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날] 정만진의 대구여행 (16)

왕건은 염불암에 갔을까
뉴스일자: 2013년03월02일 00시45분

▲염불암 원경

왕건은 신숭겸이 전사한 지금의 신숭겸장군유적지 바로 뒤에 있는, 뒷날 왕이 넘은 산이라 하여 왕산(王山)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작은 산을 넘어 팔공산 쪽으로 도주한다. 왕건은 팔공산 동봉 거의 턱밑까지 내달아 큰 바위 위에 홀로 앉아 비로소 한숨을 돌린다. 그때 스님 한 분이 나타나 "그 바위[石]는 한[一] 사람[人]만 앉을 수 있는 자리인데 그대는 뉘시기에 거기 앉으신 게요?" 하며 은근히 당신이 임금이 아니냐고 물었다. 왕건이 "내가 바로 왕이오"하고 대답하자 스님은 깍듯이 예를 갖추었다. 그 바위를 일인석(一人石)이라 부른다. 그 이듬해(928년)에 일인석 옆에 염불암이라는 절이 신축된다. 시기적으로 미루어볼 때 왕건 측의 지원을 받아 사찰이 건축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염불봉

이런 추측은 당시 동화사 승병들이 왕건 아닌 견훤을 지원했다는 기록에 근거한다. <대구시사>도 <승증동국여지승람>의 '동수망기이궤산桐藪望旗而潰散'과 '자수이귀自隨以歸'라는 표현을 '왕건(군)이 공산에 (처음) 왔을 때 동수(동화사)의 병력이 고려군의 기를 보고는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다', '왕건의 구원병이 경주 지역까지 쳐들어가지 못하고 팔공산 권역에서 멈추게 된 것은, 견훤의 후백제군이 곧 대응하여 병력을 이끌고 온 탓도 있겠지만, 이 시기의 대구 지역이 후백제의 세력권 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해석하면서 동화사 승병과 일대 주민들이 견훤을 지원했다고 본다. 그러므로 처참한 대참패 이후 팔공산 동봉 아래 깊은 골짜기까지 쫓겨 온 왕건으로서는 이듬해 염불암이 지어지는 외진 산속에서 승려로부터 받은 존경 어린 대우가 크게 감격스러운 추억이었을 터이다.

▲염불암

하지만 왕건이 혼자서 팔공산 염불암까지 도망을 쳤다는 것은 아무래도 조금 미심쩍은 대목이다. 염불암으로 가는 산자락은 말이 달릴 수 있을 만큼 평탄하기는커녕 포장이 되어 있는 지금도 숨을 헐떡이며 걸어야 하는 가파른 오르막이다. 게다가 그 당시에는 염불암도 없었으니 나무와 덤불투성이가 아니었다 해도 간신히 비집고 다닐 만한 좁디좁은 산길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 공산전 대패 바로 그 이듬해에 왕건 측이 아직 적세가 강하던 팔공산 지역에 신축되는 사찰 사업을 지원했다는 해석도 무리한 견강부회로 보인다. <대구시사>가  '930년 정월에 들어서면서 고려는 경상도 지역에서의 세를 만회하고 역전의 기틀을 다지게 된다'고 기술하는 것을 보면 그 두어 해 전인 928년(공산대전 참패 바로 이듬해)에 어떻게 팔공산에 왕건의 지원을 받은 사찰이 지어질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싸움터의 이동 과정도 왕건의 염불암 일인석 설화와는 별로 일치되지 않는다. 기록에 따르면, 왕건과 견훤이 처음으로 맞붙은 곳은 은해사 앞 태조지(太祖旨)였다. 경주에서 돌아오던 견훤군과 그리로 가던 왕건군이 거기서 맞닥뜨린 것이다. 하지만 정벌에서 대승을 거둔 견훤군의 기세를 먼 길을 와 피로까지 겹친 왕건군은 당해내지 못했다. 결국, 왕건군은 살내까지 밀렸다. 그때 신숭겸의 지원군이 왔고, 이에 세가 불어난 왕건군이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가하지만,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용포를 대신 입고 견훤군을 속임으로써 죽음으로 시간을 벌어준 신숭겸 장군 등의 희생 덕분에 왕건은 구사일생으로 탈출하게 된다.

왕건은 어느 쪽으로 도망을 갈 것인가. 왕건군은 금호강 방향, 견훤군은 팔공산 방향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왕건이 갈 곳은 염불암이 있는 팔공산 쪽이 아니라 자신의 군대가 있는 금호강 쪽이다. 파군재에서 뒤로 물러나 봉무동 독좌암, 평광동 시량리, 불로동, 안심과 반야월, 거기서 금호강을 따라 반월당 일대를 거쳐 앞산(안일암, 은적사, 임휴사)으로, 다시 성주 방향으로 도망을 갔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 요약하면, 팔공산 염불암 일인석(一人石)은 왕건이 도망가다가 앉았던 바위라고 보기 어렵다.

▲염불암 청석탑

해안도 마찬가지. 해안(解顔)도 왕건과는 무관한 지명인데, 뒷날 동수대전 이후 민간에서 그렇게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파군재에서 제법 멀리 도망쳐서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전하다고 느껴지자 줄곧 굳었던 왕건의 얼굴[顔]이 풀렸다[解]고 해서 그곳의 이름을 해안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지만, <삼국사기>는 지명과 인명을 중국식으로 많이 바꾼 신라 경덕왕 때 '치성화현雉省火縣'의 이름이 '해안현解顔縣'으로 변경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해안의 지명이 왕건의 옛일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은 민간어원설(民間語源說)의 한 가지 예로 보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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