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날] 정만진의 대구여행 (25) 동구 일대

왕건 유적, 망우공원
뉴스일자: 2013년07월06일 05시12분

대구 동구에 있는 역사유적과 문화유산을 두루 보려면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왜냐하면, 대구 최고의 ‘보물’ 보유지인 팔공산이 동구에 있기 때문이다. 또 동구를 답사하는 길목에 있는 망우공원도 만만찮은 시간을 요구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동구를 답사하는 여정에 팔공산을 포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팔공산은 별도로 날을 잡아도 하루 만에는 벅차다. 다만 망우공원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수성구에 소재하지만, 심리적으로는 동구의 출입구에 있으므로, 오가는 길에 둘러보는 것이 좋다. ‘도랑 치고 가재 잡자’는 말이다.

여정은 둘 중의 하나. 망우공원→백불고택→용암산성→첨백당→도동 측백수림→문창공영당→불로고분군→독좌암→신숭겸장군 유적지→신암선열공원의 순으로 둘러보는 것이 하나요, 다른 하나는 그 역순이다. 그렇게 다녀야 ‘왔다갔다, 오락가락’ 헤매지 않고 경제적인 답사를 할 수 있다.

망우공원은 경북 영천 방향으로 가는 대구의 출입구에 있다. 동구의 끝은 망우공원 옆을 흐르는 금호강변의 반야월이지만, 사람들의 의식은 망우공원을 넘을 때 이미 ‘대구를 떠나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만큼 강을 건너는 행위는 사람의 지리적 정체의식을 지배하는 것이다. 강은 국경이기도 하고, ‘공무도하가’나 ‘서경별곡’이 말해주는 바와 같이 이별의 상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망우공원에는 볼 것이 많다. 특히 임진왜란 방어의 민간인 주역 ‘홍의장군’을 기리는 기념관과 동상이 있다. 또, 왜란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임란의병관도 산뜻하게 지어져 있다. 그리고 친일파 박중양이 1906년∽1907년에 허물어버린 대구읍성의 남문이었던 영남제일관도 1980년 이곳에 복원되어 있고, ‘비 내리는 고모령’ 노래비도 있다.

▲영남제일문

그뿐이 아니다. 대구의 독립운동사에서 총본부 역할을 한 조양회관도 있다(1922년 건립, 1982년 현재 위치로 이전). 조양회관(등록문화재 4호)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일 대구의 청년들이 가장 먼저 뛰쳐나와 만세를 불렀던 건물이다. 조양회관 앞에는 대구 항일운동의 중요한 인물인 서상일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방문객을 기다리고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마시던 옥천이 지금도

금호강을 건너 동촌 안에서 왼쪽으로 비행장 담을 타고 들어가면 둔산동에 닿는다. 둔산은 왕건의 군대가 주‘둔’한 ‘산’이라는 뜻이다. 둔산동의 본래 이름은 ‘옻이 많이 난다’는 데서 유래한 옻골마을로, 안으로 들어서면 대단한 옛날 와가들이 즐비하여 답사객을 황홀하게 만든다. 옻골마을의 한옥 중에서 한가운데에 있는 저택이 ‘백불고택’(중요민속문화재 261호)이라 불리는 경주최씨 종가이다.

▲백불고택

백불고택은 대구에 남아 있는 주택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본채는 1694년(숙종 20)에 지어졌고, 사랑채는 1905년(고종 42)에 중건되었다. 이 고가들에 백불고택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최씨 문중이 낳은 대학자 최흥원(崔興遠)의 호가 백불암(百弗庵)이기 때문이다. 최흥원은 세상에 알려지지 못한 채 쓸쓸하게 묻혀 있던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교정하고 필사하여 ‘역사의 책’이 되도록 만든 거유(巨儒)로, 마을에 공전(公田)을 마련하여 백성들의 세금을 대신 내 주고 휼빈고(恤貧庫)를 두어 굶는 이가 없도록 한 ‘실천하는 선비’였다.  

백불고택에서 동촌으로 곧장 나오지 않고 고속도로 아래를 지나면서 바로 우회전하면 그대로 도동에 닿는다. 이 길의 끝은 고속도로가 하늘을 덮는 지점이다. 고속도로에 닿기 직전에 오른쪽 산비탈을 보면 주차장에 안내판이 하나 서 있다. 용암산성과 옥천 안내판이다. 용암산성 정상까지 오르는 데에는 30분가량 걸린다.

