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살인적 폭염, 환경문제가 아니라 사회체제의 문제다

기후변화에 맞선 반자본주의 기후운동이 시급하다
뉴스일자: 2012년08월13일 10시13분

여름은 더워야 제맛이라고 한다. 그러나 35도가 넘는 찜통더위로 하루하루 지쳐가는 오늘날, ‘더워야 제맛’이라는 여유를 잠시도 허용치 않는다. 무서운 기세로 세상을 뜨거운 열기로 녹이고 있다. 그야말로 올해 여름, 뜨거운 복사열은 온 세상을 숨이 콱콱 막히게 한다.

살인적인 폭염으로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진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배어 나오는 탓에 온라인 쇼핑몰 이용객이 느는가 하면 심부름 대행업체가 때아닌 호황을 맞고 있다고 한다. 또한, 에어컨으로 무장한 대형마트는 손님들로 북적이지만, 야외에 그대로 노출된 재래시장과 거리는 한산해졌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런데 매년 여름이면 닥쳐올 반갑지 않은 이 폭염이 앞으로 감내해야 할 여름의 통과의례로만 받아들여야 하는가? 몇 해 전 우리나라의 기후를 사계절이 뚜렷한 온대몬순기후가 아니라 아열대 기후인 우기와 건기로 나눌 것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는 기상청의 이야기처럼 이 여름의 고통스러운 폭염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하는가? 그래서 에너지 절전을 위한 대중교통을 이용하자거나, 냉난방 온도를 조절하자거나, 탄소 마일리지를 계산해보자는 캠페인에 몸과 마음을 조금이나마 보태야 할 것인가?

기후변화, 피해자로서 민중

기후변화로 수많은 사람이 피해를 당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먼저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땀 흘려 일하는 가난한 민중이다. 노동자, 농민, 빈민 등이 기후 변화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폭염에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워도 땡볕에서 농사일해야 하고, 노동일을 해야 하고, 노점에서 장사해야 한다. 민중이 겪는 기후변화는 그야말로 피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현실이다. 게다가 기후변화는 전례 없는 가뭄과 홍수, 폭염, 폭설, 집중호우로 가난한 민중의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앗아가고 있다. 농경지와 축사, 산업시설, 농가와 살림집이 파괴되고 유실된다. 해마다 연례행사가 되고 있는 홍수와 폭설, 가뭄 등은 인간의 생존기반을 모두 파괴하는 기후변화가 얼마나 무서운 재앙인지 절감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자발적인 에너지 절전 등 초점을 잃은 도덕적 호소만으로는 전 지구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기후변화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는 쉽지않다. 다시 말해 기후변화의 문제는 탈계급적, 무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가해자와 피해자가 너무나도 분명하므로 전 지구적인 기후변화의 가해자에 대한 분명하고 근본적인 대안 마련이 없이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폭염을 비롯한 기후변화의 ‘피해자’로 살아가야 한다.

기후변화, 가해자로서 자본

익히 알다시피 기후 변화는 지구 온난화 때문이다. 지구 온난화는 온실가스 탓인 지구 복사열의 증가 때문이고 온실가스는 화석연료의 과도한 사용에서 기인한다. 이는 그간 초국적 자본에 의한 개발과 성장 중심의 거대생산과 소비체계가 가져온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래서 지구온난화는 초국적 거대기업에 의해 통제되는 자본주의 체계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또한, 현재 기후변화 문제에 대응하는 체제는 자본주의 국제질서와 계급 역관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1850년부터 2000년까지 온실가스의 누적배출량을 국가별로 따져보면 전 세계 배출량 중 미국이 29.3%, EU가 26.5%, 러시아가 8.1%를 차지하고 있다. 전체 배출량 중에 미국과 유럽이 배출한 것이 2/3가량이나 된다. 반면 이들이 세계인구 중 차지하는 비중은 미국이 4.7%, EU가 7.3%, 러시아가 2.3%에 불과하다. 현재 1인당 배출량으로 보았을 때도 미국인(연간 17.6톤)은 아프리카의 차드인(연간 0.028톤)보다 630배 정도의 온실가스를 더 배출한다. 기후변화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누가 봐도 명백한 것이다.

