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빨간 주부의 부엌에서 보는 세상 (14)

<마담 보바리>, 눈먼 자의 이야기
뉴스일자: 2014년03월10일 13시19분

아이들의 개학과 더불어 시작하는 금요일 오전 독서 모임에서 3월 한 달 동안 ‘소설 읽기’를 시작했다. 지난달에 읽을 책을 정하면서 아줌마들은 하나같이 “봄바람”을 들먹거렸다. ‘마음이 설레는 연애 소설을 읽읍시다!’는데 의견이 모였다.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가 첫 번째 소설이었다. 당장 모임을 앞둔 며칠 전 SNS에선 신음이 올라왔다. 오해하지 마시라. 보바리에 감정이입 되어 그녀처럼 사랑에 고뇌하는 소리가 아니라 플로베르의 현미경 같은 묘사를 인내하는 소리였다.

프랑스 혁명 이후 복고왕정 시대가 배경인 <마담 보바리>는 한마디로 신문 사회면에서 가끔 발견하는 뉴스이다. 불륜에 빠진 가정주부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불어난 사채를 감당할 수 없어서 주검으로 발견되었고, 몇 달 후 남편 역시 그녀의 뒤를 따랐다는 내용. 가정주부의 탈선과 대부업의 폭리를 걱정하는 투로 끝나는 그런 기사 말이다.

그제 토론에서 이구동성으로 나온 소리는 <마담 보바리>는 연애소설이 아니라 사회소설이나 세태소설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대체로 보바리 부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의견이 많았다. 이 책을 추천했던 이는 보바리가 파멸한 원인의 하나로 수도원의 교육을 짚었다. 수도원의 교육은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공교육이고, 보편적인 시민 양성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교양 있는 귀족 아가씨에게 걸맞은 교육이란 것이다. 그녀가 배운 것과 삶의 괴리가 소위 ‘보바리즘’을 낳았단다. 이를 확대하면 지금의 공교육은 민주시민 양성을 지향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경쟁사회에 적응하여 살아남는 법 혹은 개인의 부단한 노력으로 생존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역할을 한다. 나중에 보바리의 파멸을 두고 구조가 우선이냐, 개인이 우선이냐는 논쟁으로 나아갔다. 

그녀들과 달리 나는 보바리에게 흠뻑 이입되었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는 책 제목처럼 일찍이 열한 살에 공장에 다니던 이종사촌 언니의 책장에서 통속적인 연애 소설을 몰래 빼서 읽었고, 열세 살 무렵에는 ‘제인 에어’를 시작으로 브론테 자매의 소설을 섭렵했다. 그런 내게 사랑은 보잘것없는 일상을 견디는 무지개였다. 어디선가 ‘키다리 아저씨’처럼 부유하고 친절하고 잘 생긴 남자가 나타나서 외롭지만 특별한 고아 소녀 ‘주디’를 구제하는 소망이 실제로 벌어졌으면 바랬다. 우리의 남루한 생을 찬란하게 도금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살면서 무지개는 빛의 반사굴절로 나타나는 현상이란 것을 알 만큼 현실의 녹록잖음도 배웠다. 그러나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한 실제와 우리 머릿속 이미지가 일치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각자의 경험, 가치관이 혼재된 형태로 얼마쯤은 상상계에 산다. 예를 들면 남편은 결코 도민준이 될 수 없지만, 그에게서 도민준의 흔적을 찾아 멋대로 그의 이미지를 버무리면서 그를 도민준이려니 여기는 것은 일종의 삶의 지혜다. 그의 실재를 마주했을 때 맞닥뜨릴 끔찍한 모습을 지연시키면서 사는 게 안전하니깐 말이다. 프로이트식으로 쾌락원리를 좇는 것이 우리를 살게 하기 때문이다. 엠마가 남편 샤를르에게 도민준의 흔적을 찾았더라면 살만하지 않았을까 하는 게 그날의 중론이었다.

라캉을 빌리면 ‘보바리즘’은 엠마의 이미지(환상)가 삶의 현실을 잠식해서 그녀 자신이 봐야 할 실재를 눈뜬장님처럼 못 보게 되는 현상이다. <마담 보바리>에는 당시 부상하는 계급 부르주아가 등장한다. 시골 의사 보바리, 약제사 오메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오메는 마을의 신부와 논쟁을 벌일 만큼 과학과 진보, 합리주의 신봉자이다. 또, 그는 겉으론 친절하고 호의를 베푸는 인물이지만, 계산이 빠르고 명예욕과 권력욕도 강하다. 반면에 보바리는 무능한 부르주아에 속한다. 소설의 발단에 묘사된 보바리는 학급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성적과 생김새도 그만그만한 아이였다. 특별한 재능이나 능력 없는 소시민적인 취향의 보바리는 끝내 아내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보바리즘’이 현실인식의 무능함을 뜻한다면 의사 보바리 역시 보바리즘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에는 ‘장님’이 한 명 등장한다. 약제사 오메는 그의 눈을 고칠 수 있다고 단언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그는 자신의 실패가 장님에 의해 마을 사람들에게 공공연하게 소문나는 것을 막으려고 신문에 장님과 같은 인물은 추방해야 한다는 요지의 글을 게재한다. 결국, 장님은 구빈원으로 보내지고, 오메는 소설의 마지막에 그토록 갈망했던 훈장을 탄다. 부르주아의 이중성을 짐작할 수 있는 맹목적인 합리성의 부조리는 마을 여관의 안짱다리 수술 장면에서 표출된다. 플로베르에게 당대의 신흥계급 부르주아는 혐오스러운 존재였으며, 엠마의 첫 번째 정부 로돌프 같은 몰락하는 귀족은 도덕성이 결여된 존재로 묘사된다. 현실과 환상의 괴리에 파멸하는 보바리나 거리의 떠도는 장님은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존재이다.