답사객이 이 등산로를 오르는 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정상 턱밑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이 떠 마시면서 결사항전했던 우물에서 아직도 물이 샘솟고 있는 신기한 광경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이름 옥천(玉泉)이 결코 허명(虛名)이 아니다.

▲옥천

또 하나는, 옥천 옆에서 바라보는 팔공산의 전경이 장쾌하게 사람의 마음에 사무쳐온다는 점이다.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지는 팔공산의 위세를 바라보노라면, 등산 끝에 밀려오는 노곤함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문득 꿈을 꾸는 듯한 무아지경으로 젖어든다. 켜켜이 싸인 산줄기들이 그려내는 아득한 빗살무늬는 답사객을 선사시대의 풍경 속으로 황홀하게 이끌어간다.
 
일제의 광기를 확인하고 싶다면 도동으로
 
용암산성 옥천에서 내려와 우회전하면 100m도 못 가서 작은 다리를 건너게 된다. 거기서 또 우회전하여, 왕건이 도주해온 길을 거꾸로 따라가 본다. 평광동 입구의 효자 강순항 정려각(孝子姜順恒旌閭閣/문화재자료 35호)에서 오른쪽으로 난 새 길로 들어가면 첨백당(문화재자료 13호)과 시량리[失王里]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닿는다. 농협 창고 앞이자 버스 종점이다. 여기서 왼쪽으로 들어가 굽이굽이 좁은 농로를 거쳐 길이 끝나는 곳까지 가면, 왕건이 앉아 있다가 사라진 시량리가 있다. 몇 집 안 되는 작은 동네 복판에는 모과가 탐스럽게 달린 나무가 있어 이채로운데, 그 모과나무 바로 뒤편의 사과밭에 신숭겸장군유허비(遺墟碑)가 있다. 물론 유허비(문화재자료 46호)는 비바람을 피해 비각 안에 갇혀 있다.

▲왕건과 신숭겸 장군 유적

돌아 나와 농협 창고 앞에 다시 서면 왼쪽 작은 다리 옆에 충신 효자 비석군이 줄을 지어 서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이 풍경만으로도 첨백당 마을이 예사롭지 않겠다는 느낌을 받는다. 첨백당은 단양 우씨들이 효자 우효중과 선비 우명식을 기리고,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1896년(고종 33)에 지은 건물이다. 우명식의 묘소가 있는 잣[栢]밭 골짜기를 바라보며[볼瞻] 서 있는 집[堂]이라는 뜻에서 첨백당(瞻栢堂)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 문화재자료 답사에서는 특히 눈여겨볼 것이 있다. 첨백당 앞 너른 터에 말끔하게 자라 있는 소나무 한 그루이다. 그 이름 ‘ 소나무’.

▲광복소나무

해방을 맞아 이 마을 청년들이 심었다(우하정, 우채정 등). 소나무 앞에는 소박한 비석 하나가 서 있다. 비석에는 세로로 ‘解放 紀念’(해방 기념)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소나무도 사람 키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고, 비석도 무릎밖에 안 오는 조그마한 것이지만, 그 앞에 서면, 이 세상의 어느 기념석을 보는 것보다 더 진한 감동이 일어난다. 조금만 세속적 지위를 얻으면 국민의 세금으로 아무 곳에나 기념식수를 하고, 그 앞에 자기 이름 석 자를 새겨넣은 기념석까지 세우는 일이 비일비재한 천박 사회를 살면서, 이런 나무와 비석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잔잔한 기쁨이다. 사진의 대상이 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도 이 소나무 앞에서만은 왠지 기념 촬영을 하고 싶어질 것이다.

길을 돌아 나오면, 용암산성 아래 주차장 건너편에 보이던 작은 봉우리가 눈길을 끈다. 너무 작아 산이라고 부를 것도 없지만, 그래도 평지에 불쑥 솟았으니 결코 봉(峰)은 아니다. 이름이 ‘향기가 나는 산’- 향산(香山)이 된 까닭은, 천연기념물 1호인 측백수림으로 울창하게 뒤덮인 풍치를 보면 과연 그럴 만하다고 헤아려진다.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측백나무가 자랄 수 있는 가장 남쪽이다. 그래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이다.

