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지난 호 칼럼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흐름과 이에 저항하는 움직임, 그리고 반전과 평화 운동에서 아나키즘의 의미를 살펴봤습니다. 이번 칼럼은 교육과 생태환경운동에 대한 아나키즘의 인식과 그 의미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번 칼럼으로 아나키즘에 대한 개론적 소개가 마무리되고, 다음 칼럼부터는 디오게네스, 멜리에 신부, 윌리엄 고드윈, 프루동 등 인물을 중심으로 한 아나키즘 이론이 소개됩니다.
자유교육: 아나키교육
오늘날 운영되는 공교육 또는 의무교육제도는 대부분 국가주의교육(혹은 국민교육.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되는 <국민교육헌장>을 떠올려보라!)이다. 이러한 교육은 18세기 유럽에서 근대교육이 실시될 당시부터 국가(산업)발전을 위해 필요한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실시되고 있으며, 또한 필연적으로 그 교육 내용과 방식 등은 국가권력에 의해 통제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국가에 의해 주도되는 공교육제도에 대해 아나키즘은 그 이념의 생성 단계부터 상당히 적대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개인의 자치와 자율, 그리고 자유에 기반한 사회를 지향하고, 권위와 그에 바탕을 두고 있는 국가(즉, 국가주의)의 존재도 부정하는 아나키즘이 국가주의교육을 비판하고, 자유교육을 주장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다. 국가교육제도에 대한 최초의 비판자의 한 사람인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은 『정치적 정의와 관련한 질문(An Enquiry Concerning Political Justice)』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국민교육계획은 국민정부와 제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므로 저지해야만 한다. ... 정부는 그 지배력을 강화하고, 그 제도들을 영속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그 계획을 사용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국민교육제도의 선동자로서 그들의 견해는 그들의 정치적 능력을 행사함에 있어 그들이 표명하는 견해와 유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Colin Ward, p. 81에서 재인용)
고드윈이 우려한 바와 같이, 근대제국주의와 군국주의는 근대‘국민’교육제도를 확립함으로써 ‘국민’계몽에 성공하였음은 물론, 나아가 ‘국가’발전에 필요한 산업인력과 전쟁에 필요한 전투인력을 지속적 혹은 영속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근대국가가 교육을 통하여 바란 것은 권위를 부정하는 자치와 자율적 개인이 아니다. 오히려 권위와 국가에 복종하는 종속적․타율적 ‘국민’이었던 셈이다.
“근대교육방법은 개인의 자유와 사고의 독창성을 거의 존중하지 않는다. 획일성과 모방이 (근대교육)의 모토이다. 그리고 학교는 아이들을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수감자와 군인을 위한 교도소와 군대막사와 같다. (학교가 있는) 장소는 아이들의 의지를 꺾고, 부수고, 주무르고, 그 자신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만드는 곳이다.” (Emma Goldman, p. 142)
엠마 골드만(Emma Goldman)의 견해에서 볼 수 있듯이 아나키스트들은 근대교육에 대해 불신하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주창된 것이 ‘근대교육운동(Modern School Movement; Mouvement de l'Ecole Moderne)’이다. 일명 ‘자유학교운동(Free School Movement)’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운동은 모두 권위주의 교육을 배격하고, 자신의 삶의 주체로서 자율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자유주의교육방식을 지향하였다. “교육 과정의 중심은 아이들이다. 교육이란 그런 것이고,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프란치스코 페레(Franciso Ferrer)의 말은 근대학교운동의 기본 취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근대학교운동은 1890년대 프랑스인 루이즈 미셀(Louse Michel)과 세바스티앙 포르(Sébastien Faure)에 의해 처음 시작되어 프란치스코 페레 등이 그 뒤를 이었다. 페레는 1901년 근대학교를 설립하여 1905년까지 스페인에서 학교 수가 무려 50개에 이르렀다. 1909년 스페인정부는 폭동을 주도한 혐의로 그를 처형하였다. 페레의 사후 그의 교육사상은 영국, 프랑스, 벨기에 등 유럽은 물론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 일본, 중국 등 동부유럽과 남미, 그리고 아시아 등 세계 각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미국에서는 엄청난 규모의 교육 개혁으로 이어져 자유교육운동이 확산되었다.
