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이 묻어나는 편지] (2)눈물이 묻어나는 편지

내 언니의 간병
뉴스일자: 2012년10월05일 13시13분

[편집자주] <뉴스민>은 지난 5월부터 3달 동안 악조건 속에서 일하고 있는 돌봄노동자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공모받았습니다. 글을 쓸 시간이라고는 고된 노동을 마친 늦은 밤, 쏟아지는 잠을 쫓아내며 만드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공모작이 많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을 무색게 할 정도로 많은 분들이 공모에 응해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공모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오늘부터 공모작 중 심사를 거쳐 선정한 당선작 4편을 연속 기재합니다.

내 언니의 간병

부문 : 눈물이 묻어나는 상
수상자 : 송숙희

금낭화를 유독 좋아하던 언니.

벌써 언니가 심어놓고 늘 보고 좋아라하던 금낭화가 지고 있다. 함초롬히 부끄러운듯 조롱조롱 줄지어 피어있는 모습이 꼭 언니를 보는 것 같다.

10년이 넘게 암과 싸워오던 언니가 지난해 이때쯤 마지막 삶의 끈을 놓고 하늘나라로 갔다. 벌써 1년이다. 마지막 호스피스 병동에서의 2개월.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시간이었다. 나는 형부와 조카들과 설마 설마 하던 시간이 다가오자 서로 눈을 맞추고 말은 못하지만 언니의 말 한마디, 눈빛, 행동 하나하나에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점점 죽음의 그림자가 자기에게 다가오는걸 알고 있는 언니는 오랜 투병 중에서 완치가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언니의 병은 10여 년 전 유방암 1기가 시작이었다. 5년 만에 폐로, 마지막에는 뼈로 전이되어서 하반신 마비까지 진행되었다. 여러 차례의 방사선치료와 항암치료에도 불구하고, 언니의 병은 호전되지 않았다. 평소 내성적인 성격의 언니는 매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기 왼손으로 팔베개를 하고,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자기가 떠나고 난 뒤 남겨진 식구들이 어떻게 지낼지를 염려하던 언니는 모든 자질구레한 일들을 형부에게 시키곤 했다.

속 좋은 우리 형부. 오랜 투병에도 마다 않고 시골(의성)에서 서울병원까지 한 달에 두, 세 번은 자기가 운전해서 진료를 다녀왔다. 파프리카, 브로콜리, 각종 암에 좋다는 채소와 약초는 모종을 사서라도 키웠다. 그런 정성 때문에 언니는 10년이 넘게 버텼는지도 모른다.

병원 일반 병동에서,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길 때를 생각해본다. 지금까지 혼자서 간병를 잘 해오던 형부가 나에게 도움을 청해왔다. 내가 간병사라는 이유로. 처음에는 거절할 요량으로 이유를 찾아봤다. 병원에서 간병하고 있는 내 일을 중단 할 수 없다고도 했다. 그러나 다른 언니들과 조카들이 얼마 남지 않은 언니의 마지막 삶을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안심하고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자고 설득했다. 또 힘든 시간 형부도 좀 덜 힘들게 하자는 것이 내가 언니 옆에 있어야 하는 이유였다.

언젠가 호스피스 자원봉사가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자원봉사자 신청을 하지도 않았고, 해 보지도 않았다. 솔직히 난 종합병원 간병사 일을 하고 있고, 호스피스 자원봉사 교육을 받았지만 급성기 질환으로 수술 후 병을 치료해서 완쾌하는 환자를 간병하고 싶지, 마지막 임종을 앞둔 환자를 돌봄 마음의 준비가 되지 못했다. 더욱이 내 가족인 혈육을 보내야 하는 일이란.. 이생에서 저생으로 넘어가는 사람의 마지막을 지켜봐야 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다. 호스피스를 ‘봉사의 꽃’이라 하는 이도 있지만 난 아직 아니다. 누구나 공평하게 다 맞이하는 일이 죽음이라지만, 우리가 그때를 생각하며 사는 순간이 얼마이던가?

난 언니의 건강이 조금 좋아질 때 쉽게 “언니야 죽음을 겁내지 말자”라고 순간순간 말해 왔다. 그럴 때마다 언니는 “그래 겁 안난다. 어서 이 길고 긴 항암 순간이 끝났음 좋겠다.”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런 언니의 눈을 바로 볼 수가 없었다. 언니는 매일 밤 달리기를 하는 꿈을 꾸곤 한다고 했다. 일등을 할 수 있었는데 넘어져서 이등을 했노라고... 조금의 희망의 끈을 잡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때론 너무 기분이 가라앉아 우울해하던 언니에게 진통제(마약)와 항우울제를 조금 더 쓰면 금방 웃으면서 예쁜 것이 있으면 손녀에게 사 주자고 하곤 했다. 그런 언니의 모습은 앞으로 닥칠 죽음과는 상관없어 보였다. 또한 시숙들에게 형부와 잘 지내라고 당부하고 싶어 하고 친구들에게 “잘 살아라” 하는 말을 예사로 했다. 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생각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가슴 저 밑바닥에 잠재해 있던 말들을 약기운을 빌려 하는 것이었다. 마약의 힘이었다.

볕이 좋은날 우리는 옥상에 올라가서 손전화기로 사진도 찍었다. 마지막 사진이 되겠다 싶어 난 돌아서서 눈물을 닦곤 했다. 내가 힘들까봐 짜증도 내지 않다가 형부가 눈에 띄면 형부한테 화를 냈다. 금방 후회하면서. 우리는 종교도 같아서 다음 생이 분명 있다는 걸 아는데 치유의 기도문을 읽어주고, 아미타경을 들려주고, 입관기도를 올리는게 내 간병의 전부였다.

바다를 좋아했고 정구지찌짐을 좋아했던 우리 언니. 손녀에게 만돌린 악기를 사주고 싶어했던 언니. 지금에사 난 후회 아닌 후회를 한다. 엄마한테도 그랬지만 언니와 마지막 순간을 좀 더 따뜻하게 힘들어 하지 말고 안심하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할 걸 하고...
 
내일이 언니 생일이다. 큰언니가 언니 납골당에 가 보자 한다. 그곳엔 젊고 건강할 때 모자를 쓰지 않은 언니의 사진이 있다. 예쁘게 웃는 언니의 모습을 보러 가야겠다.

언니야! 미안해. 사랑해. 훗날 우리 다시 만나서 그때는 건강한 언니가 되어줘. 바다 보러도 자주 가고, 정구지찌짐도 많이 부쳐서 먹자. 다음 세상에서 우리 모두 다시 만나서 아프지 말고 언니 동생하고 살자. 언니야 보고싶다. 사랑해

2012년 5월 여름. 동생 숙희

심사평

감정적인 측면이 없지 않지만, 간병사로서 위독한 상태에 있던 언니의 마지막을 지킨 특별한 사연이 눈길을 끌었다. 사연이 특별한 만큼 출품작 중에서 가장 눈물을 머금게 한 작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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