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날] 정만진의 대구여행 (30) 화원 일대

상화 묘소, 문씨세거지
뉴스일자: 2013년09월18일 15시16분

달서구는 인구가 60만을 넘는 ‘큰’ 기초자치구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달서구를 둘로 나눈다. ‘한쪽은 월배, 다른 한쪽은 성서’ 식이다. 상인동, 진천동, 대곡동으로 대표되는 월배 쪽은 밖으로 나가면 경상북도 고령군에 닿고, 용산동, 이곡동, 장기동으로 대표되는 성서 쪽은 경상북도 성주군에 닿는다. 그만큼 달서구는 광활하다.

그러므로 달서구는 그 자체만 순회하는 것보다는 고령으로 가는 길과 성주로 가는 길로 나누어서 답사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그 두 갈래 대도로가 달성군을 또 다시 두 지역으로 크게 나누기 때문이다. 물론 신도시 개발지인 성서 일대에는 역사의 자취가 별로 없으므로, 답사 여행의 목적에 한정해서 보면 달서구의 중심이 상인동 쪽이라는 점을 고려할 필요도 있다. 달서구를 지나 달성군까지 아우르는 답사 여정은, 비슬산은 별도로 제외하고, 셋으로 대별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말이다.

(1) 달서구 성서 일원/2.28기념탑, 계명대 박물관, 신당동 석장승→달성군 하빈면 일원/이윤재 묘소, 육신사, 삼가헌 
(2) 달성군 옥포면 일원/용연사→ 논공/천왕당→ 현풍/향교, 석빙고→ 달성군 구지면 일원/도동서원, 홍의장군 묘소
(3) 달서구 상인동 일원/태극단 기념비, 월곡역사박물관, 진천 고인돌→ 달성군 화원읍 일원/화장사 고인돌, 상화 묘소, 화원동산, 인흥서원, 문씨세거지

(1)과 (2)의 여정은 앞에서 이미 답사해 보았다. 오늘은 (3)의 여정을 다녀보자. 이 여정은 서부정류장을 거쳐 달서구 관내로 진입하면서 시작된다. 첫 답사지는 1973년 12월에 건립된 ‘태극단 독립운동 기념탑’이다. 상원고 야구장 뒤 도로변, 즉 달서공고 정문 앞에 있는 이 탑은 대구상업학교(상원고 전신) 학생들이 일제 식민지 폭압에 처절하게 저항했던 불굴의 민족의식을 기념한다. ‘일군(日軍) 입대를 거부하고 일제의 전쟁에 협력하지 말자’는 호소문을 살포한 36명의 학생은 1943년 5월 9일 비슬산 약수터에 모여 태극단을 결성하지만 결국 피체, 고문 끝에 죽고 중상을 입는 등 처참한 탄압을 받는다. 그 현장을 달서구 답사의 출발지로 삼는 것이다.

▲대구상고 태극단
     

상원고 맞은편의 대구지하철공사 왼쪽 도로로 200m가량 들어가면 월촌APT단지 아래에 월곡역사박물관이 있다. 월곡역사박물관은 임란 당시 약관 24세의 나이로 의병을 일으켜 종전 직후 국가적 논공행상에서 곽재우, 김면, 정인홍 등과 함께 1등 공신으로 인정을 받을 만큼 맹활약을 펼쳤던 우배선 장군을 기려 세워졌다.

월곡은 우배선 장군의 호로, 월곡역사박물관 일대는 소공원으로 잘 꾸며져 있다. 공원 안에는 주인이 죽자 사흘 동안 울기만 하며 먹기를 끊더니 이내 목숨을 거둔 장군의 말을 기념하는 의마비(義馬碑)가 특히 눈길을 끈다. 

