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날] 정만진의 대구여행 (29) 가창 일대

녹동서원과 조길방가옥
뉴스일자: 2013년08월31일 01시44분

▲의자이랑묘

정확히 언제인지는 불분명하고, 그저 조선 말기, 부부가 들에 일을 나간 사이 집에 불이 났다. 일곱 살 누나는 세 살짜리 남동생을 살리려고 품에 안은 채 엎드려서 버텼다. 누나는 죽고 동생은 살아나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 동생은 뒷날 누나의 무덤 앞에 ‘義姉李娘之墓’ 여섯 글자를 새긴 비석을 세웠다. ‘의로운 누나 이랑의 무덤’이라는 뜻이다.

대구직할시 편 <대구의 향기>에 따르면, 본디 이 무덤과 비석은 수성구에서 경북 청도로 넘어가는 중간쯤인 냉천동의 대로변에 있었다. ‘가창면 냉천동 길가에는 義姉李娘之墓(의자이랑지묘)라는 조그마한 비석이 서 있고’ 하는 표현을 보면 말이다. 그런데 지금 이랑지묘를 찾아가보면 결코 길가에서는 볼 수가 없다. 일반인은 다니지 않는, 기도원으로 들어가는 좁은 산길을 한참 거슬러 올라가야 가까스로 볼 수 있다. 누가 무슨 이유로 이 무덤과 비석을 이런 외진 곳으로 옮겼을까.

아마도 신작로를 낸다고 그렇게 한 모양이다. 하지만 길보다 정신이, 차보다 사람이 중요하지 않을까. 수성구를 벗어나 달성군 가창면으로 가는 답사 여정의 첫머리에서, 이랑비를 바라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랑비는 도로의 오른쪽 산비탈에 있다. 물론 대구에서 나가는 것을 기준으로 한 설정이다. 가창면 답사는 걸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차를 몰고 도시를 빠져나갈 때의 오른쪽 면에 있는 것들부터 보고, 돌아오는 길에 그 반대편의 것들을 보는 식으로 여정을 잡는 것이 마땅할 터이다. 그래서 이랑비부터 보았다.

가창면 답사의 꽃은 녹동(鹿洞)서원이다. 수성구 만촌동 모명재가 명나라 장수 두사충의 귀화(歸化)가 낳은 유적이라면, 가창의 녹동서원은 왜국 장수 사야가(沙也加, 우리식 이름 김충선)의 귀화가 낳은 유적이니 좋은 대비가 된다. 그러나 그 둘이 쌍벽을 이룬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모명재는 반쯤 퇴락한 고가 한 채와 집 뒤의 무덤이 전부이지만, 녹동서원은 그 규모와 역사적 의미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김충선은 임란 때 가등청정의 좌(左)선봉장으로 참전했던 왜군 장수이다. 그러나 본디부터 평화를 사랑하여 전쟁에 반대했고, 당시 왜국 국내의 집권 세력에 비판적이었던 장수로 전해진다. 조선에 총 만드는 기술을 전한 그는 귀화 이후, 왜란은 물론 이괄의 난, 병자호란 등에서도 큰 공을 세워 웬만한 조선인 장수보다도 더 이름이 높아진다. 녹동서원도 조선인 선비들이 상소하여 1789년(정조 13)에 세워졌다.

▲녹동서원

녹동서원은 2011년 중건(重建)되었다. 전시관 겸 교육장인 충절관은 본래부터 건립되어 있었지만, 한일우호관이라는 이름의 현대식 건물을 산뜻하게 새로 신축하였다. 녹동사(鹿洞祀)를 새로 지었다. 모명재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말이다. 

녹동서원은 우록동(友鹿洞)에 있는 서원이라는 뜻이다. 산에 둘러싸인 마을의 땅이 소[牛]의 굴레[勒]처럼 생겼다 하여 본래 우륵(牛勒)마을이라 불렸으나, 김충선이 ‘사슴[鹿]을 벗[友]하고 살 만한 땅’이라면서 이곳에 거주하기 시작한 이래 그렇게 지명이 바뀌었다.

