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는 텍스트를 원래의 의도를 얼마나 이해하느냐가 중요하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텍스트 자체의 이해보다 그것을 통해서 얼마나 풍요롭게 다양한 것을 받아들이고, 이해의 폭을 넓히느냐가 중요했다. 이렇듯 데리다가 읽기의 해체를 주장했다면 그보다 앞선 시대의 벤야민은 독서는 “쓰여 지지 않은 것을 읽는 것”이라고 했다. 즉, 읽기 자료는 이야기되고 있는 내용과 그것이 그 내용을 통해서 의미하는 것하고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말한다. 그에게 있어 독서의 층위는 한층 깊고 다양하다.
그렇다면 데리다와 벤야민의 독서를 과장하면 독서는 오독(誤讀)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더구나 다른 언어로 쓰인 텍스트는 역사와 문화적 배경의 지식이 필요 없는 독자와 그렇지 않은 독자의 경우 이해의 측면이 다를 것이다. 소위 세계명작을 읽을 때마다 작품 배경이 된 나라의 문화와 역사의 무지는 내가 읽는 것이 단지 활자에 지나지 않음을 느끼게 했다. 좌절로 인한 상심은 ‘세계명작’이란 타이틀 아래 읽기를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배경은 무엇일까에 이른다. 주로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서구의 작품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작품은 구색을 갖추는 정도이다. 서구 문화에 대한 열등감에서 비롯한 사대주의가 아닐까 자답했다.
우리와 비슷하게 식민지 경험이 있지만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라틴 아메리카 문학은 그들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다. 그들의 환상적인 문학은 인간과 세계를 둘러싼 삶의 이면에 숨 쉬는 신비를 직관적으로 포착해서 독자로 하여금 시간의 직선적 흐름을 교란시키고, 시공간의 체험도 분리 해체 시킨다. 마치 뫼비우스 띠를 입체화한 클라인 씨의 병을 탐험하는 것처럼 묘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한 남자의 50년을 넘나드는 한 여자를 향한 사랑을 다룬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읽은 후 안팎의 구분이 모호한 클라인 씨의 병에서 막 빠져나온 것처럼 어지러웠다. 이 작품을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표현하면 한 남자의 여성 편력과 리비도의 해결사를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과소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외피에 불과하고, 탈식민지 이후 시대적 혼란과 문화적 혼돈, 노년과 죽음 등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소설의 발단은 한 남자의 죽음에서 시작한다. 그는 죽음과 노년이 두려워서 자살을 택했고, 그의 죽음에는 자살을 용인한 숨겨진 여자와 긴 세월의 로맨스라는 비밀이 있다. 우르비노 박사는 그의 절친한 체스 상대였고, 박사는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뒤이어 앵무새 때문에 어이없게 나무에서 낙상하여 우르비노 박사는 죽는다. 소설의 초입에 벌써 두 죽음이 등장한다. 며칠 후 그의 집에 비쩍 마르고 대머리에 젊은 시절부터 늙은이처럼 검은색 프록코트를 입던 하천 선박회사의 회장 플로렌티노가 찾아온다. 칠십을 훌쩍 넘긴 우르비노 박사의 미망인에게 이뤄질 수 없었던 사랑을 고백한다.
제목이 왜 ‘콜레라 시대의 사랑’ 일 까란 질문을 품었다. 시대적 배경은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근대화의 물결을 일으키는 19세기 후반으로 짐작되었다. '부왕', '식민지 시대'란 단어가 자주 등장했고, 식민지와 소설의 현재 시점을 비교하고 회상하는 문장도 빈번했다. 또, 콜레라는 전근대적 질병이다. 위생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소설에 등장하는 가장 큰 강을 따라 콜레라가 발병하는 촌락 그리고 내전을 암시하는 장면은 전근대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콜롬비아의 역사, 남자 주인공 플로렌티노의 사랑을 상징하는 듯했다. 특히, 그가 첫사랑 페르미나에 대한 상사병을 앓는 증상은 콜레라와 비슷했다. 그런 뜻에서 플로렌티노에게 ‘사랑은 질병’이었다. 그의 넘치는 에로스적 행위는 페르미나를 사랑하기 위한 연습에 불과하고, 그가 사랑한 여자는 오직 그녀뿐이라는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 기만에 가득 찬 그는 분명 자신을 속이고 상대가 되었던 262명의 여성에게 사랑과 상처를 동시에 주었던 전염병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노년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자살한 사진사와 달리 플로렌티노는 노년의 사랑을 위해 페르미나와 함께 항해를 떠난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기항지에 닻을 내릴 수 없는, 페르미나가 꿈속에서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신문 기사의 노에 맞아 죽은 두 노인의 오랜 내연 관계의 사랑처럼, 불안이 내재하여 있다. 한 세기를 건너온 두 노인에게 당대의 젊은이 세대는 노인의 사랑을 추잡한 추문으로 여기게 했으며, 문명의 가속화를 이룩한 20세기는 노년이 지혜의 미덕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신문물과 진보에 뒤처진 살아있는 유령 같은 존재로 만들었다. ‘늙음’이 공포가 되는 시대에 노인의 사랑을 도외시하는 것은 사랑을 젊음의 특권으로 제한하고, 나아가 자본주의 이행기에 늙은 여자(할머니)의 욕망을 (아이를) 생산할 수 없어서 마녀의 사악한 욕망으로 치부하는 것과 닮았다. 이윤획득을 위한 재생산의 논리가 사랑마저 잠식한 꼴이다.
'콜레라 시대'로 상징되는 전근대와 전통 깊은 민족 문화는 야만, 근대와 서구 문화는 진보로 상징되며, 이런 야만과 진보의 혼돈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의 사랑과 결혼, 노년과 죽음을 다룬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라틴 아메리카 만의 특수성은 아니다. 탈식민지 시대의 우리 역시 전근대와 근대, 근대와 현대, 서구 문화와 민족 문화의 혼란과 갈등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탈식민은 기존 서구 문학의 보편성에서 벗어나 라틴 아메리카 만의 환상적인 고유성을 발전시킨 라틴 아메리카 문학처럼 우리의 관점에서 과거를 되돌아보고 현재를 관찰하고 미래를 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관점은 안과 밖의 구분이 명확한 서구의 이분법이 아니라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팎 경계가 넘나드는 횡단하는 사유여야 한다.
이 뉴스클리핑은 http://newsdg.jinbo.net에서 발췌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