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백목사의 예수읽기 (끝)

마가 5:21-43 "달리다굼"
뉴스일자: 2015년07월02일 14시20분

오늘 성경말씀은 예수가 거라사에서 다시 갈릴리로 돌아와서 일어난 일이다. 거라사에서는 군대귀신을 평정했다. 황제식으로 말하자면 정복전쟁을 마치고 개선한 것이다. 정복에 성공한 황제는 더욱 권력을 확장하고 온갖 영화를 누린다. 그러나 예수는 갈릴리에서도 사람을 살리는 행위를 계속한다. 황제 주변에는 권력 부스러기를 받아먹으려는 유유상종들이 모여들지만, 예수 주위에는 민중들이 몰려든다.

오늘 성경말씀에는 두 가지 치유이적이 함께 나온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린 일과 혈루증 여인을 치유한 일이다. 왜 두 사건이 함께 나오는가?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는 도중에 자연스레 혈루증 여인을 만난 것인가? 아니면 저자가 어떤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런 편집구조를 취한 것인가?

▲예수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는 도중 만난 혈루증 여인을 만났다.

그냥 자연스러운 일의 연속으로 보는 것은 피상적인 관찰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영화가 총천연색으로 진행되다가 장면이 바뀌면서 흑백영상이 끼어든다면, 그렇게 화면을 다르게 처리한 영화감독의 의도가 있는 것이다. 또 어떤 음악을 연주하다가 갑자기 장조와 박자가 바뀌었는데, 그 변조를 눈치채지 못하고 곡이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다고 느끼면 음악적 감각이 무지한 것이다.(강일상, 『마가복음의 기적이야기』270-271쪽, 대한기독교서회)

마가저자는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는 도중에 혈루증 여인을 등장시킴으로 두 사건을 대조하려고 한다. 예수를 따름에서 둘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예수께서 바닷가에 계시는데,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를 찾아왔다. 그리고 발 앞에 엎드려 간청한다. "내 어린 딸이 죽어 간다고.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고쳐 주시고, 살려 달라고".

예수와 회당의 적대관계를 볼 때, 회당장이 바닷가까지 찾아와서 간청한다는 것은 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그래도 딸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사회적 위신을 다 버린 것 같다. 예수도 회당장의 그런 용기를 가상하게 여겨서 야이로와 동행한다. 회당에서 바닷가로 쫓겨난 예수가 다시 적대자들의 소굴로 들어가는 모습에서 자신의 안위보다는 딱한 사정을 우선시하시는 예수의 성품을 본다. 그리고 가는 길에 큰 무리가 뒤따라오면서 예수를 둘러싸고 밀어댔다.

여기서 회당장과 무리의 위치를 보자. 회당장은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렸다. 엎드린 것은 겸손한 행위이다. 하지만 마가는 따름의 도에 비추어 회당장을 조명한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내 뒤에서 나를 따르라'고 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말했을 때, 베드로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격하게 항의하자, 예수는 베드로는 향해 "사탄아, 내 뒤로!" 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의 뒤에 서야 한다.

예수 앞에 엎드려서 무엇을 간구하는 것은 자신의 절박한 요구를 채우고자 예수를 대상화하는 일이다. 대상화하는 믿음은 불가피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앞의 책, 279쪽)

또 무리들을 보자. 그들은 예수를 떠밀었다. 따른 게 아니라, 떠밀었다는 것은 단어의 부정적 어감처럼, 바람직한 따름이 아니다. 마치 예수를 앞세우고 뒤에서 그를 떠밀면서 자기들의 기대를 충족하기를 강요하는 것 같은 인상이다. 예수를 따르노라고 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그를 압박하여 무슨 일을 일으키도록 충동질하는 군중심리 같은 것이 엿보인다. (앞의 책, 273쪽)

예수를 떠미는 군중의 모습은 예수를 매개로 해서 성공을 이루고자 하는 교회대중을 떠올리게 한다. 분명히 예수를 믿는데, 믿음의 행태는 예수의 뒤를 따르는 게 아니라, 그 분을 떠민다. 각종 욕망을 마음속에 품은 체. 그 끝이 어떤가? 교회대중의 모든 신앙행위와 그 결과물이 하나님나라와는 무관하게, 특정세력이 사유화해 버렸다. 

이렇게 예수를 대상화하고 떠미는, 바람직하지 못한 따름에 대한 대조로 혈루증 여인이 나온다. 혈루증은 번역어이고, 정확하게 말하면 '피를 흘리고 있는' 이다. 특이한 점은 의사들이 여인의 신세를 더 망치게 했다는 말이다. "여러 의사에게 보이면서, 고생도 많이 하고, 재산도 다 없앴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고,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5:27)

의사들은 이스라엘 지도층 부류에 대한 상징이다. 여러 의사가 피 흘리는 여인을 탕진시키고 상태를 더 악화시킨 것처럼,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제구실은커녕, 유대 민중을 더 도탄에 빠뜨리고 죽어가게 한다는 비판이다.

