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분실에 끌려가서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한테 받았던 고문, 30년 동안 서로 말도 못 꺼내봤었습니다”
지난 5월 26일, 대구지방법원 인근 한 식당에 중년 남성 넷이 모여 30년 전 기억을 되새겼다. 1983년 9월, 전두환 신군부 통치 당시 대구미국문화원에 폭탄 테러를 했다는 혐의로 대구시 원대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한 함종호(60), 손호만(58), 박종덕(57), 안상학(55) 씨다.
1983년 9월 22일, 대구시 수성구 삼덕동의 미문화원에 설치된 폭탄이 터졌다. 이 사고로 미문화원에 주둔 중이던 경찰 등 4명과 고등학생 1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공안당국은 경북대학교에서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이들을 주도자로 지목했다. 폭파 당시 인근 식당에 있었다는 이유다. 사고 다음날인 23일 체포되기도 했고, 늦어도 9월 안에 모두 관할 지서에 수감됐다. 이후 원대동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영장은커녕, 불법구금 상태로 고문을 당했다. 담당은 고문기술자 이근안이었다.
손호만 씨는 폭파 하루 뒤인 23일, 고향에서 추석을 쇠고 대구로 내려오는 길에 잠복해 있던 북부경찰서 대공수사요원에게 연행됐다. 폭파 당시 대구에 있지도 않았는데 영문도 모르고 끌려갔다. 경북도청 근처 개인 주택으로 끌려갔는데, 알몸 상태로 매질을 당했고 거꾸로 매달리기도 했다. 유도신문을 받았고, 의도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몽둥이가 날아왔다. 잠을 재우지 않고 조사를 진행해 날짜감각은 없지만, 한 달 무렵이 지나고 원대동 대공분실로 이송돼 다시 고문을 당했다.
“대공분실에 들어갔더니 칠성판(고문대)이 놓여있고, 지하로 더 내려가면 두꺼운 방음시설이 된 밀실이 나옵니다. 이근안이가 여기서 고문했지요. 매질은 기본이고 알몸수사를 하며 각목으로 다리를 비틀기도 했어요. 내 정신을 추스르기도 힘들어지는데,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시키는 대로 진술했습니다. 포병 생활을 했으니 화약을 다룰 줄 안다고. 그런 식의 허위 진술입니다”
9월 말경 남부서로 잡혀가, 원대동 대공분실을 거친 함종호 씨도 한 달여 기간 동안 모진 고문을 당했다.
“고문하는 쪽도 신념을 다 했지요. 나 하나 안 재우려고 자기들이 교대로 고문과 심문을 했으니까. 맞는 것 보다 잠을 안 재우는 것이 더 힘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문실이 비어 있는 거예요. 사람도 없고. 이런 좋은 일이 있나 싶어 살펴보니 자술서가 하나 있는데, 손호만의 자술서였습니다. 대구에 없는 손호만이 왜 자술서를 썼나 생각은 들었는데 따질 정신이 없었죠. 나중에 생각해보니 원본을 만들어서 베끼라고 돌린 거 같아요. 쓰고 나니 이근안이 와서 위로하는데, 그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대구지검으로 송치된 함 씨는 검사에게 고문 사실과 허위 진술을 강요당했다고 폭로했다. 잘못한 판단이었다. 검사는 함 씨에게 폭언을 가하며 근처에 대기하던 이근안 팀을 다시 불렀다. 그들은 함 씨를 밖으로 끌고 갔는데, 거기에는 손 씨가 있었다. 검사의 반응을 보고 마음이 굳은 함 씨는 “그냥 형을 받는 게 맞겠다”며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는 손 씨를 설득했다. 함 씨 등 5명은 1983년 11월 구속됐고, 그해 12월 공판이 열렸다. 손 씨는 이날 최후 진술에서 고문 사실을 폭로했으나, 재판장은 묵살했다. 결국, 1984년 1월, 이들 다섯 명에게는 각각 진술 내용에 따라 국가보안법, 집회시위법 위반죄가 적용돼 징역 1~3년 형이 내려졌다.
1989년 개정 이전 집회시위법은 “현저히 사회적 불안을 야기시킬 우려가 있는 집회 또는 시위의 예비, 음모, 선전 또는 선동”을 금지했었다.
당시 대구지법은 피고인들이 “역사와 증인 등 현실비판 의식화 서적을 탐독하고···현 정부는 언론자유가 없는 독재정권으로 학생시위로 타도되어야 한다는 망상에 젖은 자로···박종덕, 함종호, 손호만은 공모해 사회적 불안을 야기할 우려가 있는 시위를 계획하고 박종덕이 ‘화염병을 준비하자’, ‘파출소를 파괴하자’라고 하고, 손호만은 ‘내가 폭발물을 만들어 파출소를 파괴해 버리겠다’는 말을 하고···자취방에서 사람들에게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은 반미를 선언하여 학생운동의 획기적 전기가 되었다’등의 말을 해 반국가 단체를 이롭게 하고···‘제국주의론’ 등 이적표현물 3권을 소지해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했다”고 밝혔다.