▲도동 측백수림

그런데 향산 앞에서 우리는 문득 말을 잊는다. 죽은 측백나무나 기타 잡목을 제거하려고 측백나무 울창한 절벽에 인부들이 올라가 공사를 했는데, 놀랍게도 사이사이에 시커먼 굴들이 나타난 것이다! 일제가 판 전쟁용 석굴들이다. 천연기념물 측백나무 숲속의 암석을 깨고 뚫어 전쟁용 굴을 판 참혹상을 보면, 일제의 광기(狂氣)가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삼국시대 고분이 200여 기 남아 있는 불로고분군
 
향산 오른쪽으로 난 길로 들어가면 신라 말의 문장가 최치원(857∽?)을 모시는 문창공영당이 있다. 측백수림을 왼쪽에 두고 빙 둘러 둥글게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금세 나타나는데, 이름 끝이 영당(影堂)인 것을 보면 최치원의 초상화를 모시고 있는 사당인 게 분명하다. 하지만 불쑥 찾아온 답사객에게 1860년경에 그려진 전신 좌상(全身坐像)을 관리인이 내놓을 리는 만무하니 지나친 욕심은 부리지 말아야겠다.

문창공영당에서 돌아 나와 불로동 고분군(사적 262호)을 찾아간다. 불로동의 뒷산 전체가 거대한 고분군이니, 주차장에서 바라보아도 실로 엄청나다. 본래는 현재 복원된 것들보다 훨씬 더 많이 있었지만, 지금도 삼국시대의 것으로 여겨지는 고분이 181기나 남아 있어 ‘지겹도록’ 볼 수 있다.

▲불로고분군

대구에는 비산동, 내당동 등지에 많은 고분군이 있었지만 도시 확장에 밀려 다 사라졌다. 불로동 고분군만이 거의 유일하게 남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대가야 고분군’을 찾아 경북 고령 주산으로 발걸음을 하지 않는 한 불로동은 대구답사의 필수 여정이 될 수밖에 없다. 나이 든[老] 사람은 보이지 않고[不] 아이들만 있다고 해서 왕건이 이 마을에 불로동(不老洞)이라는 이름을 붙였다지만, 불로동은 무수한 고분을 거느린 채 당당히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불로동에서 팔공산 쪽을 보면 왕건군(軍)이 견훤군에 부서진[破] 파군(破軍)재 아래에 봉무동이 보인다. 그러므로 이곳에도 왕건의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은 자명하다. 독좌암과 독암서당이 바로 그것이다. 독좌암은 왕건이 혼자[獨] 앉아[坐] 있던 바위[岩]라는 뜻이고, 대도로 건너편 마을 안에 있는 독암서당의 이름 역시 같은 어원에서 유래했다. 독좌암은 봉무정 바로 앞 개울가에 있다. 요즘의 동사무소 역할을 했던 봉무정은 개인(최상룡)이 세운 대구 지역 유일의 공공건물이라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1875년 건축). 봉무정은 대구 지역 성터 중 가장 규모가 작은 봉무토성(기념물 4호) 비탈에 있다.

신숭겸유적지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만

파군재 삼거리의 신숭겸 장군 동상을 쳐다보며 좌로든 우로든 고개를 넘으면 지묘동의 ‘신숭겸장군유적지’(기념물 1호)에 들어간다. 신숭겸이 황포를 대신 입고 적을 속여 왕건을 무사히 구출해낸 신묘(妙)한 지(智)혜의 땅이라고 해서 마을 이름이 지묘동이 되었다. 마을 뒷산(山)이 곧 왕(王)건이 넘어서 도망을 친 왕산(王山)이다. 이곳이 곧 왕건이 대패하고 신숭겸 장군이 죽은 곳이다.

왕산 바로 앞 일대는 신숭겸 장군을 제사지내는 표충사를 비롯하여 표충단, 충렬당, 순절비 등등 유적과 건물들이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공식 이름은 신숭겸장군유적지이지만, 무심코 보면 한옥으로 된 건물을 여러 채 거느린 깔끔한 공원으로만 여겨진다. 그만큼 이 유적지는 단정하다. 내용으로든 형식으로든 신숭겸장군유적지는 괜찮은 답사지로 추천하여 전혀 손색이 없다는 말이다.