율법에서 피 흘리는 여인은 부정 그 자체이다. 정결례에 따르면 여인은 누구를 만질 수도 없고, 누가 그녀를 만져서도 안 된다. 닿는 즉시 모든 자리가 부정하게 된다. 닿는 남자는 저녁때까지 부정하다.(레위기 15:25-28) 그러므로 여인은 사람 많은 곳에는 아예 있으면 안 된다. 오늘 성경말씀에서 여인이 매우 소극적이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까닭은 자신이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인은 비범했다. "내가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터인데!" 하고 생각했다. 자기 손이 닿으면 그 옷도 부정하게 된다는 정결례에 구애받지 않았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 세상의 지배질서를 깨는 데서 시작한다.

비록 여인은 율법에서는 철저히 변두리 사람이지만, 예수를 따르는 데는 과감했다. 여인은 뒤에서 은밀히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여인은 초조했지만 제 생각을 모험적으로 행했다. 예수 옷에 손만 대도 나을 것이라는 자력적인 믿음을 행했다. 따름의 위치도 예수 뒤다. 예수 앞에 선 회당장, 뒤에서 예수를 떠민 군중들과는 완전 달랐다. 바로 이 자력적인 믿음이 예수도 감동하게 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5:34)

예수는 율법이 정죄한 여인을 하나님의 딸로 존재를 바꿔주었다. 이렇게 예수를 믿는 것은 나의 존재가 완전히 바뀌는 일이다. 이 썩은 세상질서가 강제하는 배제에서 벗어나서 하나님나라의 평등 시민으로 바뀌는 은총이다. 허다한 교회대중은 세상이데올로기에 목을 매고 산다. 하지만 세상이데올로기라는 칼을 벗어야 하나님나라의 자유와 해방을 누린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과 만나 손을 잡는 예수.

피를 흘리는 여인과 대면하느라 시간이 지체된 때문인가? 회당장의 어린 딸이 그만 죽고 말았다. 회당장의 집에 도착한 예수는 울며 곡하는 사람들에게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했다. 사람들이 비웃자, 그들을 다 내보낸다. 하나님의 은총은 비웃고 불신하는 사람에게는 꽁꽁 닫혀 있다. 지금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사는 사람은 결코 새 세상을 경험하지 못한다. 진리의 말씀을 모시려면, 내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한다. 명심하시라.

예수는 부모와 세 제자만 데리고 아이에게 간다. 예수가 아이를 살리는 장면을 보자. 회당장은 애초에 아이에게 손을 얹어 주기를 간청했지만, 예수는 죽은 아이의 손을 잡는다. 시체를 만지는 일은 가장 부정한 일이다. 피를 흘리는 부정은 비길 바가 아니다. 그러나 예수 역시 정결례에 구애받지 않는다.

손을 얹는 것과 손을 잡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손을 얹는 것은 일방성이다. 안수자의 의지만 작용한다. 피안수자는 받기만 한다. 하지만 손을 잡는 것은 서로가 교감하는 행위이다. 서로 통한다. 이처럼 예수는 우리의 믿음이 의존적이기보다는 자력적이고 일방적이기보다는 상호소통적이기를 원한다.

피 흘리는 여인이 자력적 믿음으로 피를 멈추었듯이, 소녀도 자력적으로 일어나도록 하려는 예수의 마음이 손을 잡는 행위로 나타났다. 그래서 일부러 '달리다굼' 했다. "소녀야, 일어나라"는 말이다. 이 말은 아람어다. 유대민중만 쓰는 특수언어이다. 왜 특수언어를 썼나? 부활언어이기 때문이다. 부활은 강력한 반체제 언어이다. 폭력과 죽음에 눌려야 하는데 눌리기는커녕 다시 일어나는 일만큼 강력한 저항은 없기 때문이다. 소녀는 오늘 지배체제에 눌려 신음하는 민중을 상징한다. 어떻게 해야 노예가 아닌 사람으로 살겠는가?

예수는 말씀한다. 나를 대상화하여 의존적이지 말라고. 또 자기들 욕심으로 나를 떠밀지 말라고. 대신에 함께 손잡고 일어나자고. 죽음의 세계를 떨치고 일어나서 하나님나라를 같이 살자고. 이렇게 마가는 가장 보잘것없는 민중인 피 흘리는 여인과 열두 살 어린 소녀를 통하여 새 세상에 걸맞은 믿음이 어떤 행동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 준다.

우리가 지배체제에 굴하지 않고 사람으로 사는 길은 '달리다굼'하는 길뿐이다. 권력의 폭주에 죽음 같은 좌절이 엄습하지만 일어나고 또 일어나자. 그 길뿐이다.

뉴스민에 격주로 연재한 '백목사의 예수읽기'가 오늘로 끝난다. 교회력이 한 바퀴 도는 3년 동안 쓰기로 했는데, 이번 주가 꼭 3년이 됐다. 그동안 읽어준 독자들께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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