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일자리, 정말 최고의 복지 맞습니까?

복지(福祉)는 말 그대로 ‘행복한 삶’입니다.
뉴스일자: 2012년10월08일 10시20분

▲ 대선후보자 그 누구도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라는 프레임을 벗어나지 않는 지금의 대선구도에서 어쩌면, 영웅드라마나 신변잡기, 이미지마케팅, 정치적 수사에 기대어 지지를 호소하는 모양은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이전 우리 임금님 중에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을 하지 않은 이가 있을까요. 그 시대의 유행어였나 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이들의 말 중에서도 국민의 입에 오르내린 유행어로는 ‘공중부양’, ‘내 눈을 바라봐’ 다음이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다’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시대의 유행어입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전자는 봉건 경제사회에서, 후자는 자본주의사회에서 ‘먹힌다’는 것이겠지요.

얼마 전, 300억원 예산을 퍼붓고도 고작 장애인 291명 고용이라는 부끄러운 성적을 낸 정부의 중증장애인 다수고용사업장 부실이 지적되어 여론의 뭇매를 맞았습니다. 사실 이 사업은 이미 2003년 정부에서 그동안의 시설보호 중심이 아닌 장애인의 자립 촉진을 위해 장애인복지투자의 중점을 장애인 일자리 창출로 전환해 나간다는 방향성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요. 2008년 새로운 직업재활시설 모델을 개발한다며 시범사업을 시행한 이래로 13개소에 예산이 투입되었지만, 여전히 4개소가 설립 준비 중이며 9개소는 고용모델 창출과는 무관하게 구색만 갖추고 있다는 지적이었지요. 애초 최저임금 이상의 보수를 지급할 수 있는 우수사업장을 육성한다는 계획도 추후에는 최저임금의 80% 이상으로 수정되었지만, 더욱 실망스러운 점은 그 기준조차 사업장 어느 한 곳 지키지 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이제는 복지부조차 실효성이 없다며 2013년 예산편성에서 제외했다고 합니다. 생산성 향상과 임금확대가 전제된 보호고용의 추세 속에서 마련되었다는 이 사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예산만 낭비한 채 물거품이 되어버렸습니다.

대구의 사정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장애인 다수고용사업장은 김범일 시장이 꾸준히 밀어오고 있던 장애인복지의 주요 공약이기도 했었는데요. 현재 일을 통해 자립을 촉진하는 이 사업장은 아이러니하게도 거대 생활시설 복지재단이 위탁 운영하고 있으며, 2012년까지 57억원, 2014년까지는 146억원 이라는 적지 않은 예산이 투여될 것임에도 고용된 장애인은 50여명에 그치고 있습니다. 게다가 임금수준은 40만 3천원으로 전국에서 가장 낮기까지 합니다. 일반고용시장으로 가기 위한 작업경험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직업재활의 개념상 이 사업을 통해 얼마만큼의 장애인이 지역사회 일반 노동시장으로 전환되었는가도 중요한 평가의 척도이겠지만 이에 관련된 자료는 찾을 수조차 없는 실정입니다.

노동을 기준으로 한 권리의 부여가 상식인 사회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요. 아니면 복지 역시 하나의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요. 그도 아니면 노동이 국민의 ‘(신성한)의무’인 나라이지만, 전체 장애인의 70%가 실업상태인데다 사회적 합의라고 말하는 법률상에서조차 최저임금을 주지 않아도 좋은 장애인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요.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라는 말, 노동 연계 복지(work-to-fare)의 가장 대표적인 구호가 왜 이리 허망하게 들리는 것일까요?

이 허망함이 비단 장애인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모두가 이 낡은 유행어 속에서 적지 않은 세월을 보내왔지만, 다시 복지가 사회적으로 요청되는 요인은 동일했으니까요. “뼈 빠지게 일해도 변한 게 없다.” 일은 하게 되었을지 몰라도, 빈곤한 삶은 계속되었습니다. ‘워킹푸어(Working poor)’라는 모순된 단어까지 생겨날 정도였으니까요. ‘일하고 싶다’는 요구와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라는 답변 사이의 괴리. 같은 ‘일’ 일지라도 묘한 지점에서 만나는가 하면, 또한 제약하고 제약받고 있었던 것은 아닐런지요. 국민이 요청했던 것은 ‘일한다는 것’자체를 넘어 노동과 생계가 직결되는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노동해야만 연명할 수 있는 사회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저 일하는 방법 외에는 생계를 스스로 담보할 수 없는 대다수의 국민이 말한 생존권적 요구이지 않았을까요.

최근 박근혜, 문재인에 이어 안철수 후보 역시 추상적이지만 그의 정책방향을 발표했습니다. 변한 것이 없습니다. 핵심적일 수밖에 없는 성장과 분배의 문제에 관해 대선후보자 그 누구도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라는 프레임을 벗어나지 않는 지금의 대선구도에서 어쩌면, 영웅드라마나 신변잡기, 이미지마케팅, 정치적 수사에 기대어 지지를 호소하는 모양은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도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사회는 결국 일을 하지 않아도, 일하지 못해도 평등한 사회’라고 말해 주지 않습니다. 다만 계속 일할 기회, 좋은 말로는 도전할 기회를 준다고 합니다. 아마 그들이 꿈꾸고 있는 사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뼈 빠지게 일하는 사회를 말하는 가 봅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일하기 위한 길에 스스로 한 표를 던져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뼈 빠지게 일하는 사회는 장애인과 같이 배제된 이들이 뼈저리게 차별당하는 사회입니다. 노동이 중요하더라도 절대선이 되어선 곤란한 이유입니다. ‘무엇이 노동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그 변화 가능성을 충분히 염두에 둔다 하더라도 모든 구성원이 그 시대의 노동형태에 100% 적응할 수는 없다는 것 역시 피하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따라서 기본적인 권리의 보장 여부가 노동을 기준으로 유지되어 갈 때에 필연적으로 불리한 이들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의 지배만큼이나 노동의 가치가 중심이 된 사회 속에서 ‘(사회적)장애’는 어떤 모습으로든 나타날 것이고, 이 낙인은 그 자체로 경쟁에 불리한 요인으로 치부되어 사회적 차별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공평과 공정이라는 말들로 말입니다.

장애인당사자 동료와의 술자리에서 ‘노동’을 이야기하면 빠지지 않는 답변이 있습니다. “노동? 내 사는 기 중노동이다.” 맞는 말입니다. 한국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나게 힘이 들어가는 일임이 틀림없습니다. ‘일자리 창출’이야기를 할 때엔 이런 얘기도 듣습니다. “우리 활보(활동보조인)님 일자리가 내가 있으이 창출된 거 아이가?” 이것 역시 부인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이런 노동개념과 일자리 창출에서의 기여는 사회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문득 최고의 복지는 존재 그 자체로 이러한 사회적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이 동등하게 인정되는 것이 아닐까, 이런 복지를 위해 필요한 것은 성장이 아니라 ‘성숙’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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