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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빗방울이 마른 가지마다 방울방울 맺혀 있다. 비 그친 겨울나무는 반짝이고 있고 공기는 촉촉하고 달콤하다. 그러나 나를 공명시키는 것은 이 장면, 이 공간이 아니라 <그 어떤> 시간이다. 들뢰즈는 그것을 “순수 과거”라고 불렀다. 우연히 맛 본 마들렌 빵이 불러내는 과거의 맛, 현재와 과거 그 두 개의 맛을 공명시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그 어떤> 선험적 시간. 그렇게 빗방울과 이 달콤하고 촉촉한 공기는 나를 알 수 없는 시간 앞에 세운다. 기억된 시간이 아니라 그저 내 앞에 와 있는 시간. 내가 호명하지 않았음에도 <그 어떤> 곳에서 달려와 내 현재의 공간에 시간의 격자를 치는 순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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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대상들은 관찰되거나 회상된 과거의 대상들이 아니다. 내가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물방울과 꽃들과 아름다운 연인에 대한 달콤한 설렘은 현재의 그들로 부터도, 과거의 그들로 부터도 오는 것이 아니다. 시는 시간의 심리학이 아니다. 차라리 현상학에 가까운 작업 같은 것이어서, 그것은 순수 기억을 직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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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줄박이 한 마리가 겨울 나뭇가지 한 쪽 끝을 꽉 붙들고 있다. 시간이 방울방울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그러나 시간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시간이란 누구인가라고 물어야 한다고 하이데거는 말했다. 무슨 뜻일까? 물방울 하나가 톡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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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속에서 시인은 시간을 볼 수가 없다. 그저 시간 바깥에서, 한가하게, 비스듬히, 그러나 집중하여 시간의 큐빅을 가지고 놀기. 시간의 재배치에 자신을 맡기기. 여성인 포르투나(fortuna 운명)를 부드럽게 더듬기 혹은 그에 몸 맡기기. 그리하여 “한 줌 가득 시간을 쥐고 당신이 내게로 오셨오”(파울 첼란)라고 반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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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등에 업힌 아이가 한참동안 나를 빤히 쳐다본다. 혹은, 몇 시간 후면 이 지상을 떠날 할머니가 맑은 눈빛으로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다. 같은 눈빛. 시간 속에서의 시의 눈빛. 봄. 시는 시인이 보고 생각한 것을 멋있게 적은 것이 아니라, 시인의 몸을 빌린 ‘순수 시간’의 육화이다. (너무 거창하다고?) 거창한 게 아니라 그게 핵심이다...... 문제는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이게, 뭐? 잠시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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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보다 우리를 더 빨리 시간 속으로 접속시키는 감각은 없을 것이다. 된장 끓이는 냄새, 빵 굽는 냄새, 비 온 뒤의 숲 냄새, 비누 냄새 등등. 각각의 냄새들은 우리들을 <그 어떤> 기억의 뭉게구름 속으로 끌고 간다. 냄새에 비해 소리나 색은 그 자체로 <그 어떤> 기억을 불러오지 못한다. 비벼져야 한다. (이건 말하자면, 코 막히면 시 쓰기 좀 곤란하다는 것, 그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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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 순간 한 비정규 노동자가 이 세상으로부터 지워지고 싶다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죽었다. 이 글을 쓰는 순간 ‘돈’ 때문에 스스로 죽은 또 한 노동자의 시신은 그저 길바닥에서 겨울 그늘을 덮고 누워있다. 나는 지금 무슨 글을 쓰고 있는가? 그러나, 그래도 나는 시를 이야기하고, 울지 않는다. 멀기 때문에. 멀고도 멀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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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곽지 야산 버려진 집에
한 사내가 들어와 매일 출퇴근한다.
전에 없던 길 한 가닥이 무슨 탯줄처럼
꿈틀꿈틀 길게 뽑혀 나온다.
그 어떤 절망에도 배꼽이 있구나.
그 어떤 희망에도 말 걸지 않은 세월이 부지기수다.
마당에 나뒹구는 소주병, 그 위를 뒤덮으며 폭우 지나갔다.
풀의 화염이 더 오래 지나간다.
우거진 풀을 베자 뱀허물이 여럿 나왔으나
사내는 아직 웅크린 한 채의 폐가다.
폐가는 이제 낡은 외투처럼 사내를 품는지.
밤새도록 쌈 싸먹은 뒤꼍 토란잎의 빗소리,
삽짝 정낭 지붕 위 조롱박이 시퍼렇게 시퍼런 똥자루처럼
힘껏 빠져나오는 아침, 젖은 길이 비리다.
(문인수. 「배꼽」전문)
어떤 폐가에 한 사내가 살러 들어오면서 주변 풀 무성하던 언덕에 길 하나 생긴다. 시인이 그 길을 ‘탯줄’로 명명하는 순간 <그 어떤> 시간들이 순식간에 몰려든다. 시인은 사회적 시간이나 정치경제적 ‘절망’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가 “순수 과거”라고 명명했던 공명이 둥근 시간들을 응축시킨다. 웅크린 한 채 폐가와 같은 사내가 현재의 시간을 구성하고, 또한 쓰러진 소주병과 폭우와 폭염과 짐승들이 그 비참을 수식하지만, 시인의 시간은 또 다른 시간과 공명한다. 밤 새 (코끼리 귀처럼 생긴) 토란잎을 두드리던 빗소리와 그 빗소리로 힘차게 쭉쭉 뻗어 나오는 아침의 시퍼런 조롱박은 희망으로 울린다. 절망과 비참에 왜 이런 회고적 시간들이 혹은 낭만적 미래가 결합되는지 묻는 것은 부당하다. (왜냐하면 시는, 시인 마음대로니까! 하지만,) 다만 이 시의 장점이 이데올로기적 의도를 아주 얇게 하여 시간들을 감싼다는 점이라면 동시에 이 시의 단점은 너무 이데올로기적으로 <그 어떤> 시간들을 뒤틀었다는 점이다. 비린내는 바다의 냄새일 수도 있고, 비 온 뒤 수풀의 냄새일 수도 있지만 눅눅한 습기에 젖은 더러운 몸 냄새일 수도 있다. 삶이 그러하지 않은데 왜 시는 희망을 노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우리의 잉태한 절망과 시간에 착상한 태반 사이를 잇는 탯줄, 그로 인해 절망의 배에 생긴 배꼽은 과연 희망의 상징으로 읽힐 수 있을 것인가? 하이데거처럼 묻는다면, ‘힘껏 빠져나오는 아침’의 이 ‘시간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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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겨울비가 청동 빛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을 적시고 있다. 길은 물안개로 풀리는 겨울 강처럼 낮은 소리를 내고, 한줌 가득한 시간은 늘 명치끝에서 부터 아파온다. 상상하는 것만으로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명백한 허위이다. 싸우지 않는 상상은 허깨비이다. 그러나 순수 시간의 공명하는 상상을 통해서만 우리는 역사와 민족과 이데올로기와 죽음을 가로지를 수 있다. (이게 뭔 말이냐고?) “남산에서 구름 일어나니 북산에 비가 내린다.”(『벽암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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