녹동서원에서 계속 산속으로 들어가면 백록(白鹿)리가 나온다. 마을의 오른쪽 끝에 남지장사가 있는데,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승병(僧兵)들을 훈련할 때 흰 사슴이 나타났다고 하여 그 이후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남지장사

남지장사는 조선 초기의 고승인 무학대사가 수도를 한 절이다. 남지장사라는 이름은 팔공산의 북지장사에 견줘 그렇게 붙여졌다. 이 절은 684년(신문왕 4)에 창건된 신라 고찰로 전하지만, 우리나라 여느 절과 마찬가지로 목조로 지어졌기 때문에  당시 건물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남지장사에서는 특히 청련암(유형문화재 34호)이 볼 만하다. 대웅전 등 사찰의 본채들과는 떨어져 오른쪽 산속에 외따로 숨어 있는 청련암은 밖에서 보면 그저 일반인의 가정집으로만 여겨질 정도로, 사찰 건물로서는 너무나 범상하다는 것이 특이점이다. 하지만 보통 때에는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고려 개국공신인 전이갑, 전의갑 두 형제 장군을 기리는 한천서원은 녹동서원에서 대구로 돌아오는 도중, 대략 이랑비와는 도로를 마주하고 반대편 지점에 있다. 이랑비와 마찬가지로, 도로변에서 어느 정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한천서원

한천서원의 건물은 1838년(현종 4) 창건 당시의 것은 아니다. 지금부터 불과 20년 전인 1989년에 복원된 것이다. 그 탓에, 한천서원은 달성군청 홈페이지의 서원 소개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불우이웃’ 신세가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서원에는 색다른 볼거리가 하나 있으니, ‘대한민국 제12대 대통령 전두환’ 명의의 기념식수 비석이 바로 그것이다.
  
잠깐, 한천서원 들어가는 길로 우회전하기 직전에 길가 교회의 뒤쪽을 둘러봐야겠다. 교회 뒤에 있는 고인돌들을 보려는 것이다. 일제 초만 해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은 고창보다도 대구에 더 고인돌이 많았다더니, 이런 곳에까지 고인돌이 산재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말이 실감이 난다.

먼 산을 배경으로 고인돌들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보면서 문득 ‘이곳이 시내에서 먼 덕에 이 고인돌들이 사람의 손을 타지 않고 이렇게 남아 있구나!’하는 생각에 젖는다. 고인돌이 왜인들과 부잣집, 또는 관공서의 치장물로 잡혀 가지 않고 이렇게 살아 있는 것만 해도 그저 반갑다. 하지만 명색이 ‘대구시 기념물 14호’인데도 이토록 방치되고 있다니, 어쩐지 격세지감(隔世之感)을 준다. 아득한 옛날에는 누군가의 무덤이었거나 소중한 종교적 표식이었을 텐데, 이제는 그냥 못생긴 돌덩어리로 천대받고 있다니! 

▲조길방가옥

고인돌과 한천서원을 보고 나면 이윽고 가창면의 끝 부분이다. 그대로 달리면 수성구 안으로 진입한다. 하지만 놓치면 안 되는 답사지가 남았다. 가창댐 쪽으로 좌회전을 해서, 지금부터 약 200년 전인 조선 후기의 초가집 ‘조길방(趙吉芳) 가옥’을 찾아가야 한다. 초가집이 이렇듯 오래, 이렇게 말끔하게 남아 있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국가 중요민속자료 200호로 인정받았다. 집을 지은 조길방의 이름이 역사에 남은 것이다.

조길방은 칠기나무로 된 보(기둥을 연결하는 나무)를 사용하여 집을 지은 것을 아주 자랑스러워했다고 전한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는 속담처럼, 정성을 쏟아 최선을 다했으니 그에게 유방백세(流芳百世)의 영예를 선사해도 지나치지는 않으리라.

조길방가옥 마루에 걸터앉아 시골에 사는 정취를 맛본다. 본채 옆에는 가을이면 탐스러운 모과가 노랗게 무르익어 찾아온 사람들을 따사로이 반겨준다. 그보다 조금 늦은 만추에는 저 아래 정면으로 내려다보이는 밭두렁 위에 치렁치렁 매달려 있는 홍시들이 고운 빛깔로 사람을 매혹한다. 언제나 쉬지 않고 콸콸 흘러내리는 계곡의 물소리는 항상 깨어 있으라는 준엄한 꾸짖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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