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청소노동자, 언제까지 레미제라블인가

[기고] “이 억울함을 어디에 호소해야 하나요?”
뉴스일자: 2013년01월09일 17시14분

▲영화 <레미제라블>의 팡틴

최근 개봉 중인 뮤지컬영화 ‘레미제라블(원작 : 레미제라블, 빅토르 위고 저)’은 제목 그대로 ‘비참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비참한 사람들의 절망을 애절한 가사와 곡조로 녹여낸 ‘I dreamed a dream’(한때 나는 꿈 꿨었죠)은 등장인물 중 여성인 팡틴이 더는 떨어질 곳 없는 삶의 나락에서 부르짖는 절규의 노래이다.

작품에서 팡틴은 공장에서 해고되어 자신이 전부였던 ‘노동력’을 더는 팔 수 없게 되자, 머리카락과 어금니를 시작으로 끝내 포기해서는 안 될 인간의 존엄성과 영혼마저 팔아넘기고 만다. 이처럼 ‘해고’는 인간의 삶이 유지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반을 송두리째 아작내 버린다.

모든 불행의 시작은 바로 ‘해고’였다. 그래서 팡틴은 더러운 부둣가를 헤매다 우연히 공장주였던 장발장과 마주치고, 그간의 분노와 원망을 터뜨리며 득달같이 달려든다. 정작 장발장은 전혀 모르는 일이다. 그녀를 해고한 것은 공장주인 장발장이 아니라 작업반장이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반장은 여성으로, ‘솔직하고 착실한 인물이지만 사람에 대한 너그러움이 없는 사람’으로 묘사되지만, 영화에서 반장은 남성으로 등장하고 작업장에서 팡틴의 몸을 심심찮게 더듬는 저열한 사람으로 나온다. 함께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은 작업반장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팡틴을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궁지로 내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영화와 같은 일이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소연할 곳을 찾다 끝내 필자가 있는 사회과학학술모임의 문을 두드린 여성노동자 한 분을 만나 뵙고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레미제라블의 팡틴이 처하게 되는 상황이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학교 청소노동자의 이야기

다음은 대구대학교 기숙사에서 일하고 있는 이금희(가명)씨의 이야기이다.

이금희씨는 2010년부터 대구대학교에서 청소노동자로 일했다. 2006년 청소노동자들은 민주노조 깃발을 세우고 최저임금도 되지 않았던 급여인상과 월차 같은 기본적인 것들을 조금씩 쟁취해냈다. 달라진 것은 비단 경제적인 것뿐만이 아니었다. 노동조합은 일하다 부당한 것이 생기면 당당하게 요구하고 행동할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자, 그 자체로 움츠려져 있던 노동자들의 어깨를 펴게 하는 자부심과 긍지의 상징이었다.

노동조합이 생긴 이후로 교직원들과 용역회사의 직원들, 관리자의 변화된 태도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여성노동자들 자신이었다. 그 누구도 이제 더는 노동자들을 ‘아줌마’라고 부르며 함부로 막대할 수 없었다.

이금희씨는 노동자로서 옳은 것을 옳다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이야기하며 떳떳하게 일하고 싶었기에 2010년 노동조합에 선뜻 가입하였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부당한 일이 생길 때마다 권력 앞에 비굴하지 않으면서 할 말 다하는 대쪽 같은 그녀를 믿고 따랐기에 2011년과 2012년 잇따라 대의원으로 선출하였다. 한두 명 정도가 기숙사 한 동을 청소해야 하는 고강도의 노동력에 비해 수입은 적었지만 그래도 노동자들은 자신의 힘으로 가족이 생활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반장은 기숙사 행정실과 회사에 충직한 사람이어서 대의원인 이금희씨와 부딪힐 일도 많았지만, 노동조합의 깃발 아래 같은 노동자, 조합원으로서 함께 기본적인 권리들을 쟁취해냈다. 살맛나는 나날들이었다.