박홍규에 따르면, ‘자유(교육)학교’라는 말은 “조금씩 다르게 쓰이는 여러 가지 말들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비록 용어와 표현은 다를지라도 모두 공통되게 자유를 추구하는 교육이라는 점에서 자유(교육)학교라고 부르고 있다. 이 학교는 다음과 같은 공통가치와 목적, 즉 ① 자발성, 자주성, 주체성의 원리, ② 개성과 개인차의 중시, ③ 교육과 생활의 통일, ④ 민주주의와 공동생활의 참가를 지향하고 있다(박홍규, 286-290쪽).
자유학교가 지향하는 교육 가치와 목적은 교사의 절대권위와 학생의 복종, 성적과 입시 위주의 학사 관리와 운영에 바탕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과는 정반대되어 양립할 수 없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제는 ‘교사를 위한 학교’, ‘국가를 위한 학교’가 아니라 ‘학생을 위한 학교’, ‘학생이 행복한 학교’를 만들 때가 되지 않았는가. 학교가 더 이상 친구와 동료를 적대적 경쟁자로 여기는 곳이 아니라 화해와 협력, 그리고 상생의 동반자로 여기는 깨어있는 시민교육이 이뤄지는 교육공동체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 ‘자유(교육)학교’라는 말은, “free school, open school, alternative school, community school, new school, pioneer school, informal school, home school, 진보주의학교, 아동중심주의학교, 반권위주의학교, 실험학교, 전원학교, 벽이 없는 학교, 탈학교 등 나라나 시대에 따라, 또는 학자나 교육자에 따라 달리 사용되는 말들을 모두 포함한다.
생태환경운동: 에코아나키즘
환경 문제만큼 정치적 이념을 묻지 않고 보편적 합의에 이를 수 있는 이슈가 있을까? 산업혁명 이후 근현대사회가 발전하면서 자연환경의 오염과 파괴는 물론, 그로 인간의 건강과 사회환경에 미친 악영향의 사례는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1952년 12월 ‘템즈강의 기적’을 이룬 영국 런던에서는 석탄 매연과 스모그 등 극심한 대기오염으로 약 4,000명의 시민들이 호흡기 관련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거의 같은 시기 일본 도야마현의 진즈강 하류에서는 미쓰이금속주식회사 광업소에서 버린 폐광석에 포함된 대량의 카드뮴 중독으로 공해병인 ‘이타이이타이병’이 발병하였다. 또한 원전사고에 의한 환경파괴현상도 심각하다. 1986년에는 체르노빌원전사고가 일어나 전세계를 긴장시켰으며, 2011년 2월 일어난 후쿠시마 제1 원자력발전소 방사능누출사고는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 중인 문제이다.
환경오염은 다른 나라에서만 심각하게 다뤄지는 이슈가 아니다. 1950년대 전후 복구와 경제발전 및 산업화정책을 활발하게 추진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대규모 환경피해사건이 빈발하였다. 1970년대의 한강 수질오염, 1987년 시화호사건 및 1992년 3월에 일어난 낙동강페놀사건 등은 지금도 우리의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처럼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심각해지는 환경문제에 대해 아나키즘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이에 대해 검토하기 전에 먼저 ‘환경(environment)’과 ‘생태(ecology)’, 두 용어에 대한 아나키즘의 인식의 차이점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나키즘은 원칙적으로 환경 문제 발생의 원인을 ‘근대 실재론’에서 찾고 있다. 이 이론은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키는 이원론과 기계론, 즉 인간중심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데카르트, 베이컨 등). 이원적 실재론에 의하면, “‘자연은 자원의 집합소’에 불과하며, 인간은 나머지 자연 개체들과는 분리되어 그것들 밖에 있거나 초월하거나 위에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이로부터 인간중심주의가 형성되어 자연이란 인간에 의해 “조작 가능하도록 분할되고 기계처럼 조합”된 것으로 간주되었다(방영준, 202~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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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art-and-anarchism.tumblr.com | | |
이처럼 자연에 대하여 우월적이고 지배적인 존재로서 인간중심주의를 강조하는 실재론은 근대과학문명이 발달하면서 관념론에 대응하는 이론으로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아나키즘은 환경보다는(또는 환경보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생태(학)(에콜로지)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이 분야에 대해 연구하는 것을 ‘생태아나키즘’이라 하는데, 영어식 표현으로 ‘에코아나키즘(Eco-anarchism)’ 혹은 ‘그린아나키즘(Green Anarchism)’이라 부르기도 한다.
