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봉, 정직, 무기한 대기발령, 두 번의 해고. 故 양우권 광주전남지부 포스코사내하청지회 EG테크분회장이 겪어야 했던 일이다. 금속노조를 포기하지 않는 대가는 가혹했다.
“스스로 죽을 때 까지, 더 이상 갈 곳 없는 벼랑 끝까지 내몰았다. 악랄한 살인자본 포스코와 EG테크가 동지를 죽였다.” 포스코사내하청지회 조합원들은 양우권 열사가 노조탄압으로 겪었던 고통을 얘기하며 분노를 참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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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12일 포스코사내하청지회 조합원들이 포스코 광양제철소 1문 앞에서 포스코와 EG테크의 탄압을 규탄하는 출근 선전전을 하고 있다. 출처: 금속노동자 강정주 | | |
5월9일, 열사는 자결하기 하루 전 날까지 EG그룹 체육행사장을 찾아 갔다. 노동탄압을 중단하라는 피켓을 들고 행사장에서 선전전을 벌였다. 그리고 다음날 “용기 잃지 마시고 힘내서 가열차게 투쟁해 저 간악한 정권과 자본을 무너뜨리고 꼭 승리하십시오”라는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열사는 목을 매 숨지는 마지막 순간에도 노조 조끼를 입고 있었다. 3년 여의 해고 생활 내내 벗지 않았던 작업복과 조끼, 그 모습 그대로 “하늘에서도 연대하겠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자결 전 날도 "노동탄압 중단하라" 선전전
양우권 열사는 1998년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 박지만이 회장으로 있는 EG그룹의 계열사이자 포스코의 하청업체인 EG테크에 입사했다. 2006년 동료들과 노조에 가입, EG테크지회(현재 EG테크분회)를 설립했다. 열사는 사망 직전까지 EG테크에 남은 유일한 금속노조 조합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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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3월6일 포스코센터 후문에서 양우권 열사가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출처: 금속노동자 김형석 | | |
처음부터 조합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회를 설립하고 53명이 가입했고 1년 여 동안 회사와 교섭도 했다. 회사는 당시 지회장, 교섭위원들부터 회유했다. 다수의 조합원이 집단으로 노조를 탈퇴했다. 열사를 비롯한 세 명의 조합원이 남았다. 회사는 남은 이들에게도 악랄한 탄압을 멈추지 않았다. 4조3교대 근무를 하던 조합원들을 상주조로 인사명령했다. 김정기 지회 미비부장은 “워낙 박봉이다. 교대근무, 잔업을 해야 그나마 먹고 산다. 제철소에서는 4조3교대 근무를 하던 사람을 상주조로 보내는 것을 징계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한다.
임금이 40여 만원씩 줄어들었다. 두 명의 조합원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노조를 탈퇴했다. 노조 탈퇴 직후 이들은 다시 교대 근무를 하던 원직으로 복귀했다. 열사는 끝내 회사의 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회사는 2008년 초부터 열사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했다.
열사는 두 차례의 부당해고 이후 지난해 5월 복직했다. 회사는 열사를 기존에 일하던 곳으로 복직시키지 않았다. 제철소 밖 EG테크 설계팀 사무실로 배치했다. 현재는 EG테크에서 법인을 분리해 별도 법인으로 운영하는 곳이다. 회사는 인터넷도 사용할 수 없는 컴퓨터 한 대 있는 책상에 하루종일 열사를 앉아있게 했다. 열사 머리 위 천장에는 열사를 감시하는 CCTV가 돌아가고 있었다.
김정기 미비부장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김 미비부장은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을 이전에 한 번도 본 적 없다. 회사는 사람들에게 대놓고 ‘양우권과 말하지 마라. 회식도 하지 마라’고 했다”며 “일을 달라고 해도 주지 않으면서 대표이사라는 사람이 와서 일도 안하면서 비싼 월급 받아간다고 모욕을 줬다”고 상황을 전했다. 화장실 가는 시간도 허락 받아야 했다. 화장실 가는 시간을 제외하면 열사는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채 벽을 바라보고 책상에 앉아있어야 했다.
