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날] 민뎅의 사적인 시간 (1)

어떤 사랑도
뉴스일자: 2013년03월30일 02시45분

<글쓴이 주> 사람은 누구나 아티스트적 마인드가 '분명' 있다며 근거 없는 자뻑으로 어찌어찌 살아옴. 생각만 하고 글을 쓰지 못하면 어쩌나! 천성의 게으름에 허우적대다 일단 쓰기로 함. 여분의 시간을 책과 음악에 쓰며 여력이 되면 영화도 봄. '사적인 시간'은 말그대로 지극히 사적인, 중얼거림이라고 지금도 중얼중얼…안녕!

만추, 를 봤다.

시간은 돌고 돌아와 어느새 봄의 기운이 만발하는 즈음, 늦은 가을 그리고 안개가 자욱한 시애틀의 그와 그녀를 만났다. 오롯이 모니터와 하얀 벽이 마주한 채 나는 그들을 응시했다. 정처 없어 보이는 그들은 닮아 있는 영혼들 같다. 화면 가득한 안개처럼 그들은 희미한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옅어지고 옅어지고야 마는. 그러나 강렬한, 그래서 쉽사리 사라지거나 잊혀 지지 않는 사람들.

“오랜만이네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 어렵사리 입 밖으로 나온 그녀의 짧은 이 말은 그에게로 전해질 수 있을까. 그녀는 이렇게 그때 그 자리로 찾아왔는데, 아니 돌.아.왔.는.데… 그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가고 싶지 않은 어느 곳으로 갈 수밖에 없게 된 걸까. 어디에서 그녀에게 오지 못한 마음만 서성이고 있을까. 문득 현빈과 탕웨이의 재각색된 만추를 보면서 이만희 감독의 원래의 만추가 몹시 궁금해졌다.

‘어떤 사랑은, 가을날의 짧은 며칠만으로도 충분하다.
낯선 곳에서 만난 남녀가 짧은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지만 만추는 <비포 선라이즈>같은 순진한 설렘도 <비포 선셋>같은 막연한 희망도 남기지 않는다.
사랑의 과정과 결과, 혹은 시간에의 강박을 버리고 72시간이라는 스톱워치를 켠 채 시작되는 만추는 오히려 찰나를 영원으로 만드는 실험을 시작한다.
드라마틱한 일들은 모두 이 교차점 이전 혹은 이후에 일어나고 영화는 그 3일간의 여정을 고요하게 응시하며 훈과 애나 사이를 떠도는 미세한 무드의 변화에 집중한다. 타국을 떠돌던 유령들의 짧지만 벅찬 포옹.’

만추를 보고 난 후 검색을 하다 발견한 <텐아시아>의 백은하 편집장의 리뷰를 옮겨본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무언가 말하기 어려운 내 감정을 잇게 해주는 정서는 비록 아니지만, 그녀의 글은 꽤나 감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포 선라이즈나 비포 선셋 역시 좋아하는 영화지만 그렇구나, 낯선 곳에서 만난 남녀의 짧은 사랑이야기라는 공통의 요소가 있지만 참 다르구나. 그래, 다르다, 싶은 것이 어쩌면 적절하다 싶다.

어쩐지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영화와는 전혀 연관성이 없을지도 모를 생각들에 빠졌다. 지금 나는 어떤 혹은 어떠하지 않던 사랑에 있어서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되돌아가지도 못하는 상황에 갇힌 것이 아닌가 하는. 말 그대로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지금이라는, 그런. 비록 확실히 뻗어있던 길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앞만 바라보려 했기에 멈춰서야 하는 상황에서도 너무 깊이 들어와 길을 헤매며 돌아가지도 못하고 점점 미아가 되는 기분 같은 것 말이다.

그리하여 우습게도 어떤 사랑도, 어떤 사랑이라도 그것을 응원하지도 바라지도 혹은 비난하지도 못하겠는 상황에 빠졌다는 거다. 그래서 훈과 애나의 시선을 따라가면서도 나는 옥자가 마음에 걸렸다. 그녀의 웃음,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눈물, 그녀의 유혹, 그녀의 죽음이 마음 언저리에 걸렸다. 옥자는 옥자 나름의 방식대로 훈을 사랑한 것이다. 훈과 애나를 보며 며칠만의 시선으로도 사랑은 가능하다고 느끼는 것과 같이 옥자 역시 그랬으리라.

평생을 두고 영원할 수 있는 사랑을 바라거나 응원하기엔 지금의 내가 너무 아파서 그럴 엄두도 나지 않고, 사랑은 언제나 찾아올 수 있다고 확신에 차 말하기엔 내가 너무 약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짧은 시간만으로도 어쩌면, 영원마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여운의 영화를 보며 말도 안 된다고 고개를 저어보지만, 이내 슬퍼지고 마는 건 영원 따윈 믿지 않는다며 찰나의 연속만이 전부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도 영원을 기대할지도 모를 나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 두 눈을 멀게 할지도 모를 막막한 숲 속에서 길을 잃은 채 그저 내 슬픔을 핥느라 어떤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언제까지 아이처럼 기어이 엉엉 울어버리기만 할 것인가. 언제부턴가 그것이 경험한 것이든, 미래의 경험으로 예상하는 것이든 명확한 대답들을 내릴 수 있는 문제들이 없어졌다. 모두 사라져버렸다. 어떤 것에도 명확하기가 어려워졌다. 사랑에 관해선 특히나 그런 것 같다. 많은 사랑을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경로와 매체로 늘어가는 사랑에 대한 정의는 결국 점점 ‘없음’이 되어간다.

어떤 사랑을 우리는 존중할 수 있거나 비난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랑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르거나 부를 수 있을까. 다만, 어떤 사랑을 바랄 수는 있지만 어떤 사랑을 버리거나 우습게 볼 순 없는 것 아닐까. 과연 우리는 어떤 사랑을 탓할 수 있는 걸까?

어떤 사랑도 그 당사자인 본인 스스로가 비난을 하던 죄책감에 빠질 수는 있어도 제삼자일 내가, 당신이, 우리가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을 가로막을 자격 역시 타인인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물어본다. 과연 우리는 어떤 사랑을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설령 그것이 자신의 사랑이라 한들 온전히 비난할 수 있을까? 붙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다른 건 모르겠지만, 사람이 하는 수많은 행위 중 적어도 사랑은, 아니 적어도가 아닌 우리 삶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미칠 수밖에 없는 사랑에 있어서는 나와 너, 우리 둘이라는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는 지극히 사적인 영역인 것. 그런 것이 아닐까. 아니, 결국 그것뿐일 테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어떤 사랑도 비난하지도 탓하지도, 심지어 바라기도 어려워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내가 나는 너무 어려워지고 있다. 아직 이렇게 어렵기만 하다.

“당신을 원해요.”
이것만이 진실이고, 전부이다. 사실 그렇다. 나는 어떤 것보다도, 우리의 삶은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란 것을 너무도 잘 아니까. 오늘도 어제처럼, 그리고 내일도 여전히 엉엉 울어버린다고 해도 결국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랑도 가엽지 않은 것이 없고, 어떤 사랑도 쉬이여길 것이 없다.
사랑은, 그렇다. 그것이 어떤 사랑이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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