 이러한 물물교환에서는 {사다} 및 {팔다}와 같은 상대적 언어 개념이 생겨날 수 없었던데 기인해 동일한 하나의 []라는 음성기호로 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買’ 및 ‘賣’로서 문자를 달리하여 상대적 의미를 확정 짓게 된 것은 화폐가 생겨난 이후의 일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음운적 추론에서 보건대, 이른바 ‘한자’라 부르는 문자 때문에 ‘매매(賣買)’라는 말이 한반도에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아닐 개연성이 높다 하겠고, 다음에 소개하는 드라비다어어의 추론을 통해서도 이러한 점에 확신을 가지게 된다.

손해 배상(賠償)이니 손실 보상(報償)이니 할 때 쓰이는 ㉤줄의 어휘들은 영어 ‘buy’의 재구성이라든가 연구개음(g․k) 재구성의 원리를 고려하면 ㉥줄의 <바꿔>가 그 원형이다.

화폐가 없던 시절까지 소급해서 생각하면, 고의로 그랬던 실수로 그랬던 남의 집 물동이를 깼으면 그와 똑같은 물동이로 ‘바꾸어’ 주었던 일이 ‘(賠)’이고 ‘(報)’였던 것이다.

‘ㅊ’ 곧 [tʃ]가 연구개음 /k/의 전향(前向)에서 발생한 점을 고려하면 ㉦줄의 <바쳐서>로 대응이 가능한 영어 단어 <purchase>는 그 본래가 ㉧의 <바꿔서>임이 분명하며, 앞의 제1음절, 제2음절에서는 위에서 살펴본 영어 ‘buy’와 동일한 형태이다.

부처님(하늘님)께 바치다”라는 것은 나의 정성스런 마음 혹은 그 정성을 담은 헌물과 부처님(하늘님)으로부터 받고 싶은 어떤 무엇을 서로 ‘바꾸’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내용들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賣)>/<(買)>/<(賠)>/<(報)>/<물어~> 등이 근원적으로 <바꿔>와 동일한 어휘라는 점, 그리하여 이른바 ‘한자어’라는 것이 성립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 심각한 고민이 따라야한다는 것이다. 

한국어 <바꿔>와 대응이 가능한 영어 단어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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