그뿐만 아니라 엠마가 바람둥이 귀족 로돌프와 법무사 청년 레옹과의 관계에서 관능의 쾌락에 더욱 몰입하고, 그와 비례하여 돈을 탕진하는 장면은 대상이 다르지만, 욕망의 속도는 제어할 수 없다는 공통점을 나타낸다. 또, 관능과 소비의 욕망, 대부업자 뢰르의 욕망은 같은 궤도를 달린다. 북유럽의 쥐 레밍은 개체 조절을 위해 절벽이 아래에 있는 줄 알면서도 앞에서 달리는 쥐의 꽁무니를 분별없이 따른다. 소설에서 관능과 소비와 축적의 욕망도 레밍처럼 파멸의 끝을 향해 치달았다.

그렇다면, 욕망에 눈먼 인간 역시 또 다른 ‘보바리즘’일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대표적인 가치의 전도는 물신화(物神化)이다. 자본과 노동의 관계를 은폐시키는 ‘화폐’에 힘이 있다고 믿는 물신화, 그것은 다른 의미에서 현실을 감춰버리는 ‘환상’ 역할을 한다. 신흥계급 부르주아의 여명기에 플로베르는 이미 부르주아 사회의 은폐된 욕망과 현실을 목격하고 <마담 보바리>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소설의 주인공은 표면적으로 <마담 보바리>지만 시작과 끝은 보바리의 남편 샤를르와 보바리의 이웃 약제사 오메가 장식한다. 그러므로 플로베르의 의도는 ‘엠마’란 여성을 통해서 당대 부르주아 계급의 위선과 욕망의 부도덕성을 그리고자 했을 것이다.

여성의 처지에서 보면 ‘엠마’란 인물은 히스테리를 앓던 당대 부르주아 여성의 전형이다. 농업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변화는 여성의 정체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하위 계급 여성은 농사일 또는 공장일과 가사 및 육아의 이중삼중의 고통에 시달렸지만, 상류계급 여성은 가사는 하녀가 육아는 유모가 맡아서 남은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귀족 여성들은 사교와 파티, 예술에 탐닉했고, 부르주아 여성은 그런 귀족 여성을 동경하며 흉내 내기에 급급했다. 시간이 흘러서 부르주아 여성은 귀족 여성과 다른 차별화 전략을 육아에 헌신하는 모성으로 꾀했다. 물론 교육받은 상류 계급 여성에 의해 여성의 사회진출과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운동이 시작되었음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이 존재했기에 보바리 부인 같은 과도기를 거쳐서 현재의 우리가 살아갈 수 있었다.

엠마의 경우와 다르지만 <오래된 미래>의 라다크 여성은 산업화로 인해 여성의 지위가 하락하고 일과 공동체에서 소외되면서 우울증을 겪는 사례가 소개되었다. 히스테리는 신경증이다. 프로이트라면 성적 에너지와 관련시키겠지만, 나는 여성이 사회적 관계에서 겪는 존재의 갈등이라고 생각한다. 가족 관계를 넘어 사회적 관계를 맺고 교류하고 존재를 인정받고 영향을 미치고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그런 순간을 체험하고 싶은 자연스러운 욕구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엠마의 시대에 히스테리가 여성에게 많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가정’이란 울타리가 여성의 다양한 욕구를 억제하는 역할을 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작가로서 플로베르의 위대함은 <마담 보바리> 문장 구석구석에서 나타난 현대의 징후에서 볼 수 있다. 로돌프와 엠마의 감정이 발전하는 농사 공진회의 장면은 이전의 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영화적인 장면이다. 참사관의 연설 한 토막과 두 사람의 대화가 교차로 등장한다. 마치 영화의 교차편집을 떠올리게 하고, 엠마의 파멸은 화면의 단절 없이 이어지는 롱테이크를 연상시킨다. 어어, 하는 사이 엠마는 죽어갔다.

또, 엠마가 자신의 감정을 편지와 말로 모두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장면은 언어의 한계를 지적했던 현대철학자의 명제와 겹쳐진다. 플로베르의 문장은 카메라의 줌인과 아웃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확대와 전경을 훑으며 소설의 인물뿐만 아니라 시대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독자로 하여금 사고의 시간을 준다.

고전(古典) 읽기는 고전(苦戰)을 치르는 시간이다. 그럼에도 모범적인 전범을 통해 우리는 당대에 머무르지 않는 인간의 다양성을 만난다. 소설에 등장하는 샤를르, 오메, 엠마, 로돌프, 뢰르는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 뉴스클리핑은 http://newsdg.jinbo.net에서 발췌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