열사는 “저를 화장해 제철소 1문 앞에 뿌려주십시오. 새들의 먹이가 되어서라도 내가 일했던 곳 그렇게 가고 싶었던 곳 날아서 철조망을 넘어 들어가 보렵니다”라고 유서를 남겼다. 열사는 부당한 격리 조치로 3년의 해고 투쟁을 끝내고도 1년 여 동안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자신이 일하던 현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하루종일 격리, 감시, 왕따, 모욕
비인간적인 작업대기 조치는 처음이 아니다. 회사는 2010년 10월부터 3개월 동안 열사에게 대기발령을 지시했다. 당시 회사는 열사를 현장 사무실 의자에 앉혀두고 하루종일 작업표준서를 읽게 했다. 화장실 가는 시간 외에는 의자에서 움직이지 말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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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12일 포스코사내하청지회 조합원들이 포스코 광양제철소 1문 앞에서 포스코와 EG테크의 탄압을 규탄하는 출근 선전전을 하고 있다. [출처: 금속노동자 강정주] | | |
김 미비부장은 “당시에 열사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구급차에 실려가기도 했다”며 “다른 사람들은 힘든 일 안하면 좋지 않냐고 모르는 소리를 한다. 내가 일하던 업체에서도 일을 시키지 않고 대기발령하면 한 달을 버티지 못하고 다 나갔다”고 지적했다. 김 미비부장은 “법원이 부당해고를 모두 인정했지만 지방노동위원회 등은 회사가 열사를 격리조치 하고 부당하게 대기명령 한 것을 부당노동행위로 인정하지 않았다”며 “지노위가 회사 편을 들어주니 복직 이후에도 똑같은 탄압을 자행했던 것”이라고 규탄했다.
현장에서도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압을 당했다. 회사는 노조 조끼를 벗지 않았다는 이유로 열사를 인사위원회에 회부했다. 열사가 몸이 아파서 조퇴를 하겠다고 신청했지만 이를 불승인하고, 결국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가자 근무지 무단이탈이라고 했다. 회사는 이 사유로 열사를 정직 2개월 처분 했다.
심지어 회사는 정직 기간 출근하지 않았으니 무단결근이라며 2011년 4월 1차 해고를 단행했다. 김정기 미비부장은 “정직 징계를 당하면 출입증을 회수한다. 출입증이 없으면 들어가고 싶어도 제철소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런데도 EG테크는 취업규칙 운운하며 출근을 강요하고 해고했다”고 지적했다.
전체 노동자들에게 지급하는 100% 성과금도 열사에게는 50%밖에 지급하지 않았다. 잔업에서 배제해 임금이 줄었다. 감봉과 정직 등 징계도 반복했다. 회사는 이 과정에서도 노조를 탈퇴하라고, 노조만 탈퇴하면 징계를 철회해주겠다는 회유를 지속했다.
회사의 온갖 탄압과 협박에도 열사는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들 뜻대로 되지 않자 회사는 열사의 가족과 지인들까지 쫓아다니며 노조 탈퇴를 종용했다. 열사의 부인은 EG테크 노동자 숙소에서 밥을 해주는 일을 했다. 9년 동안 일했지만 회사는 하루 근무시간이 두 시간이 안된다는 이유로 퇴사할 당시 퇴직금도 주지 않았다. 열사의 아들 양효성씨는 “회사에서 어머니가 일하는 가게까지 쫓아왔다. 몇 시간이고 앉아서 ‘남편 노조 탈퇴 시켜라, 그러면 예전에 안 준 퇴직금 주겠다’고 협박하고 갔다”며 “어머니 지인들에게까지 회사가 연락을 했다”고 말했다.
“노조만 탈퇴하면 다 철회해주겠다”
7년 동안 끊임없이 이어진 탄압으로 열사는 수 년 동안 병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김정기 미비부장은 “약 없이 버티지 못했다. 상경투쟁을 가도 약을 꼭 챙겼다. 잠을 자도 자는 내내 잠꼬대를 했다. 악몽을 꾸고 회사 관리자가 쫓아온다는 얘기를 했다”고 말했다.
“노조를 포기하라고 벼랑 끝까지 내몰았다. 힘들다, 고통스럽다 호소하는데도 회사는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 김정기 미비부장은 “강직한 사람이었다. 부조리한 일을 그냥 넘기지 못했다. 옳다고 생각한 일을 포기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설명했다. 결국 열사는 회사가 그토록 눈엣가시로 여겼던 조끼를 입고 자택 근처 야산에서 목을 매 숨졌다.
김정기 미비부장은 “열사는 본인이 복직한 뒤에도 해고자들 걱정을 많이 했다. 유서에도 남겼지만 무엇보다 해고자 복직과 지회가 잘 되기를 간절히 원할 것이다”라며 “평소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우리에게 얘기한 것보다도 포스코, EG테크의 탄압이 훨씬 악랄 했을 것이다. 이들이 열사와 가족에게 무릎꿇고 사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5살 큰 손주를 누구보다 예뻐했던 열사. 김정기 미비부장은 “손주를 볼 때 형님이 유일하게 웃었다. 임금도 적고 어려운 상황에 가족에게 충실하지 못해 미안해했다. 가족들이 편안해지길 바라고 있을 것이다. 가족들이 열사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기 위해 장례도 미루고 싸우고 있다. 이 싸움 결코지지 않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기사제휴=금속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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