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날] 정만진의 대구여행 (12)

‘육신사’, 사육신 박팽년의 손자는 딸?
뉴스일자: 2012년12월22일 04시45분

대구에는 묘골마을이 있다! 박팽년의 직계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는 집성촌인 묘골마을은 대구가 자랑할 만한 조선 시대  역사유적이다. 마을 밖에서는 마을이 안 보이지만 마을 안에서는 바깥 세상이 보이는 묘한 골짜기라 하여 ‘묘골’이란 이름을 얻은 이 마을은 사육신을 모시는 육신사(六臣祠)가 있다는 이유로 흔히 동명(洞名) 대신 “육신사”로 불려진다.

▲ 묘리 전경

육신사 경내에는 ‘六臣祠’라는 편액이 걸린 외삼문, 사육신만이 아니라 박팽년의 부친 중림의 위패도 함께 봉안하고 있는 까닭에 ‘六臣祠'’ 대신 ‘崇正祠’(숭정사)란 편액이 걸린 사당, 박팽년의 손자 박비(뒷날 박일산으로 개명)가 1479년에 지은 태고정(보물 554호),  7대손 숭고가 1644년에 별당으로 건축한 충효당, 14대손 문현이 1664년에 지은 도곡재, 제기를 보관하고 임시 숙소로도 사용하는 숭절당, 그리고 2010년에 문을 연 사육신기념관 등이 당당한 모습으로 웅거하고 있다.

▲ 외삼문 현판

박팽년은 사육신의 한 사람이니 이런 유적은 아무리 많아도 나라 안에 여섯 곳을 넘길 수 없다. 특히 박팽년은 사육신 중 유일하게 직계 사내 자손을 남긴 사람이므로, 사육신의 후손이 99칸 종택을 짓고 번창하게 살았던 흔적을 대구 아닌 다른 곳에서는 달리 찾을 수 없다. 육신사는 대구의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부족함이 없다는 말이다. 게다가 마을 들머리에 사육신기념관까지 설립되어 있으니, 묘골마을 육신사는 자녀와 함께 꼭 찾아보아야 할 뜻 깊은 역사여행지임에 틀림이 없다.

단종 복위 운동 실패 뒤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사육신의 직계 존비속 남자들은 모두 목을 졸라 죽이는 교형(絞刑)에 처해졌다. 그나마 여자 가족들은 겨우 목숨을 부지하지만 하루아침에 노비로 전락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직계 아들이나 손자가 죽지 않고 살아난 예외가 있으니, 그가 바로 박팽년이다.

▲ 외삼문

박팽년의 둘째며느리인 성주 이씨는 단종 복위 운동으로 시아버지인 박팽년과 남편 박순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뒤 대구에서 관비(官婢) 생활을 했다. 당시 그녀는 아들이면 태어난 즉시 죽임을 당하고 딸이면 관비가 될 아기를 임신하고 있었다. 얼마 뒤 출산을 했는데 아들이었다. 이 소식이 관으로 들어가면 아기는 바로 죽을 운명이었다.

이때 며느리 이씨의 여종도 함께 따라와 있었다. 그녀도 임신 중이었다. 게다가 출산까지 같은 날에 했다(대구시 홈페이지 지명유래). 여종은 딸을 낳았다. 그녀가 며느리 이씨에게 말했다.

“제가 아들을 낳고, 마님께서 딸을 낳은 것으로 해야겠습니다. 제 딸은 어차피 평생을 관비로 지낼 신세니까 상관이 없고, 그렇게 하면 귀한 아드님은 생명을 지킬 수 있지 않습니까.”

여종의 ‘아들’이 된 박팽년의 손자는 그렇게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 여종은 달성군 하빈면 묘골마을로 숨어들어‘아들’을 키우며 살았다. 이름도 ‘박비’라 했다. 노비에 무슨 성씨가 있을까 싶어 사람들은 박비 두 글자를 아이의 이름으로만 여겼다. 박비의 뒷글자 ‘비’는 노비(婢)를 나타내는 것이었지만, 앞글자 ‘박’이 박(朴)팽년의 손자라는 사실을 은근히 내포하고 있는 줄은 아무도 몰랐다. 다만 ‘어머니’인 여종이 알았고, 가까운 인척 중 몇이 숨을 죽이며 그 사실을 가슴에 묻고 살았다.

▲ 사당

세조에 이어 예종 다음인 성종 대에 이르렀을 때에는 사육신에 대한 평가가 많이 달라졌다. 정치적 분위기가 일신된 덕분에 박비는 이윽고 임금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성종은 묘골마을에서 올라온 박비에게 ‘충신의 자식’이라 칭찬하면서 그 동안의 고생을 위로해 주었다.   

박비는 묘골로 돌아와 육신사의 전신 절의묘(節義廟)와 정자 태고정(太古亭), 그리고 99칸 종택 등을 짓고 후손들이 살아갈 터전을 닦았다. 이름도 ‘박씨 성을 가진 노비’를 뜻하는 ‘박비’를 버리고 ‘하나뿐인 귀한 자손’을 뜻하는 일산(壹珊)으로 바꾸었다.