▲월곡역사관 우배선 동상
  

월곡역사박물관을 떠나 화원읍 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두 곳의 고인돌 유적과 만나게 된다. 하나는 진천동에 있고, 다른 하나는 대구교도소 뒤편에 있다. 물론 진천동 유적지는 상화 묘소 가기 이전에 있으니 답사를 하려면 그 전에 들러야 한다. 국가 사적 411호인 ‘진천동 입석(立石)’은 고인돌 탁본체험을 할 수 있도록 모형 입석도 만들어져 있다.

▲달성군 화원 화장사 고인돌

그런가 하면 대구교도소 뒤편, 즉 화원 화장사 담장 안팎의 고인돌 유적도 아이들의 구미를 잡아당기는 데 한몫한다. 기념물 13호인 이 천내리 지석묘 집합은 덩치들이 크고 숫자도 제법 많다. 게다가 절 건물과 어우러져 한데 뒹구는 모습이 예사롭지가 않다. 아득한 옛날에는 샤머니즘의 중요 무대였던 곳이 세월이 흐르자 사찰 경내로 변한 것이니, 어찌 생각하면 종교의 발달사를 엿보는 기분도 든다. 특히 김장철이면 신도들이 고인돌 사이사이에 앉아 배추를 다듬고 간을 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가 저 아득한 청동기 시대를 보는 것만 같아 재미가 쏠쏠하다.

화장사 안팎의 고인돌이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사찰과 교도소 사이에 있다는 사실이다. 화장사 담장 너머가 바로 교도소이다. 종교 시설과 감옥이 담장을 사이에 두고 붙어 있다는 사실도 흥미롭지만, 고인돌이 그 두 시설에 걸쳐 이어져 있는 것 또한 잔뜩 흥미를 돋우어 준다. 교도소 철망 아래에 고인돌이 놓여 있는 것을 보면 ‘저 철망이 없으면 고인돌을 밟고 탈옥을 할 수도 있겠다’ 같은 엉뚱한 상상력이 발동하기도 한다. 실제로 화장사에서 고인돌을 타고 담장을 넘어 길 건너편 교도소 담장 아래의 고인돌로 옮겨갈 수도 있다.

이 길에는 대구 전체를 답사할 때에도 결코 빠뜨리면 안 될 중요한 방문지가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남겨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민족자주의 정신을 아로새긴 이상화의 묘소이다. 그런데 찾기가 묘하다. 알고 보면 쉬운 길이지만, 이정표도 없고 대로변도 아니어서 그냥 지나치기 일쑤이다. 사람들에게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엇비슷해서 대체로 ‘글쎄요’이니 정답이 없다. 그러나 반드시 찾아야 한다. 홍의장군 묘소, 국채보상운동의 서상돈 선생 묘소, 한글학자 이윤재 선생 묘소, ‘대구시민의 노래’를 쓴 백기만 묘소 등과 더불어 대구의 정신을 상징하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노래한 민족시인의 묘소인데 어찌 그냥 지나칠 것인가.

▲이상화 묘소

행정구역으로는 달서구 대곡동 소재이지만 시민들의 느낌에는 화원읍에 있는, 상화 묘소를 둘러본 다음 화원 읍내로 나오면 경북 고령군 다산면으로 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우회전을 하면 경북과 대구의 경계가 되는 사문진교에 닿는다.

사문진교 옆의 낮은 산이 ‘화원동산’이다. 동산 오른쪽 비탈에는 고분군이 뚜렷하게 남아 있어, 꽃[花화]이 많은 땅[園원]이라 하여 ‘화원’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 일대가 아득한 옛날에는 대구 지역의 중요 세력지였음을 증언해준다. 이곳의 고분군은, 대가야가 점차 강해지자 화원 거주민들이 위기를 느끼고 달성(達城) 일대로 물러난 것으로 보는 근거이기도 하다. 가야산에서 요양 중인 태자를 위로하러 가던 경덕왕(742∼765 재위)이 머물며 꽃[花]을 감상(賞)한 곳[臺]-상화대(賞花臺)가 화원동산에 남아 있다는 사실도 이곳의 정치적 위세를 짐작하게 해준다. 
▲대구 달성군 화원읍 일대 낙동강