아나키즘이 생태(학)이라는 용어를 선호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아나키즘은 ‘환경보호주의’라는 표현으로 대변되듯이 자연을 수동적인 서식지로 간주하는 ‘환경’ 내지는 ‘환경보호’라는 표현에 대해 강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환경보호주의’는 실재론에 입각한 ‘기계론적․도구론적 시각’이다. 이 시각에 의하면, 자연이란 동물․식물․광물 등과 같은 ‘물질(혹은 물체)’로 구성되어 있을 뿐 모두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하도록 활용되어야 한다고 간주된다. 이 시각에서는, ‘도시도 자원(도시=자원)’이고, ‘인간도 자원(인간=자원)에 불과하다. 환경보호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인간은 자연을 지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제에 따라 근대산업국가들은 분별없는 환경 파괴와 약탈로 자연과 사회의 생태계를 교란시키고, 그 위험을 줄이기 위해 다시 기술개발에 의존함으로써 오히려 생태계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히는 행위를 되풀이하였다.
이처럼 환경보호주의는 “인간은 자연을 지배해야 한다”는 전제를 사회의 근본원리라고 보고, 이에 대해 어떤 의문도 가지지 않는다. 근본문제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으니 사회의 다양한 현상에 대해 단기적 해결책만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환경보호주의자들은 대기․수질오염과 같은 한정적인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어 이를 해결하려 할 뿐 그러한 환경침해가 야기되는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본질적 원인과 그것을 해결하려는 의식과 의지가 없다.
환경보호주의자들의 이와 같은 태도에 대해 에코아나키스트들은 생태(학)의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아나키즘은 먼저 생태계에 관한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이 사회계급, 신분 및 경쟁적 자본주의제도에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불합리하고 차별적인 제도가 자연을 인간에 의해 생산․소비되는 단순한 ‘자원의 집합소’라고 보는 견해를 양산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아나키즘의 관점에서 보면, 생태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은 인간사회의 내부, 특히 ‘국가와 자본주의’라는 사회의 위계질서(혹은 계층 구조; hierarchy)에 있다. 자본주의는 '성장 아니면 죽음‘의 제도이고, 환경을 파괴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는 중앙집권체제이며, 인간이 생태계와 상호 작용하는 데 필요한 자유와 참여를 제한하고, 그에 개입한다. 이러한 견해는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에 의해 ‘생태 문제는 곧 사회 문제’라는 ‘사회생태주의’로 발전적으로 전개된다(방영준, 201쪽). 그의 견해는 생태계 문제의 근본 원인을 사회의 위계질서에 있다고 보는 아나키즘의 일반 입장과 큰 차이가 없다.
또한 아나키즘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조화 혹은 균형으로 본다는 점에서 아나키즘과 생태학은 같은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 물론 환경보호주의도 ‘조화’를 내세우고 있다. 이때의 ‘조화’란 인간 ‘서식지’의 파괴를 최소화하면서 자연을 약탈하는 새로운 기술의 개발을 기본 전제로 하여 전개된다. 그러나 환경보호주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협정’으로 보는 반면, 에코아니키즘은 생태조화프로젝트를 통하여 양자의 관계를 영구적 ‘균형’으로 본다. 이 점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관한 환경보호주의와 아나키즘의 입장은 본질적 차이가 있다(Murray Bookchin, p. 86).
위의 논의를 요약하면, 아나키즘은, “인간이 환경을 관리하고 규제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거부한다. 국가야말로 환경 파괴와 약탈의 문제를 일으키는 주체이자 소수자에 의해 다수자를 지배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나키즘은 생태친화적 혹은 생태조화적인 사회를 창조함으로써 국가와 자본주의를 비롯한 기타 위계질서를 붕괴시키려고 한다. 이에 대해 북친은, “인간에 의한 자연 지배는 인간에 의한 인간 지배로부터 비롯되며, 위계질서와 지배에 대한 비판과 해체가 현 생태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권위주의적이고 억압적인 위계질서를 넘어설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북친은 “자율적이고 분권화된 사회가 생태적이다”고 하면서 ‘자율적이고 분권화된 작은 공동체’를 그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하승우, 89쪽).
