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날] 시인의 시간 (3)

바람-죽음 그리고 저항
뉴스일자: 2012년08월18일 05시30분

바람이 잔다.  아,  결국
기댈 데란 허공뿐이다.

         (문인수. 「거처」전문)


제 몸 일으켜 떠나는 이별을 믿는지.

대숲에, 대숲에,
또 시퍼렇게 쓸어안으며 울부짖으며 무너지는 바람......

나, 못 간다.

          (문인수. 「바람, 못 간다」전문)    

바람은 대지의 호흡이다. 바람은 우리를 대지의 생명으로 밀어 올린다. 비어있는 허공을 가득히 채우면서 우리가 허공과 허무 속으로 떨어지는 것을 나무 이파리와 꽃들의 떨림, 새들의 노래 소리로 받아준다. 때로 바람은 햇빛과 별빛을 부드럽게 흔들면서 우리의 이마를 물빛으로 반짝이게 한다. 바람이 없다면 모든 사물들은 정지한다. 정지한 사물들은 ‘우리’의 대상이 아니라 오직 대상 그 자체일 뿐이고 그 대상과의 거리는 죽음의 거리만큼 멀다. 그러므로 바람은 존재하는 것에 대한 존재하지 않음의 찬사이다. 

또한 바람은 공간 속에 자리 잡고 있지만 그 공간에 그리고 우리에게 시간을 부여한다. 바람은 기억처럼 뒤엉킨 시간으로 우리에게 불어온다. ‘꽃을 보러 오는’ 바람과 서정주 시인의 ‘꽃을 만나고 가는’ 바람처럼 뒤엉킨 시간들은 우리의 기억 틈틈에 베어들어 삶의 아픔들이 우리를 침묵하게 하는 동안 낮은 휘파람 소리로 불어온다. 그리하여 바람은 공간의 시간적 변용이 된다.

그런데, 그 바람이 ‘잔다.’  존재와 비존재가 쩍 갈라지듯이 모든 사물들이 이원적으로 나누어지면서 삶이 천 길 낭떠러지 앞에 서 있다. 원초적으로 불안정한 우리를 겨우겨우 지탱해주던 바람이라는 공간과 시간이 사라지면서 우리는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다. 왜 바람은 자는가? 왜 대지의 호흡은 멈추었는가? 아마도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고 우리의 미래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 부른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 바람은 존재하는 것에 대한 부재의 찬사이지만 그 찬사는 너무나 미약하여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존재를 신뢰할 수 없다. 차라리 우리는 죽음, 그 부재에 대한 두려움과 그 부재에 대한 동경을 동시에 갖고 있다. 바람은 대나무 숲을 ‘시퍼렇게 쓸어안으며 울부짖으며 무너’진다. 고통스럽지만 우리는 그것의 아름다움에 매혹된다. 죽음은 매혹이다. 우리는 그리고 시인은 자연이 아니라 차라리 죽음에 매혹된 자들이다.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벗어날 수가 없다면 시인은 차라리 그 운명과 함께 부서져 버리기를 원한다.

그러나 스스로 ‘제 몸 일으켜 떠나는 이별’은 비극이 아니라 비극적이다. 비극이 아니라 비극적인 이유는 우리가 ‘그 것’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시와 함께 폭발해 사라져버리는 것은 오직 비극일 뿐이다. 시인은 그리고 독자들은 비극적인 자신의 시-삶을 바라보면서 ‘기댈 데란 허공뿐’이지만 스스로 바람이 되고자 하고 부재를 거슬러 오는 바람이 되고자 한다. 시가 결코 장식품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것을 바람의 저항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바람은 ‘나, 못 간다.’는 의지이다.

하지만 바로 이 의지가 우리의 그늘이다. 그것을 시에 있어서의 ‘죽음과 의지(저항)’라는 이율배반으로 불러도 좋겠다. 시의 죽음 의지는 시가 가능할 수 있는 의지와 저항을 초과하여 넘어서 버리고, 시적 저항은 아직 시적 죽음의 깊이에 미달한다. 마치 현실에서 죽음을 불사한 투쟁이 정치의 가능 영역을 초과해 불 타 버리고, 투쟁이 강렬할 수 록 정치가 죽음-초월이 사라진 정치 기계에 사로잡혀 버리는 것처럼. 그렇다면 시는 어디까지 갈 수 있고, 시는 어디쯤에서 멈추어 서 있어야 할 것인가?  대숲의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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