화원동산이 지닌 색다른 미덕 네 가지- 첫째, 화원동산을 방문한 날 운이 좋으면 대낮에 창공을 날아다니는 ‘인간새’(행글라이더, hang-glider, 人力滑空機)를 실감나게 볼 수 있다. 둘째, 멀리 앞산의 뒷면 풍경이 그 어디보다도 뚜렷하게 조망된다. 셋째, 노을이 질 무렵에는 사문진교와 낙동강 물 위로 흐르듯 저물어가는 황혼의 빛깔도 감상할 수 있다. 넷째, 화원동산이 답사자에게 주는 가장 뛰어난 선물- 금호강과 낙동강이 만나면서 창조해낸 달성습지의 장관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사문진교를 넘어가면 경북 고령이다. ‘대구’를 답사하는 여행이라면 이제 발길을 돌려야 한다. 게다가 대구에는, 조금 전에 지나온 상화 묘소만이 아니라, 들러야 할 곳이 더 남아 있기도 하다. 인흥서원, 문씨세거지 등이 바로 그곳이다. 

▲인흥서원

인흥서원과 문씨세거지는 비슬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서 있다. 그 간격만큼이나 이 두 답사지는 ‘옷깃을 스치는 인연’ 이상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진 사이이다. 그것을 입증하는 유물이 바로 문씨세거지 앞밭에 버려진 듯 남아 있는 인흥사지(仁興寺址) 석탑이다.

현재 문씨세거지로 정착된 마을 부지에는 본래 인흥사라는 절이 있었다. 그런데 왜란의 와중에 절이 불에 타 없어졌다.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던 3층석탑은 경북대학교 야외박물관으로 뒷날 옮겨졌고 절터 땅[地지]에는 문씨(文氏) 문중이 들어와 대대로[世] 거(居)주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인흥마을이라는 이름까지도 ‘(남평)문씨(본리)세거지’로 더 알려졌다.

▲문씨세거지 담장

문씨세거지 맞은편에 남아 있는 인흥서원은 명심보감 판본이 보관된 것으로 이름 높은 서원이다. 이곳의 명심보감 목판본 31매는 국내의 다른 판본들에 비해 용어 구사가 정확하고 오자가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율곡 등 고명한 유학자들의 서문과 발문도 실려 있어 뛰어난 학술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 판본은 고려 충렬왕 때의 대유학자 추적(秋適, 1246∽1317) 선생이 편저했다.

1363년에 목화씨를 우리나라에 들여온 문익점(文益漸, 1329∼1398)의 후손 문세근이 대구로 옮겨와 정착하고 다시 문경호가 지금의 인흥마을에 터를 잡은 이래 남평문씨 일가는 수십 채의 고가(古家)들을 뽐내면서 이곳에 살아가고 있다. 그 고가 중에서는 손님도 맞고 일가친척 회의도 열었던 수봉정사(壽峰精舍)와, 학문과 수양의 요람이었던 광거당(廣居堂)이 뛰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1910년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 세운 인수문고(仁壽文庫) 또한 독특한 품격에 힘입어 뛰어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1만여 권의 장서와 문중 보물들을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시 큰 서고(書庫)까지 지어 마을 사람들에게 도서관 역할도 감당하고 있다. 비바람 속에 버려진 채 풍찬노숙하고 있는 다른 곳의 한옥들과는 달리 문씨세거지는 오늘도 빼어난 주거지이자 문화유산으로서 당당한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언제 가도 문씨세거지의 고가들은 나날이 새롭게 빛을 반짝이고 있다. 특히 좌우로 흙담이 길게 이어진 동네 안 골목으로 들어갔다가, 저 아스라한 길 끝에 팔각정과 산 능선이 걸쳐 있는 풍광을 보는 순간, 누구나 ‘이런 곳에서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 꿈을 꾸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장자의 ‘나비꿈’에 그칠 뿐, 그는 곧 APT로 돌아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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