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이란 관형사 뒤에 따르는 명사는 '처음'이란 시간의 의미 때문에 기억의 서랍장에서 오랜 기간 존재한다. 또한, 그것은 선명한 기억의 나이테를 만들고 통증과 관계없이 자주 회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사람이 태어나서 자신이 사는 시간과 공간을 넘는 경험은 단연코 '첫 외국여행' 일 것이다. 지도 위에 존재하는 가상의 선 - 경도와 위도를 넘나드는 체험은 말 그대로 세포 하나하나에 새겨지는 느낌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 세상이 모두 우리 동네 같으리란 믿음으로 살아가던 내게 시공간을 건너는 경험은 오로지 '책'이란 비행기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분명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첫 책이 있겠지만, 내 기억에는 초등학교 4학년 여름 방학에 읽은 <키다리 아저씨>이다. 내가 살던 동네는 고향에서 둑 판자촌 다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더구나 우리 집은 동네 언덕 위에 자리하여 구질구질한 동네 살림살이가 한 눈에 굽어 보였다. 옆집에는 허구한 날 악다구니를 퍼부으며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 형제가 소문난 동네 깡패인 까치네가 살았다. 언덕 위 우리 집 바로 아래는 올망졸망 다섯 가구가 모여 살았다. 그 앞집은 과부 미장원 아줌마네 집이었다. 가끔 동네 골목에서 마주치는 아줌마의 목덜미에는 보라색 멍이 선명했다. 맞은 편 언덕에는 미친 어머니랑 산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똥 푸는 아저씨가 살았다.
그때 나는 고아원 보모 ‘주디’에게 동병상련을 느꼈다. 가난한 우리 동네가 싫었고, 내 방도 없는 우리 집은 더더욱 싫었다. 주디가 오롯한 공간을 갈망하듯 나도 혼자만의 닫힌 공간이 필요했다. 주디가 키다리 아저씨의 도움으로 대학을 가고, 좋은 옷을 입고, 기숙사지만 자신의 공간을 갖게 되었을 때, 주인공과 나는 하나가 되었다. 후원인 팬들턴 씨의 도움을 왜 거절했는지 몰랐지만 어쨌든 결말은 해피엔딩이었다. 신데렐라 이야기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처럼 초등학교 4학년 딸아이와 다시 읽은 <키다리 아저씨>는 왕자를 꿈꾸는 신데렐라가 아니었다.
작가를 꿈꾸는 주디는 대학에서 생전 처음 보는 책의 세계에 빠졌고, 그녀가 읽은 소설은 내게도 읽고 싶은 욕망을 자극했다. 게다가 주디는 불쌍한 고아 소녀가 아니라 불필요한 도움을 거절할 줄 아는 독립심 강한 인물이었다. 괜히 세상의 어두운 고민을 혼자만 진 것 같은 감상적인 열한 살의 나를 책 읽는 즐거움으로 이끈 <키다리 아저씨>는 그리하여 내 인생의 첫 책이다. 이렇게 어떤 책은 우리를 독서의 열락이 주는 첫걸음에 동반하면서 첫사랑 같은 추억으로 남는다.
또, 어떤 책은 읽는 이의 사고방식과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좋은 책은 사람의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다음으로 소개할 이 책을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나는 크게 달라졌다. 마흔 즈음에 여성주의 인문학 모임에서 도반들과 함께 읽은 <철학과 굴뚝청소부>는 각 장을 읽을 때마다 ‘근대적인 나’를 돌아보게 했다. 그 책은 근대 철학의 시작 데카르트부터 가장 가까운 현대철학자 들뢰즈까지 철학의 주요 흐름을 다루었다. 근대와 탈근대, 탈근대의 의미, 탈근대를 위해 필요한 것과 탈근대적으로 사고하기 위해 무엇이 요구되는가를 문제 제기한다.
일명 <철․굴>을 만나기 전까지 독서생활은 아이를 위해 읽어주는 동화책, <똑똑한 아이로 키우는 법>과 같은 육아 서적, 간혹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는 것이 전부였다. 대학 시절 동아리 활동에서 접한 철학책은 마르크스주의를 해설한 것이 대부분이었고, 철학책은 모두 그런 줄 알았다. 그리고 결혼 후 책 읽기는 골치 아픈 시댁과의 갈등이나 육아 스트레스, 남편과의 사회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부딪침이 피곤하니, 되도록 현실을 잊어버리고 싶은 현실 도피의 수단이었다.
그러니 거의 이십 년 만에 다시 접한 철학책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고 생머리를 앓게 했다. 하지만 다행히 함께 고민하며 읽으니 혼자 읽었으면 지식 쌓기에 불과했을 철학적 주제가 삶의 자세를 돌아보는 질문으로 돌아왔다. 특히, ‘타자’란 개념을 통해 그전까지 알고 있던 데카르트식의 생각하는 존재‘주체’의 개념을 흔들어 놓았던 라캉, 호명되는 주체를 설파한 알튀세르, 역사성을 통해 광기와 생체권력, 지식권력의 계보를 얘기한 푸코,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가 우선이라고 말한 욕망의 철학자 들뢰즈와 같은 현대철학자들은 내게 듣도 보도 못한 잡놈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통해 내 안의 근대성을 만날 때마다 제일 부끄러웠던 점은 아이를 대하는 내 모습이었다.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아이를 미숙하고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여겨 늘 혼내는 자세로 일관했었다. 칸트식의 보편 논리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았고, 헤겔식의 정신만이 가장 고매하고 절대적이라고 여겼다. 마치 성경의 말씀처럼 진리는 어딘가에 존재하며 인간은 그것을 향해 매진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배제되는 것이 있다면 당연했다. 다름을 받아들이는 데 미숙했던 자신과 직면했고, 내 안의 욕망이 당연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타인의 욕망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놀랐던지 모른다.
그리하여 아이에게 품은 기대에 타인의 욕망이 얽혀 아이가 원하지 않는 사교육의 고통으로 밀어 넣는 것은 아닌가 반성하게 되었다. 더불어 공부했던 벗들과 끊임없이 고민을 나누면서 욕심 많은 나는 차츰 변해갔다. 그래서 철굴을 읽는 과정은 한 인간의 탈 근대화 과정이기도 했다. 여전히 내 안에는 근대성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그것을 자각할 때마다 책을 읽지 않았으면, 공부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행동을 깨닫는 것만으로 안도감을 느낀다. 세상에 책은 널렸다. 읽을 책은 쌓여만 간다. 다음에는 활자로 죽은 책이 아니라 내가 만났던 살아있는 책들에 관해 얘기하고 싶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책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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