또 다른 미래의 상상: 아나키 공동체를 향하여
“국가 없는 사회는 가능할까?”
아나키스트들이 꿈꾸는 사회의 모습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은 반론에 직면한다. “과연 국가 없는 사회는 가능한가?”, “과연 국가 없이도 사회질서의 유지가 가능할까?”
근대국가체제가 확립된 이후 국가와 개인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인간은 ‘국가 없는 사회’를 꿈꾸면서도 반대로 ‘국가 없는 사회’를 떠난 삶을 꿈꿀 수 없는 아이러니하면서도 역설적 현실에 처해있다. 문제는, 인간이 국가에 의해 지배받고 통치되고 있음에도 정작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정의를 내리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점이다.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일정한 영토와 거기에 사는 사람들로 구성되고, 주권에 의한 하나의 통치 조직을 가지고 있는 사회 집단”이 곧 국가다(네이버사전: ‘국가’). 그리고 그 국가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가 있는데, 국민․영토․주권이다. 오늘날에는 이 속에 외교능력을 포함시켜 네 가지 요소로 보고 있다.
위 정의에 의하면, 국가를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인 “국민․영토․주권 및 외교능력”은 형식적으로는 ‘병렬적 관계’(즉, ‘국민=영토=주권=외교능력’)에 있다. 하지만 근대국가를 ‘주권국가’라고 부르고, 다른 요소에 주권을 더하여 ‘국민주권’, ‘영토주권’, ‘대외주권’으로 부르듯이 국가의 구성요소 중에서 ‘주권’은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주권은 국가의 절대적이며, 영구적인 권력이다”라는 장 보댕(Jean Bodin; 1530~1596)의 말은 국가권력의 행사에서 주권이 가지는 의미를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강력한 주권을 행사하는 국가는 ‘유형적 실체’가 없다. 따라서 실체가 없는(즉, ‘무형적 실체’로서) 국가는 입법․사법․행정기관으로 대표되는 그 기관을 통하여 주권을 행사한다. 이 때 국가가 행사하는 주권이 지배권 내지는 통치권이다.
이와 같은 고전적 주권이론은 토마스 홉스와 존 로크, 그리고 장자크 루소가 주장한 사회계약설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국민주권사상으로 정립된다. 이 사상에 의하면, 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므로 국가의 정치 형태와 구조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권력은 국민에게 있다. 우리 헌법도 제1조 2항에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여 이 원칙을 명시하고 있다. 국민주권사상은 국가권력 차원에서 행사하는 통치권 내지는 지배권과 팽팽한 대립과 긴장관계를 형성하며 발전하여 왔다.
‘아나키’란 말은 ‘지배(자) 혹은 통치(자)가 없음’이란 뜻이다. 이러한 사회는 인간 사이의 관계가 절대자유와 평등의 상태가 유지되어야 가능하다. 더욱이 아나키즘은 원칙적으로 국가를 부정한다. 아나키즘과 국가는 본질적으로 양립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나키스트들에게 있어 국가 중심적 사회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체제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사회는 ‘지배하는 자도 없고, 지배받는 자도 없는 사회’, 즉 ‘아나키사회’ 혹은 ‘아나키 공동체’가 아니면 도저히 이룰 수 없다. 그렇다면 인류역사에서 다분히 이상적인 ‘아나키사회’ 혹은 ‘아나키 공동체’가 나타나고 실현된 적이 있었던가? 아나키스트들은 파리코뮌, 헤이마켓 희생자(Haymarket Martyrs), 생디칼리스트조합의 설립, 러시아혁명 때의 아나키스트들, 이탈리아공장점거운동 때의 아나키즘, 스페인혁명 때의 아나키즘 및 1968년 프랑스 5월혁명 등을 그 실례로 들고 있다(A.5: What are some examples of 'Anarchy in Action'? in: http:www.anararchismfag.org)
이러한 역사적 경험과 사례를 통하여 아나키즘은 ‘국가 없는 사회’의 이상적이고 현실적 형태로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 이는 위에서 북친이 말한 ‘자율적이고 분권화된 작은 공동체’로서 ‘아나키사회’ 혹은 ‘아나키 공동체’를 말한다. 국가체제에 비하여 공동체가 ‘열린’ 개념임은 분명하다. 이를테면, 28개 개별‘주권’국가로 구성된 유럽연합(EU)를 보더라도 국가주권은 국가 단위보다도 지역 단위의 ‘공동체’에서 행사될 때 훨씬 ‘개방성’을 띤다(마이클 테일러, 36쪽).
