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백목사의 예수읽기(21)

누가복음 24:1-12 "첫 소식 전달자"
뉴스일자: 2013년04월02일 17시33분

3월 31일은 기독교전례로 부활주일이다. 그런즉 오늘은 부활이야기를 하겠다.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예수의 탄생, 수난, 죽음, 승천이 모두 고귀한 이유는 결정적으로 부활 때문이다. 물론 케리그마(복음선포)는 죽음과 부활이 꼭 한 쌍으로 선포되어야 기독교 설교로 유효하다고 말하는데, 죽음도 부활 없이 그냥 죽음으로 끝났으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만큼 예수의 전기와 그리스도 되심을 가장 빛나게 해 주는 부분이 부활이다.

그동안 했던 부활주일 설교를 들여다보니, 괜찮은 표현들도 더러 있다.

예를 들면, "부활은 평등, 정의, 평화세상을 믿음이다"(2009년)

"부활의 실체를 과학으로 증명하는 일은 부질없는 일이다. 부활은 신앙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과학으로 증명한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과학으로 부정한다고 해서 신앙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2010년)

"뜻밖에도 성서는 부활에 대해 현상계에서 부딪히는 긍금증에 답하지 않는다. 부활 자체가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 도통 이해불가의 현상이다. 읽는 이에게 여러 모양의 궁금증이 있을 테지만, 복음서 저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일절 모른 체한다."(2011년)

"부활은 생물적으로 다시 살아남이 아니라, 죽음으로 표상된 과거 실존방식에서 벗어나서 전혀 다른 삶의 형태로 들어가는 것이다"(2012년) 등의 말을 했다. 하지만 부활에 대해 긍정적이고 찬란한 이야기만 한 것은 아니다.

"부활조차도 박제물이 돼서 지배체제의 전시물이 돼버렸다"(2011년)

박제물이라니? 제국의 지배와 더럽게 결탁한 율법체제에 이중삼중으로 발가벗겨지는 민중의 처참한 상황에서 더러운 먹이사슬의 구실인 희생제사를 단번에 허물어버리기 위한 예수의 십자가대속(죽음)과 부활의미가 민중의 해방과는 무관하게 교리적으로만 남아버린 현실 때문이다.

어째서 지배체제의 전시물이라 하는가? 부활에는 필수적으로 제국의 폭력에 삼킨 바 된, 십자가죽음이 있다. 그러므로 부활은 제국의 억압을 마침내 뚫고 나갔다는 저항의지의 되살아남이 있다. 하지만 교리는 이 모든 진실을 파묻어 버리는 종교적 세탁물이 돼 버린다. 누가 이 세탁을 가장 반길까? 당근 지배체제 가해자들이다. 

이렇게 머리를 싸매고 부활주일 설교를 매년 하다 보니, 점점 할 말이 떨어져 가는 것은 피할 수가 없다. 모든 설교자가 비슷하리라.

누가 앞에는 이미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이 있다. 누가 입장에서 두 복음서에 있는 내용을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자신도 부활이야기를 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 복음서마다 이야기의 차별성이 있다. 같은 소재를 말하지만, 강조점이나 주목하는 바가 다른 것, 공동체의 상황을 반영하는 저자의 의도와 저술목적이 담겨 있다.

그리고 본론을 말하기 전에 꼭 설명할 게 있다. 네 복음서 부활이야기에 공통으로 들어가는 어구가 있다. 바로 "안식 후 첫날 새벽"이다. 시간상으로는 안식일 다음날이라는 말이지만, 더 큰 함의가 있다. 그동안 사람들을 지배한 율법체제 방식으로 말하자면, 이레의 마지막 날인 안식일이 중요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안식일이 지나고, 이레의 첫날, 지금의 일요일 새벽에 안식일을 뛰어넘는 어떤 일을 벌인다. 이것을 멋있게 표현하자면, '동터오는 하나님나라를 마중 나간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누가의 부활이야기를 하자. 누가는 무엇을 주목하고 강조하였는가? 바로 여인들이다. 먼저 부활장면을 접하는 여자들의 반응을 보자. 무덤을 막은 돌이 굴려져 있고, 무덤에 예수의 시신이 없고, 느닷없이 천사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대면하는 상황이다. 마태에서 여자들은 크게 무서워했다. 마가에서는 여자들이 아예 넋이 나갔다. 그런데 누가에서는 당황한 정도다. 또 천사가 갑자기 그들 앞에 나타나자, 여자들은 두려워서 얼굴을 아래로 숙였다. 마가에서는 여자들이 도망쳤는데, 누가에서는 도망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훨씬 의연하다. 