그동안 2005년부터 2012년까지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와 방안을 결정지은 교토체제에서 탄소시장은 온실가스 감축의 ‘유연한’ 수단으로 인정되었다. 이에 따라 배출권거래제도와 상쇄제도가 설계되었고 수년 만에 탄소배출에 대한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탄소시장은 전 인류와 지구의 공유자원인 대기를 사유화한다는 점 △기후변화에 책임이 있는 선진국과 거대기업이 배타적 이득을 누리는 제도라는 점 △제3세계를 온실가스의 쓰레기 유치장으로 활용한다는 점 △거품이 형성되는 투기적인 금융시장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왔다. 그래서 탄소시장은 온실가스를 줄이는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행동을 이끌지 못하고, 기후변화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한다고 비판받아 왔다. 이는 1990년에서 2011년 사이에 선진국의 온실가스배출량이 여전히 매우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환경논리를 뛰어넘는 자본의 이윤논리

그러나 여전히 무차별적 무계급적 환경논리가 일반적이다. 기후변화로 지구가 파국에 이르게 된다면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나 인종차별주의나 전쟁에 맞선 투쟁이 다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다. 또 기후변화는 모든 이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자신이 속한 계급과 관계없이 누구나 기후변화를 멈추는 데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구를 구하려는 운동에 헌신한다고 해서 진정한 변화를 이룰 힘을 가진 세력이 자동으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즉 자본과 지배계급은 기후변화를 멈추기 위한 행동과 어긋나는 특수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계급을 뛰어넘어 단결하려는 시도는 기후변화에 대한 투쟁을 약화시킬 뿐이다. 자본과 지배계급은 환경을 놓고 모순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어떤 자본은 기후변화 때문에 자신들의 체제가 기반을 두고 있는 환경이 위협받는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어떤 자본은 환경 문제의 해결책으로 이윤을 획득한다. 재생가능에너지로 돈을 버는 자본이 그 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근본은 이윤 축적이다. 개별 자본가의 관심사나 환경보호는 부차적이다. 자본과 지배계급은 자본주의를 현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는 어마어마한 압력을 받는다. 석유, 석탄, 핵, 자동차 기업 등 거대한 오염 산업들은 엄청난 권력을 갖고 있다. 오염산업은 자본과 국가권력의 결탁은 필연적이다. 이것은 기후변화를 멈추기 위한 어떤 투쟁도 결국 그 핵심은 자본 그리고 국가권력과 대결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기후변화에 맞선 반자본주의 기후운동이 시급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관성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대안 부재 때문에 기후변화의 문제는 환경문제 의식을 넘어선 사회체제의 문제라는 패러다임 전환이 쉽지 않은 듯하다. 기후가 아니라 ‘체제를 바꾸자’고 했지만 어떻게 바꿀 것인가? 또 어떤 체제가 필요한가? 대다수가 아직 이런 주장은 기후변화를 멈출 수 없다고 얘기하는 것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 자본주의가 화석연료에 크게 의존하는 상황을 바꿔야 한다. 자본의 화석연료 의존을 중단시키려면 거대한 투쟁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기후변화에 대하여 노동자민중운동 내에서 대안과 전략을 둘러싼 토론이 진지하게 벌어져야 한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기후변화에 대한 저항주체의 문제다. 조직된 노동자민중이야말로 기후변화의 가해자, 자본주의 체제에 가장 효과적으로 맞서 싸울 수 있는 세력이며, 환경단체 뿐만 아니라 노동자, 농민, 진보정당, 인권운동, 변혁적 사회운동 등 다양한 주체가 함께 해야 한다. 그럴때만이 반자본주의 기후운동이 대중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반자본주의 기후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2010년 코차밤바 선언은 기후변화의 구조적 원인으로 자본주의를 명시적으로 지적하며, 자본주의가 아닌 새로운 체제가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선진국과 기업이 자본주의 체제라는 원인”을 성찰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고, 자본주의를 “지구를 식민지화하는 제국주의 체제”로 비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류는 “자본주의, 약탈, 죽음의 길로 계속 갈 것인지, 아니면 자연과의 조화와 생명에 대한 존중의 길을 택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대답해야 할 차례다. 살인적인 폭염으로 하루하루 지쳐가는 오늘, 기후변화에 맞선 우리의 행동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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