공동체를 ‘열린 개념’으로 이해할 때 모든 공동체에는 세 가지 속성 혹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공동체는, ① 그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이 공통적인 신념과 가치를 가지고 있고, ② 그 구성원들의 관계는 직접적이고 다면적이며, ③ 호혜성(reciprocity)의 바탕 위에 설립․운영된다(마이클 테일러, 37~44쪽). 그러나 무엇보다 아나키 공동체를 결정짓는 핵심적 특징은 바로 ‘자발성’, 즉 ‘자치와 자율, 그리고 자유’일 것이다. 이에 대해 글렌 알브레히트(Glen Albrecht)는, 아나키스트들은 “외부의 힘 혹은 권위를 사용하지 않고 자발적 질서의 자유로운 전개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강조한다(Glen Albrecht, p. 110).
하지만 아나키 공동체를 만들고, 운영하는데 성공했다고 할지라도 그 이행에는 여전히 현실적인 문제(어쩌면 치명적인 한계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평등주의적 아나키 공동체는 국가의 보호 아래 유지될 수밖에 없고, 또 국가에 의해 정복 혹은 식민지화되거나 흡수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국가 없는 사회’로서 아나키 공동체가 가진 치명적인 약점이자 한계라고 할 수 있다.
근대주권국가체제가 형성된 이후 아나키 공동체를 결성하려는 시도를 지극히 현실적으로 이해하면, ‘국가 없는 사회’는 크게 두 가지 형태를 띠고 있다. 하나는, 코뮌이나 키부츠와 같은 전체적 공동체의 형태로, 다른 하나는, 아나키즘의 이념에 바탕한 협동조합, 집산적 모임, 이웃의 모임과 다른 관습 및 직접행동의 계획, 상호부조 및 자주관리 등의 부분적 공동체의 형태로 나타난다(마이클 테일러, 193~194쪽).
전체적 혹은 부분적 공동체 어느 형태든 중요한 것은, 아나키 공동체는 권위와 과도한 경쟁위주의 위계질서를 벗어나 자유로운 개인들로 구성된 자유사회여야 한다. 모든 사회가 아나키사회일 수도 없고, 또 모든 사람이 아나키 방식으로 생활할 수도 없다. 또한 아나키스트들은 ‘완벽한(혹은 완전한) 사회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들이 바라는 것은, ‘개인의 절대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다. 자유가 보장되어야 비로소 사회와 개인은 서로 성숙․발전하면서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나키 공동체에서 개인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이에 대해 크로포트킨은 말한다(Peter Kropotkin, “The Paris Commune”).
“코뮌의 구성원(개인)들은 (코뮌의) 바깥에서 뿐만 아니라 그 내부에서도 아나키스트가 되어야 한다.”
<참고문헌>
•마이클 테일러(송재우 옮김), 이학사, 2006.
•박홍규, 『자주․자유․자연’ 아나키즘 이야기』, 이학사, 2004년.
•방영준,『저항과 희망, 아나키즘』, 이학사, 2006.
•하승우, 『아나키즘』, 책세상, 2008.
•Emma Goldman, Red Emma Speaks: An Emma Goldman reader(3rd Ed.), Humanity Books, 1998. https://libcom.org/files/Red%20Emma%20Speaks.pdf
•Colin Ward, Anarchy in Action, Freedom Press, 1996. https://libcom.org/files/Ward_-_Anarchy_in_Action_3.pdf
•Glen Albrecht, “Ethics, Anarchy and Sustainable Development”, Anarchist Studies, vol.2, no.2.
•Murray Bookchin, The Ecology of Freedom: The Emergence and Dissolutin of Hierarchy, Cheshire Books, 1982.
https://libcom.org/files/Murray_Bookchin_The_Ecology_of_Freedom_1982.pdf
•Peter Kropotkin, “The Paris Commune”, June 1880.
https://www.marxists.org/reference/archive/kropotkin-peter/1880/paris-commune.htm
•A.5: What are some examples of 'Anarchy in Action'? in: http:www.anararchismfa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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