누가복음에서 여자들의 차별성은 천사와의 대화에서 결정적으로 나타난다. 마가와 마태, 누가 모두 천사가 여자들에게 무엇을 말한다. "그분은 여기(무덤)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갈릴리에서 말씀한 것처럼, 죄인의 손에 넘어가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라고.

그런데 마태와 마가에서는 천사가 여자들에게 지시한다.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전하라", "그대들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말하시오"라고. 어법에서 확인하듯이, 천사말의 수령자는 제자들이다. 여자들은 전달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누가에서는 '제자에게 전하라'는 지시가 없다. 천사는 여자들에게 직접 말하고, 여자들도 당사자 자격으로 듣는다. 그 증거는 "여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회상하였다"(누가 24:8)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다. 여자들이 주체적으로 천사의 말을 소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제자들에게 알린 것도 천사의 지시가 아니라, 자신들이 주체적으로 판단해서 알렸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누가는 부활이야기 무대에 여자들을 중심에 세움으로써, 그리스도교 예수운동에 담긴 전복성과 평등성을 전파하고자 한다.

무엇이 전복성이고 평등성인가? 이 필자놈은 걸핏하면 전복, 평등을 뇌까리는데 도대체 뭐가 전복성이고 평등성이야 하는 반문이 드는가?

누가 24:10에 예수가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을 소개한다.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이름없는 여자들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붙은 여자였다.(누가 8:2) 귀신이 한 개도 아닌, 일곱 귀신이라 함은 포기할 수밖에 없는, 치유불능 상태였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예수가 고쳐주었다. 마리아에게 예수는 진정한 해방자이시다. 그러나 세속가치는 어디 그런가? 일곱 개의 고급배경을 가지고 있다면 모를까. 든든한 배경이 있는 사람이 말해야 더 신빙성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저자는 세속평판이 어떻든 간에 구애받지 않고, 예수 부활의 최초 소식자 중, 중심인물이 일곱귀신 들린 여자였다는 것을 담담히 증언한다. 두 번째 여자 요안나는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이다.(누가 8:3) 즉 종이다. 자유인이 아니다. 무엇을 증언하기에는 한참 모자라다.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는 과부일 공산이 크다. 남편이 있다면 자유롭게 예수와 동행할 수 없었다. 과부는 약자의 대명사이다. 절대적인 보호가 필요한 사람이 무엇을 주장한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듣는 사람에게 무게가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복음서 저자는 그들이 최초증언자라고 숨김없이 실토한다. 바로 여기에 전복성, 평등성이 있다.

부활세상은 즉 해방세상은 또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 중심이 돼서 열어갈 것이라는 암시가 이 보잘것없는, 존재감 없는 일련의 여자들을 통해 보여주는 메시지이다. 

반면에 이 소식을 받은 사도들, 즉 남자들은 여자들의 말을 어처구니없는 말로 듣고, 믿지 않았다. 사도의 수장 베드로는 무덤으로 달려가기는 했지만, 그저 이상히 여기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남자들의 한심한 모습은 무엇을 말함인가? 남성들로 짜인 교회지도자들의 무심함, 역동성을 상실한 지도력을 맹타하는 의미가 있다. 부활소식을 접하는 여자들과 남자들의 대조적인 모습을 통해서, 예수께서 민중을 갉아 먹는다고 비판한 이스라엘 기득권세력들, 인자를 십자가에 못 박은 부류들-장로들, 대제사장들, 율법학자들처럼 돼가고 있는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에게 각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이 부활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동력이 누구냐를 말해준다. 기득권 세력에서 소외된 우리의 동지들이다. 우리는 특권세력이 누리는 혜택에서 비켜나 있으므로 얼마든지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조건과 자질이 있다. 중요한 것은 내 영혼과 인격이 예수부활을, 사망을 이기는 생명을 수용하는 것이다. 평등세상을 구현하는 진리를 간직할 때, 우리도 의연하게 이 자리를 지키고 전위대로 설 수 있다.

동지들이여, 부활소식을 기꺼이 받아들이시라,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소식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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