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돋보기 버튼을 누르시면 더 큰 화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  | |
작품정보
사랑꽃. 33.3cm x 22cm, 캔버스에 아크릴릭. 2013년 작
아동미술교육
아이가 장차 대통령, 의사, 화가 등 훌륭한 인물이 되겠다고 장래희망을 이야기하면, 부모나 교사의 반응은 대체로 세 가지로 나뉘게 된다. 첫 번째는 ‘네가? 이 녀석! 공부도 안 하고 맨날 놀기만 좋아하고 말썽만 피우는 너는 절대로 안 돼! 꿈도 꾸지 마라, 네가 그런 사람이 된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며 아이의 꿈을 좌절시키고, 능력을 위축시키는 타입이다.
두 번째는 ‘그래! 너도 열심히 노력하면 그런 인물이 될 수도 있단다. 그러니 게으르고 산만한 태도를 고치고 한번 도전 해보자!’며 아이의 꿈을 인정해주고 현재의 모습을 개선시키려는 타입이다.
마지막은 ‘무슨 소리! 사실 너는 훨씬 큰 에너지를 가지고 있단다. 너의 미래는 무한하게 열려있으니 지금 작은 일들에 너무 위축되지 말고 더 큰 세상을 보자!’며 아이의 재능과 잠재력을 더욱 키워주는 타입이다.
아이들이 현재의 자신보다 더 나은 인물이 되겠다는 꿈을 가진다면, 그것이 어른의 기준에서 볼 때 아무리 황당하고 비현실적으로 보이더라도 너무 쉽게 판단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격려해주는 것이 좋다. 사실 부모는 본능적으로 자식의 안전과 안정을 가장 우선으로 고려한다. 그러니 불확실하고 위험해 보이고, 불안정한 모험을 하려는 자식을 보면 당연히 반대한다. 그러나 안전하게 보호만 받고 자란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소극적이고 의존적이 되어 사회활동을 하면서 적응을 하는데 애를 먹는 경우가 많다. 사회란 곳은 아무도 부모처럼 사랑과 배려만 해주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부모의 말을 잘 듣는 아이일수록 큰 인물이 되기도 어렵고, 부모 말을 잘 안 듣고 제 고집대로 살던 아이가 사회적으로 더 유능한 인물이 될 확률도 높다.
아이는 태어난 후 기어 다니고, 일어서고, 걷게 되면 어디론가 움직이려 하고 높은 곳으로도 자꾸 올라가려 한다. 위험한 것을 만지고 위태로운 일도 아무것도 모르고 덤빈다. 이것은 먼저 육체적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정신적인 부분까지 부모 곁을 떠나려는 본능적인 행동으로,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이다. 따라서 아이들은 자연과 더불어 잘 노는 것이 제일 큰 공부다. 그러나 자식의 안전이 가장 중요한 부모들은 아이를 보호한다는 일념 아래 이것저것 자꾸 금지시키고 주의를 주며 아이 자체의 성장보다는, 자신들이 바라는 모습대로 커 가도록 제어 하려 한다. 그것이 뜻대로 되면 행복과 만족을 얻고 그 반대인 경우는 실망과 분노를 느낀다. 그래서 자식이 자아가 강해 뜻대로 잘 안 움직여주는 경우 대체로 아이에게 실망하고 위의 첫 번째 타입처럼 반응하게 된다.
부모나 교사의 지나친 보호나 간섭은 논리, 수리, 암기력 향상 등 좌뇌 학습을 통한 이성적인 인간을 만드는 데는 어느 정도 효과적이나, 감성과 창의력 등 우뇌 활성화에는 역행한다. 좋은 그림을 그리자면 자유롭고 거침없이, 마음속에 있는 생각들이 쏟아져 나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어린아이가 가지는 축복받은 능력이다. 현대미술의 거장 피카소조차도 어린아이처럼 그리는 데 50년이 걸렸다고 고백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어린이의 때 묻지 않은 심성과 자유로운 표현력이 그만큼 훌륭하다는 뜻이다. 그 외에도 후안 미로, 폴 클레, 장욱진 화백 등 현대미술계의 대가들 가운데 작품 활동을 어린아이의 심성에 기댄 화가들이 상당히 많다. 원시 동굴벽화나 암각화 등에 나타난 그림들에도 어김없이 어린이와 같은 천진함과 솔직함이 그대로 배어있다. 이 원초적 표현력은 누구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타고난 것이다. 물론 그런 재능에는 개인차가 있겠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공통으로 이러한 표현력과 미적 유희를 지니고 태어난다.
동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을 어떤 식으로 제공해 주느냐에 따라 상황이 달라지고, 미술과의 거리감도 결정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이를 바라보는 교사나 부모의 교육에 임하는 태도에 따라 그 영향력은 크게 달라진다. 당연히 미술지도 또한 열심히 교사나 부모가 최상의 기준과 교육내용을 확보해 열심히 가르친다고 반드시 긍정적인 효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미적 감수성은 창의력과 자유로움이란 넓은 정신의 들판에서 방목해야만 건강하게 자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아동화에 대한 인식과 이해부족으로 종종 혼란스러워한다. 부모들은 우선 눈에 보이는 결과에 민감해서는 곤란하다. 예를 들어서 맨날 상도 받아오고 늘 우수한 실적을 자랑하는 곳인데도 아이가 재미없어하고 가기 싫어하는 교육장과 아무런 결과를 내지도 않고 별로 가르쳐주는 것도 없어 보이는데도 아이는 너무 흥미로워하고 기를 쓰며 가고 싶어 하고 재미있게 놀다 오는 곳이 있다면 후자가 미술교육을 제대로 해주는 곳이 분명하다.
모두가 하니까 우리 아이도 일반적 교육을 해야 하고, 나아가 누구나 안 하니까 우리 아이는 영재교육도 받아야 한다는 모순된 교육법에 현혹되어서도 안 된다. 내 자녀를 체육관에 보내는 주목적이 건강한 신체를 길러주는 것이듯, 미술교육을 시키는 것은 미적, 정서적 능력을 제대로 가꿔주자는 데 출발점을 두어야 한다. 어느 대회 수상경력이 화려하다는 등 실적 위주로 부모를 현혹하는 교육장은 피해야 한다. 아까운 시간과 경비를 써가며 오히려 아이의 창의력과 자유로운 심성을 망가뜨리는 일이 없도록 아동미술지도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어린아이의 미적 정서적 능력을 제대로 키워주고 곁에서 그 발달과정을 세심하게 지켜보며 아동화의 매력을 깨닫는 일은, 다름 아닌 부모 스스로 자신의 숨겨진 미적 심성을 일깨우는 길이기도 하다.
이처럼 아동미술교육도 ‘너는 안돼.’ ‘너는 해 낼 거야.’ ‘너는 훨씬 잘할 애야.’ 의 세 가지 마음가짐 중에 어느 지점에 서느냐에 따라서 부모와 교사, 아이들 모두가 미술로 행복한 세상을 만나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까지 자연스럽게 결정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 뉴스클리핑은 http://newsdg.jinbo.net에서 발췌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