이곳에 서면 어쩐지 마음이 애잔해진다. 왕건이 신숭겸을 위해 세웠다는 지묘사(智妙寺)는 조선 시대도 아닌 고려 말에 진작 없어졌고, 피비린내 나는 아비규환 속에 파묻혔을 장졸들의 비명  또한 귀 기울여 애써 들으려 해도 아득하기만 하다. 그저 유적지에는 철모르는 아이들과 그 부모의 유쾌한 웃음소리만 가득할 뿐이다. 이것이 정녕 역사무상인가. 

 
▲신암선열공원

신암선열공원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평생을 보내고 떠나가신 대구 지역의 선열(先烈)들이 계시는 곳이다. 전국적으로 자기 지역의 선열들을 한곳에 모셔 공원을 조성한 곳은 대구밖에 없다. 동구청과 영진전문대 중간쯤 되는 언덕 위에 있다. 선열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단충각에 들어서면 대구 지역 독립운동의 역사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여기야말로 대구 청소년들의 필수 답사 여정이다. 오늘 여정의 마지막은 이렇게 ‘교육적’으로 막을 내린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다. ✺

* 더 알아보기 / 백불고택 최흥원과 <반계수록>

17∼19세기, 우리나라에는 현실개혁적 기풍의 유학― 실학(實學)이 크게 일어났다. <반계수록>은 류형원이 저술한, 실학을 처음으로 체계화한 책이다. 그러나 1670년에 <반계수록>을 완성한 류형원은 저술을 마친 후 불과 3년 뒤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 후 <반계수록>은 70년 이상을 묻혀 지냈다. 1748년, 당시 44세이던 최흥원은 류형원의 아들로부터 <반계수록>을 빌려보게 된다. 책을 읽은 그는 뛰어난 개혁론에 찬탄하여 직접 붓을 들고 전문을 필사했다. 이 필사본은 지금도 백불고택에 보관되어 있다.

다시 20여년 후, <반계수록>의 소문을 들은 영조가 경상감사에게 책을 교정한 후 간행할 것을 명했다. 여러 선비들은 최흥원이 적임자라고 추천했고, 최흥원은 백불고택의 보본당에서 교정을 시작했다가 뒷날 동화사에 설치된 교정소에서 일을 마무리하였다.

드디어 1770년, <반계수록>은 대구감영에서 발간되어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된다. 최흥원이 없었더라면 류형원의 실학적 개혁론은 빛을 보지 못한 채 묻히고 말았을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 더 알아보기 / 동암 서상일 선생

동암(東庵)은 대구의 대표적 독립운동가이다. 1887년 7월 9일 태어난 동암은 22세이던 1909년 안희제, 김동삼, 윤병호 등과 함께 무장항일 투쟁단체인 대동청년단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1910년 보성학교를 졸업할 때에는 경술국치에 항의하여 9인 결사대를 조직, 서울 주재 9개국 공사관에 독립선언문을 배포한다. 1917년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동암은 귀국하여 3.1운동에 참여했다가 내란죄로 투옥된다.

감옥에서 출소 후 동암은 인재양성과 국민의식 진작이 민족의 진정한 독립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인식, 고향인 대구로 내려온다. 동암은 거의 혼자 재정을 부담하여 (달성공원 앞 옛 원화여고자리에) 대지 500평 건평 138평의 2층 건물 ‘조양(朝陽)회관’을 짓는다. 압록강에서 가져온 낙엽송을 사용하여 집을 짓고 외관을 붉은 벽돌로 장식한 이 목조 건물에 ‘아침(朝)해(陽)가 가장 먼저 비치는 집’이라는 뜻의 이름을 붙인 것은 은근히 민족의식을 드러낸 것이었다.

동암은 조양회관을 대구청년들의 정신적 구심지로 만든다. 1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 회의실, 사무실, 인쇄공장, 사진부에 오락실까지 갖춘 조양회관에서는 시국, 국산품 애용, 상공업 진흥 등에 관한 강연회가 줄을 이었고, 밤에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했으며, <농촌>이라는 잡지도 발간했다.

1929년 10월 18일 동암은 장진홍 의사의 조선은행 폭파사건 가담 혐의로 구속된다. 해방 후 동암은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지만, 이승만 독재에 항의하다 구속되기도 한다. 동암은 1960년의 5.16 이후에도 군사정부에 의해 기소되는데, 재판이 계류된 상태에서 1961년 4월 18일 타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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