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빨간 주부의 부엌에서 보는 세상 (13)

영화 <클로즈드 시즌 : 욕망의 계절>, 누수된 욕망
뉴스일자: 2014년01월21일 17시42분

* 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이 숨어있습니다.
 
일요일 오후 6시 타임의 극장은 한산했다. 그날 극장은 ‘그들만의 영화관’이었다. 영화 표에 인쇄된 지정좌석과 상관없이 각자의 전용좌석에 앉을 수 있는 극장이 전국에 몇이나 될까. 가끔 멀티플렉스의 지정석에 앉을 때마다 좌석을 고를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넓은(?) 동성 아트홀이 생각나곤 했다. 선택의 자유를 누릴 최소한의 조건은 다섯 가지 이상의 선택지라고 한다.

영화 ‘클로즈드 시즌’의 엠마는 선택할 수 없는 것을 ‘선택’해야만 했다. 남편 프리츠는 표면적으로 그녀에게 선택권을 주었지만, 그녀는 농장을 상속받을 아들을 간절히 원하는 남편을 무시할 수 없었다. 포로 같은 유대인 알버트가 아니어도 프리츠는 농장을 위해 다른 남자를 찾았을지 모른다. 농담을 가장한 친구 월터의 대사가 두 남녀의 식탁으로 떨어졌던 장면을 무시할 수 없다면 말이다.

자극적인 영화 카피와 상관없이 비교적 잔잔했던 영화가 끝났을 때, 아우슈비츠의 악몽에서 살아남은 알버트나 폭력적인 관계로 세상에 태어난 아들 브루노 때문이 아니라 두 남자에 의해 ‘나쁜 여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엠마’가 가엾어서 눈물이 났다. 엠마는 호모소셜리티의 끈끈한 연대의 지반이 되는 나를 포함한 모든 여성을 떠오르게 하는 인물이다.

‘Homo sociality’의 체계를 <Between Men>이란 책에서 밝힌 이브 세지윅은 한 여성을 사이에 두고 두 남성이 경쟁하는 유형으로 나타나는 삼각관계가 실제로는 남성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매력을 적대감으로 위장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르네 지라르의 주장을 더욱 발전시켰다. 물론 ‘클로즈드 시즌’에서 알버트는 프리츠의 선의에 대한 보답으로 프리츠의 요구를 수용했다. 알버트는 엠마의 유혹에도 프리츠의 선의를 지켰고, 프리츠 역시 끓어오르는 질투에도 불구하고 알버트를 고발하지 않았다.

두 남성의 깊은 우애를 파국으로 이끈 것은 자신의 욕망이 내동댕이쳐진 모욕에 울던 엠마의 말 한마디였다. 나치당원 월터에게 했던 말, “누가 우리 농장에 일을 도와주겠다면서 숨어있는 것 같아요. 아마도 유대인인 것 같아요.”는 알버트에게 편지로 고백되고, 참회의 내용은 아들이 낭독했다. 프리츠와 알버트 두 남자의 우정과 알버트와 브루노 두 부자를 갈라놓은 것은 금지된 욕망에 굴복한 여성 ‘엠마’였다. 

이브 세지윅에 따르면 호모소셜리티의 여성에게 욕망은 남성의 선택으로 구현된다. 여성의 욕망은 남성의 “어땠어?”라는 질문에 따르는 대답으로 표현된다. 여성에게는 자신의 언어로 발화할 수 있는 욕망은 없다. 알버트와 관계를 갖기 전 엠마는 프리츠에게 욕망하는 여자가 아니라 생산하는 여자였다. 농장 일을 거들고 장차 제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게다가 영화의 배경이 된 히틀러 시대 “도덕은 짐이고 본능은 무시무시한 위험이다”는 도덕과 성의 양자택일이 독일 여성들에게 선전되었다고 한다.

결국, 자유에 대한 억압으로 자유로운 삶에 대한 불안을 강하게 발전시켰고, 여성의 성은 순수한 독일 국민을 생산하는 데만 사용되어야 했다. 파시즘은 여성을 ‘쾌락’을 느낄 줄 아는 욕망하는 인간이 아니라 단지 순수한 국민을 낳아야 하는 모성으로 제한했다.

마치 이성애 관계는 동성 간 리비도를 가리는 가면이란 호모소셜리티의 정의처럼 반유대주의자들은 자신이 처한 사회적 모순의 원흉으로 유대인을 지목했다. 직면하기 싫은 사회적 모순은 궤도를 벗어난 욕망처럼 ‘홀로코스트’로 이어졌고, 불능이란 자신의 실재를 거부했던 프리츠는 종전 후 다시 찾아온 알버트에 의해 자신의 실재를 확인하는 소리를 듣고 자살한다. 우리가 마주보기 싫은 삶의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고 ‘환상’을 쫓아 아무리 ‘환상의 대상’을 바꿔도 불편한 진실은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향하는 것처럼 파시즘과 프리츠는 자기 파괴로 생을 마감했다. 
 
영화 제목 ‘클로즈드 시즌 : 욕망의 계절’은 사냥이 금지된 시간을 의미한다. 그런데 제목 뒤에 붙은 ‘콜론(:)’에 이어지는 ‘욕망의 계절’과 살육을 금지하는 ‘클로즈드 시즌’은 마치‘욕망’은 ‘금지’에서 발생한다고 말한다. 철저하게 욕망이 금지당한 파시즘의 시대에 억압은 오히려 금간 벽의 누수현상처럼 삐죽삐죽 새어나오는 욕망의 과잉을 낳은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금간 벽이 마침내 무너지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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