그러던 2011년의 어느 무더운 여름날, 청소노동자들은 기숙사 곳곳에 지저분하게 자라나는 잡초를 제거하는 풀 메기 작업에 동원되었다. 그런데 반장은 자신이 작업해야 할 몫이 있었음에도 일을 하지 않고 청소노동자들에게 자신의 작업분량을 대신 하도록 지시했다. 조합원들은 이 일이 부당하다고 느꼈고, 노동조합 간부들은 대의원인 이금희씨에게 함께 반장을 찾아가 항의하자고 하였다. 이 일이 있었던 후, 반장은 “내가 얼마나 당신에게 잘해줬는데 나에게 이러느냐?”며 태도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반장은 다른 노동자들에게 이금희씨에 대한 이간질을 시작했다. 반장으로부터 그러한 미움을 받는 것은 차라리 나았다. 함께 웃으며 오만 수다를 떨며 일하던 동료들의 눈빛이 하나둘 싸늘해져 가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일이 표면 위로 드러난 계기는 ‘일지’로 인해서였다.

대구대학교 청소 용역업체는 1년마다 새로 바뀌는데, 2012년 8월 1일부터 거성이라는 회사가 낙찰되면서 노동자들은 업무일지 작성을 의무적으로 하게 되었다. 반장은 업무 일지에 대해 설명하면서 자신이 한 모든 일에 대해 적으라고 말했다. 이금희씨는 특유의 쾌활함과 천진함으로 “화장실 볼일 보는 것까지 써야 하나요?”라고 물었고 작업반장은 최대한 자세하게 쓰라고 대답했다. 다들 순순히 일지를 작성하기로 하였고 그렇게 한 해가 별 탈 없이 마무리되는가 싶었다.

작은 권력의 등장, 부당한 조치에 저항한 것이 '명령 불복종?'

두 달 전, 이금희씨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기숙사에서 청소하고 있던 중 반장으로부터 사감실로 내려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사감실에서 만난 반장은 “일지를 왜 시간별로 쓰지 않았느냐”고 다그쳤다. 일지를 시간별로 쓰려면 일하다 말고 장갑을 벗어 작업내용을 그때그때 작성해야 한다. 하지만 많은 업무량 탓에 그럴 겨를이 없어 뒤늦게 쓰다 보면 시간대를 까먹기에 십상이다.

이금희씨가 일지를 시간 별로 쓰지 않고 하루 업무 내용만 간추려서 쓰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자 반장은 본인이 하는 말에 토 달지 말고, 그냥 하라는 대로 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일지에 업무 외적인 내용인 ‘샤워’를 왜 썼느냐고 물었다. 청소업무 특성상 오염물질과 온갖 먼지들을 뒤집어쓰게 되므로 퇴근 시 노동자들은 이따금 샤워를 하고 집으로 가곤 했다. 때문에 이금희씨는 숨김없이 썼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반장은 당신이 이렇게 일지를 쓰는 바람에 다른 여성동료가 얼마나 말이 많은지 아느냐고 말했다.

업무 외적인 것을 쓰는 것이 다른 여성동료에게 피해가 갈 수 있다는 말이 이금희씨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반장이 자신이 쓴 일지를 다른 동료들에게 보여주면서 어떤 식으로 이야기했을지 눈에 훤했다. 점점 더 싸늘해지는 동료들의 눈빛과 태도가 어디에서 오는지에 대해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금희씨는 “왜 일지를 여러 동료들에게 공개하여서 나에게 모욕을 주고 동료들 간 왕따를 시키느냐”고 따져 물었다. 반장은 일지를 공개한 것에 대해 미안한 기색은커녕, 오히려 일지로 이금희씨의 배를 쑤시며 욕설을 퍼붓기에 이르렀다. 마침 곁에서 이를 목격한 사감이 반장을 말리고 돌려보내 다행히 더 큰 폭행으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은 이금희씨에게 대단히 모욕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이금희씨는 자신이 잘못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부당한 처사와 언행을 당했다는 사실 앞에서 모욕은 느꼈지만 위축되지는 않았다. 이 사건이 있고 한 달이 지나 방학기간이 되었다.