박일산이 묘골을 가꾸기 시작한 이래 마을은 온통 기와집으로 가득 채워질 만큼 번창하였다. 그 결과 묘골마을은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집이 불에 타는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구한말까지 여전히 300여 호의 집으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사당과 보물 554호인 태고정만은 전란의 와중에도 전소되지 않고 건재하여 지금도 옛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 건물들이 불에 타 없어지지 않고 살아남은 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왜병이 집의 기둥을 향해 도끼를 내리찍었다. 지켜보는 박씨 일가들은 울음을 터뜨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도끼는 기둥을 찍지 않고 왜병의 발등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다른 왜병이 다시 도끼를 들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되자 더 이상 도끼를 드는 왜병이 없었다.

이제 왜병들은 건물에 불을 지르려고 했다. 왜병들이 각각 불쏘시개를 하나씩 만들어 기둥에 갖다 댈 무렵, 갑자기 번개가 번뜩이고 천둥소리가 요란하더니 소나기가 쏟아졌다. 왜병들이 들고 있던 불쏘시개들은 단숨에 시커먼 잿더미로 변했다. 결국 왜병들은 겁에 질려 뒷걸음질쳐서 사라졌다.

▲ 태고정

처음 이름이 절의묘(節義廟)였던 사당에는 본래 박팽년 한 분만 모셨다. 그런데 5대손 계창이 제삿날 꿈을 꾸었는데 다른 사육신 다섯 분들이 사당 밖에 와 서성였다. 박계창은 꿈에서 깨어난 즉시 부랴부랴 음식을 더 차려 함께 제사를 모셨다. 꿈 이후 하빈사(河濱祠)를 새로 세웠고, 박팽년 이외의 다섯분 사육신도 함께 모셨다. 그 뒤 1691년 낙빈서원을 지어 해마다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고, 1975년 육신사(六臣祠)를 건립했으며, 1981년 외삼문도 갖추었다.

박팽년은 죽기까지 단 한번도 세조에게 “신(臣)”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수양대군을 임금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가 담긴 박팽년의 시조를 따라서 읊어본다. “금(金)이 아름다운[麗] 물[水]에서 난다[生]고 해서 물마다 금이 날 것이며, 옥(玉)이 곤강산(산崑산崗, 곤강산은 중국의 옥이 생산되는 산 이름)에서 난다[出]고 해서 뫼[山]마다 옥이 날 것인가? 아내[女]는 반드시[必] 남편[夫]을 따라야[從] 한다지만,. 그렇다고 임마다 쫓을 수는 없는 것이다!” ― 나는 결코 수양대군을 따르지 않겠노라!

금생여수(金生麗水)라 한들 물마다 금이 나며
옥출곤강(玉出崑崗)이라 한들 뫼마다 옥이 나며
아무리 여필종부(女必從夫)라 한들 임마다 쫓을 건가.

▲ 사육신 기념관

참고 (1) : 사육신의 처형과 유족 처리 : <조선왕조실록> 일부 
박팽년이 (중략) 옥중에서 죽으니, 의금부(義禁府, 지금의 대법원, 검찰청, 국가정보원을 묶어놓은 듯한 사법기관. 포도청은 경찰청, 내금위는 대통령 경호실 정도)에서 아뢰기를, 

“박팽년·유성원·허조 등이 지난해 겨울부터 성삼문·이개·하위지·성승·유응부·권자신과 함께 당파를 맺어 반역을 도모하였으니 (중략) 허조·박팽년·유성원의 시체를 거열(車裂, 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수레에 매어 사방으로 잡아당겨 찢어 죽이는 형벌)하고, 목을 베어 효수(매달梟머리首)하고, 시체를 팔도에 전(傳)하여 보일 것이며, 그 재산을 몰수하소서.”하니, (세조가) 명하기를,

“친자식들은 모조리 교형(絞刑, 목을 졸라 죽이는 형벌)에 처하고, 어미와 딸·처첩(妻妾)·조손(祖孫)·형제·자매와 아들의 처첩 등은 (지극히 먼 곳의) 노비(奴婢)로 영구히 소속시키고, 백·숙부(伯叔父)와 형제의 자식들은 (먼 곳의) 노비로 영원히 소속시키고, 그 나머지는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 세조 2년 6월 7일

박팽년의 아내 옥금, 김승규의 아내 내은비·딸 내은금·첩의 딸 한금은 영의정 정인지에게 주고… 성삼문의 아내 차산·딸 효옥, 이승로의 누이 자근아지는 운성부원군 박종우에게 주고…… - 세조 2년 9월 7일

참고 (2) :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과 사육신
사육신 사건이 발생한 것은 1456년이다. 세종의 장남인 문종이 재위 2년여만에 죽고(1452년) 12세의 어린 세자가 즉위하면서 조정에는 불안한 공기가 감돌게 된다. 세종의 차남인 수양대군이 왕위를 노리고 있는 줄 알았지만, “어린 세자를 잘 보살펴 달라”는 문종의 유언을 받은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등 원로대신들은 너무 고령이었고, 성삼문·박팽년 등 집현전학사 출신의 학자들은 벼슬이 낮아 발언권이 없었다.

결국 수양대군은 1453년(단종1) 10월 황보인·김종서 등의 대신들을 죽이고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다. 수양의 추종 세력인 정인지·신숙주 등은 1455년 윤6월 수양을 왕으로 추대하고 단종을 왕위에서 물러나게 한다.

세종·문종에게 특별한 은총을 받았던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 등 문관들은 무관인 유응부·성승·박쟁 등과 모의,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수립한다. 그러나 계획에 동참했던 김질과 그의 장인 정창손의 고발로 사육신을 비롯하여 연루자들은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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