이들이 투옥되기 직전인 1983년 11월, 이들에 대한 불법 구금과 가혹행위의 빌미였던 대구미문화원 폭파 사건은 수사가 종결된다. 대구시경찰청 수사본부는 11월 3일 '미문화원 폭파사건 수사상황 보고'를 통해 "관련 혐의자나 목격자를 발견할 수 없다"며 "북괴공작원 2~3명이 직접 침투하여 폭파 후 복귀한 것으로 판단되어 더 이상 수사를 계속하더라도 성과가 없을 것으로 전망되므로 본 사건 수사를 종결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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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12월 14일자 경향신문 보도. 생포된 무장간첩 전충남 씨와 이상규 씨가 대구미문화원 폭파는 북한의 공작원이 했다는 내용이다.화면캡쳐: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 |
<뉴스민>은 대구 미문화원 폭파 사건에 대한 경찰의 공식 기록을 찾아봤다. 2011년 대구지방경찰청이 발간한 '대구경찰30년사'에 공식 기록이 있었다. "북한의 남파간첩이 반미 투쟁선동을 목적으로 대구 미문화원에 부비츄랩형 폭발물 가방 2개를 장치한 것이 폭발한 것으로써, 당시 사용하였던 화약의 성분과 아웅산 폭파사건에 사용한 화약이 동일한 북한군용 폭약임이 확인되어 북한 간첩의 소행으로 판명되었으며 6년 후인 1989년 9월 17일 강화도로 귀순한 북한 작전부 개성연락소 소속 간첩 서영철의 진술에 의해 북한 조사부 소속 공작원 이철의 소행인 것으로 판명되었다"는 것이다.
이외에 가혹행위와 관련해 경찰이 작성한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과정에서 경찰은 함 씨 등에 대한 가혹행위 사실을 부인했다.
대구시경, "혐의자 발견할 수 없다" 수사종결
진실위, "불법 구금, 가혹행위 사실 인정"
"수사관 진술은 믿기 어렵다"
경찰은 고문 등 가혹행위 사실 부인
고문피해자 故우상수 씨 2010년 지병으로 타계
1983년 말, 미 레이건 대통령의 방한, 그리고 이후 시행된 학원자율화조치 등이 시행되자 이들은 만기 형량을 채우지 않고 중도 출소했다.
이후 30년, 과거의 상처를 들추지 않았으나, 2005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설립되자 조사를 신청했다. 함 씨 등 피해자 5명은 진실위의 조사에 응했다.
진실위는 이들에 대한 조사 결과를 2010년 조사보고서를 통해 밝혔다. 진실위는 “신청인이 약 30일간 불법구금된 상태에서 잠 안 재우기, 구타, 관절뽑기 등 가혹 행위를 당하는 등 인권을 침해받았고, 미문화원 사건과 달리 별건 반국가단체 고무 찬양 동조죄 등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는 관련 법에 따라 재심사유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2015년 5월, 이들은 대구지방법원에 과거 국가보안법 등의 사유로 유죄 판결을 받은 것에 대해 재심청구를 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일까. 함께 투옥됐던 피해자 故우상수 씨는 2010년 지병으로 타계했다.
앞으로 재심재판이 열리게 되면 수사기관의 불법구금과 가혹 행위의 사실 여부를 가리게 된다. 이외에도 이들이 유죄 판결 사유였던 ‘시위예비음모’, ‘반국가단체 고무·찬양·동조’, ‘이적표현물 소지’에 대한 법원의 판단도 다시 내려질 것으로 보인다.
“저희가 아무 상관도 없는 미문화원 일로 불법 구금되고 극심한 고문을 당한 피해자이지만, 오랜 세월을 열패감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몇몇 사람의 이름을 댔고, 그래서 우리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사람들 여러 명이 조사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해서 고문실에서 죽을 방법도 찾아봤는데 방도가 없었습니다. 이 심정은 부끄럽기도 하고, 죄책감도 듭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죄송하다는 얘기도 하고 싶습니다. 재심을 통해 과거를 바로잡는다면 저희를 비롯해 피해받은 분들의 마음을 풀어주는 길이 될 것입니다.”
기자에게 함종호 씨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사법부는 과거의 잘못을 인정할까. 오는 7월, 대구지법에서는 이들에 대한 재심재판을 판가름하는 첫 심리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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