방학 동안 기숙사에 사는 학생들 인원만큼의 기숙사만 몇 동 남기고, 나머지 기숙사를 싹 청소하기 위해 노동자들이 삼삼오오 각 건물에 동원되었는데, 이금희씨가 청소할 때는 인원이 적게 배치되는 것이었다. 이에 사람을 차별하느냐고 문제를 제기하자 그제야 전화를 하여 다른 노동자들이 합류해 무사히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며칠 후 반장은 두 차례에 걸쳐 노동자들이 모두 모여 있는 자리에서 “이금희가 말이 많아서 모두를 동원하였다”, “앞으로 인원이 다 동원되는 건 이금희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금희씨가 “나의 말을 들어 달라”고 하자 반장은 “저 여자는 입만 벌리면 거짓말만 한다”며 모든 동료들이 보는 앞에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이금희씨는 그날 집에 돌아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업무 스트레스를 가중시키는 일지를 시간대별로 쓰라고 강요하는 것, 적절치 않은 인원 분배로 차별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시정을 요구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반장의 폭력과 끊임없는 이간질이었다. 심지어 이금희씨가 모르게 동료들은 이금희씨가 업무지시 불이행 등을 해왔음을 인정하는 내용에 서명하기까지 했다.

반장은 이금희씨처럼 부당한 조치에 대해 바로잡을 것을 요구하는 것에 ‘명령 불복종’이라는 죄목을 달았다. 다른 동료들은 그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고, 심지어 이금희씨가 잘못했음을 확인하는 서명지에 사인까지 하였다. 동료들은 스스로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내용과 다름없는 서명지에 사인한 것이다. 차별적인 인원동원과 같은 부당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반장의 지시 앞에서는 가만히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내용에 서명한 것이다.
   
이금희씨는 요즘 잠을 잘 자지 못한다고 한다. 우울 증세까지 더해져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를 이해할 것 같다고 했다. 살면서 이런 모욕적인 일을 당할 만큼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었던가? 많은 돈을 버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루하루 정직한 노동으로 생활을 해나가는 것을 감사히 여기며 앞으로도 평범하게만 살아가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었던 그였다. 그런데 이 일이 있는 뒤로 지금껏 살아온 삶 전체가 부정당하는 심정이라고 했다. 

권리를 쟁취해왔던 경험에 대한 기억과 망각

팡틴은 단지 가진 자의 횡포로 일터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었다. 아무 죄 없이 함께 일하는 동료들로부터 불신과 비난을 받는 일이야말로 그 어떤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보다 더 기가 막히고 절망적이다. 반장이나 감독관도 분명 노동자들과 다를 바 없이 고용된 노동자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본가보다 더 자본가처럼 노동자들을 탄압한다.

필자가 학교 커피숍에서 일하다 우연히 마주친 학교 청소용역업체의 사장은 “청소노동자들이 불필요하게 너무 많은 청소업무를 학교에서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부드럽게 웃으며 “근로계약서에 그렇게 되어 있는 걸요”라고 답변하고는 유유히 아메리카노 한 잔을 손에 들고 나갔다.

그도 장발장처럼 자신의 회사가 고용한 노동자들 사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장발장의 선한 마음씨를 기대하여 이 사건을 해결해달라고 호소하여야 하는 걸까? 가진 자의 착취는 아메리카노 한 잔의 이름만큼 세련되었고, 노동자들을 분열하는 중간 관리자의 횡포는 결국 회사의 보상에서 나온다.

최근, 회사 측에서 반장의 직명을 좀 더 그럴듯해 보이는 ‘팀장’으로 바꾸었다지? 그러나 본인도 결국 청소노동자들과 다르지 않은 노동자임을, 지금은 노동조합을 탈퇴하였다지만 한 때 한 노동조합의 깃발 아래 여럿이서 힘을 모아 인간다움의 권리들을 쟁취해왔던 소중한 경험들을 기억하기를 바랄 뿐이다.


성빛나(대구대학교 사회과학학술모임 역지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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